History/Europe

영국 역사 6.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닌 방벽 - 로마의 북방 한계선

SSSCH 2025. 5. 19. 00:06
반응형

로마 제국의 국경선 정책

로마 제국이 브리튼을 정복한 후 가장 큰 과제는 북방 경계선 설정이었다. 제국의 확장 정책과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로마 황제들은 어디까지 지배할지 고민했다. 특히 북부 지역에 거주하던 픽트족(Picts)은 로마의 지배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이에 대한 대응책이 필요했다. 카레도니아(현 스코틀랜드)는 험준한 지형과 강한 저항으로 인해 로마가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여러 차례 원정을 시도했으나 결국 지배 비용이 이익보다 크다는 판단 아래 방어선을 구축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건설 배경

하드리아누스(Hadrian) 황제는 AD 122년 브리튼을 방문하면서 북방 경계선 문제를 직접 살폈다. 그의 전임자들이 추진한 적극적 정복 정책과 달리,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영토를 정비하고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로마 역사가 스파르티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인과 야만인을 분리하기 위해 방벽을 세웠다"라고 한다. 당시 로마는 다쿠스 전쟁을 끝낸 후였고, 제국 동부에서도 여러 반란을 진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부 브리튼의 안정화는 제국 전체 방어 전략의 일환이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구조와 기능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동서로 약 118km에 달하는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었다. 솔웨이 만(Solway Firth)에서 타인강(River Tyne) 하구까지 브리튼 섬을 가로지르는 이 방벽은 당시 로마 제국의 가장 인상적인 토목 사업 중 하나였다. 방벽의 높이는 약 4.5m, 너비는 약 3m였으며,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로 축조되었다.

방벽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복합적 방어 시스템이었다. 약 1.6km마다 소형 요새(milecastle)가 설치되었고, 그 사이에 두 개의 감시탑이 있었다. 또한 방벽을 따라 17개의 대형 요새(fort)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각 요새는 500~1,000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방벽 남쪽으로는 도랑(vallum)이 파여 있어 민간인의 접근을 통제했다.

이 방벽의 주요 목적은 단순한 군사적 방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통제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로마의 위엄을 과시하는 역할이 컸다. 방벽의, 요새마다 설치된 관문(gates)은 교역을 관리하는 검문소 역할을 했고,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통과할 수 있었다.

방벽 생활과 군단 문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따라 주둔한 로마 군인들의 생활은 고된 변방 수비대의 일상이었다. 주로 갈리아, 게르마니아, 히스파니아 등 제국 각지에서 모집된 이들은 25년 복무 기간 동안 브리튼의 혹독한 기후와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방벽 요새에서 발견된 유물과 비문들은 이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빈디란다(Vindolanda) 요새에서 발견된 목판 편지들은 특히 가치 있는 자료다. 이 편지들을 통해 군인들이 가족에게 더 따뜻한 속옷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거나, 생일 파티에 초대하는 등 일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며 로마 문화를 전파했음도 알 수 있다.

방벽을 따라 형성된 군사 취락(vicus)에는 상인, 장인, 술집 주인, 매춘부 등 군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양한 민간인이 모여 살았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신전과 제단은 로마군이 미트라스, 쥬피터, 미네르바 등 다양한 신을 섬겼음을 보여준다. 특히 브리튼 고유의 신들을 로마 신과 동일시하는 종교적 융합이 일어났다.

안토닌 방벽으로의 확장과 후퇴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는 더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AD 142년경 로마군은 현재의 글래스고와 에든버러를 잇는 지협에 새로운 방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약 60km 길이의 이 방벽은 주로 잔디와 목재로 만들어졌으며, 석조 기초 위에 흙을 쌓아올린 형태였다.

안토닌 방벽은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짧았지만, 더 많은 요새(19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북방 진출은 오래가지 못했다. 픽트족의 지속적인 공격과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의 군사적 필요로 인해 로마군은 약 20년 후인 AD 160년대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다시 후퇴했다.

이후 세베루스 제(Septimius Severus) 황제 시기에 안토닌 방벽을 재점령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로마 브리튼의 실질적인 북방 한계선으로 남게 되었다.

방벽의 고고학적 가치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오늘날 영국에 남아있는 가장 인상적인 로마 유적 중 하나로,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세기부터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방벽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방벽을 따라 발견된 수많은 유물 - 동전, 도자기, 무기, 장신구, 비문 등 - 은 로마 군사 체계와 변방 생활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특히 빈디란다와 하우스테즈(Housesteads) 같은 주요 요새는 광범위하게 발굴되어 방문객들이 로마 시대 군사 시설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방벽의 보존 상태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노섬벌랜드 국립공원 구간은 특히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는 방벽의 원래 높이와 구조를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도시화된 지역에서는 많은 부분이 파괴되거나 다른 건물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로마의 국경 정책이 남긴 유산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닌 방벽은 단순한 군사 시설을 넘어 로마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는 로마가 무한정 확장하기보다 안정적인 국경을 설정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후 제국의 다른 국경지대 관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방벽은 또한 로마와 비로마 세계 사이의 문화 교류 지점이었다. 북쪽의 부족들은 방벽을 통해 로마의 물자와 아이디어를 접했고, 이는 그들의 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로마인들도 현지 문화를 받아들여 독특한 브리튼-로마 문화가 형성되었다.

로마가 브리튼에서 철수한 후에도, 방벽은 지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세 시대에는 방벽의 석재가 교회, 성, 농가 건설에 재활용되었고, 방벽을 따라 형성된 도로는 오랫동안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A69 도로의 상당 부분은 로마 시대 군사 도로의 경로를 따른다.

더 넓게 보면,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근대 국경의 개념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리적 장벽을 통한 영토 구분과 이동 통제라는 개념은 현대 국경 관리에도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

결론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닌 방벽은 로마 제국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기념비적 구조물이다. 제국의 위대한 공학 기술과 조직력을 과시하면서도, 동시에 로마 세력이 더 이상 북쪽으로 확장하지 못했음을 인정한 선이기도 했다. 이 방벽들은 단순한 군사 시설을 넘어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심리적 경계이자, 제국의 통치 철학이 구현된 상징이었다.

근 300년 동안 브리튼 북부 지역의 삶을 형성했던 이 방벽들은, 오늘날까지도 영국 풍경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로마 시대의 위대함을 증언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일부는 지금도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어, 고대 로마인들이 브리튼 섬 한가운데 그어놓은 문명의 경계선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방벽은 로마 제국의 통치 전략뿐만 아니라, 국경선과 문화적 접촉 지대로서 인류 역사의 중요한 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서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