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4. 클라우디우스 정복령과 로마 식민화 - 브리튼의 속주화와 군단 요새 구축

SSSCH 2025. 5. 1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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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시저의 두 차례 원정 이후, 로마의 브리튼 정복 계획은 약 90년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튼에 대한 본격적인 정복을 명령했고, 이는 400년 가까이 지속될 로마의 브리튼 지배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클라우디우스의 정복은 브리튼을 로마 제국의 공식 속주로 편입시키고, 섬 전체에 로마 문명의 씨앗을 뿌리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클라우디우스의 정복 결정 배경

기원후 41년, 칼리굴라 황제의 암살 후 예상치 못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50세였던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 장애가 있었고 정치적 경험도 부족했기에, 군사적 영광을 통해 로마 민중과 원로원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브리튼 정복은 그에게 완벽한 기회였다.

정치적 이유 외에도 경제적 동기도 중요했다. 브리튼은 금, 은, 주석, 납, 철 등 풍부한 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비옥한 농토는 로마 제국의 식량 공급에 기여할 수 있었다. 또한 브리튼 정복은 로마 제국의 갈리아(현 프랑스) 지방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갈리아 반란 세력들이 종종 브리튼에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정복 결정의 촉매제는 브리튼 정치 상황의 변화였다.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브리튼 지도자 퀴노벨리누스(카툴롤로스)가 기원후 40년경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 중 카라타쿠스와 토고둠누스는 반로마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아트레바테스 부족을 공격했다. 이에 아트레바테스의 왕 베리카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클라우디우스는 이를 브리튼 개입의 정당한 명분으로 삼았다.

로마군의 브리튼 상륙과 초기 전투

기원후 43년 봄,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장군의 지휘 아래 약 40,000명 규모의 로마 원정군이 갈리아에서 출발했다. 이 군대는 4개 군단(2군단 아우구스타, 9군단 히스파나, 14군단 제미나, 20군단 발레리아 빅트릭스)과 보조 부대로 구성되었다. 처음에 병사들은 미지의 땅으로의 원정을 꺼려했지만, 플라우티우스의 설득으로 결국 항해를 시작했다.

로마군은 리치버러(Richborough) 근처에 상륙했는데, 이곳은 브리튼의 남동 해안으로 켄트 지역에 속한다. 놀랍게도 상륙 과정에서 브리튼 부족들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카라타쿠스와 토고둠누스는 게릴라전을 선택하여 로마군을 내륙으로 유인한 뒤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다.

첫 대규모 전투는 메드웨이 강(River Medway) 근처에서 벌어졌다. 로마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이 강을 건널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케르누식 게르마니아(Germanica) 부대가 특수한 수영 기술로 강을 건너 브리튼군을 기습 공격했다. 2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템스 강(River Thames) 근처에서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토고둠누스가 전사했고, 카라타쿠스는 서쪽으로 도주했다. 로마군은 템스 강을 건너 현재의 런던 지역으로 진격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방문과 카물로두눔 함락

로마군이 순조롭게 진격하자, 플라우티우스는 황제에게 직접 브리튼에 와서 최종 정복을 완수하도록 요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급히 브리튼으로 건너와 원정군과 합류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대규모 군사력과 함께 전쟁 코끼리도 데려왔는데, 이는 브리튼인들에게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카툴롤로스의 수도였던 카물로두눔(현재의 콜체스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디오 카시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단 16일 만에 브리튼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로마로 돌아간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튼 정복의 영웅으로 대대적인 개선식을 치렀다. 그는 '브리탄니쿠스'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고, 개선문과 기념 주화가 제작되었다. 이 시점에서 브리튼은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초기 속주화와 행정 체계 구축

클라우디우스의 승리 후, 플라우티우스는 브리튼의 첫 총독으로 임명되어 기원후 47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브리튼 남동부를 로마의 직접 통치 아래 두고, 기본적인 로마 행정 체계를 구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초기 행정의 중심지는 카물로두눔이었다. 이곳에는 클라우디우스 신전이 세워져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고, 퇴역 군인들을 위한 최초의 로마 식민시(Colonia)가 조성되었다. 콜체스터는 로마-브리튼의 첫 수도라 할 수 있었다.

로마는 '분할과 통치' 전략을 효과적으로 적용했다. 로마에 협조적인 부족들은 '우방 왕국' 지위를 부여받아 일정한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아트레바테스의 코기두브누스와 이체니의 프라수타구스가 로마의 '꼭두각시 왕'으로서 자신의 영토를 다스렸다. 반면, 저항하는 부족들은 직접적인 군사 통치를 받았다.

로마는 효율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도 도입했다. 인두세, 토지세, 상속세 등 다양한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는 브리튼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 화폐가 공식 통화로 자리 잡았고, 상업 거래가 활성화되었다.

군단 요새와 방어 체계 구축

로마의 브리튼 통치는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했다. 4개 군단은 전략적 요충지에 영구 주둔지(레기오나리아 카스트라)를 건설했다.

2군단 아우구스타는 처음에는 콜체스터에 주둔했지만, 후에 엑스터(Exeter)로, 그리고 마침내 카에를레온(Caerleon)으로 이동했다. 20군단은 콜체스터에서 글루체스터(Gloucester)로, 그리고 마침내 체스터(Chester)에 정착했다. 14군단은 루고발리움(현재의 칼라일)에 주둔했으나, 후에 대륙으로 전출되었다. 9군단은 린콘(Lincoln)에, 후에는 요크(York)에 주둔했다.

각 군단 요새는 미니어처 로마 도시와 같았다. 직사각형 형태로 설계된 요새 내에는 지휘관의 거처(프린키피아), 병영, 창고, 작업장, 목욕탕, 병원 등 다양한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요새 주변에는 민간인 정착지(카나바에)가 형성되었는데, 이곳에는 상인, 장인, 군인 가족들, 퇴역 군인들이 거주했다.

군단 요새 외에도 로마군은 주요 도로망을 따라 더 작은 규모의 보조 부대 요새(아욱실리아 카스트라)를 건설했다. 이 요새들은 100~1,000명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며, 지역 치안 유지와 도로 보호, 세금 징수 지원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로마-브리튼 도로망의 발달

로마의 브리튼 통치에서 가장 지속적인 유산 중 하나는 광범위한 도로망이다. 로마는 군사적, 행정적, 상업적 필요에 따라 체계적인 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첫 번째 주요 도로는 런디니움(런던)에서 카물로두눔(콜체스터)을 연결하는 길이었다. 이후 워틀링 스트리트(Watling Street)가 건설되어 런디니움에서 북서쪽의 브로코나키움(렉삼)을 연결했다. 에르민 스트리트(Ermine Street)는 런디니움에서 에보라쿰(요크)까지 이어졌고, 포스 웨이(Fosse Way)는 남서쪽의 이스카 둠노니오룸(엑서터)에서 북동쪽의 린둠(린콘)까지 대각선으로 브리튼을 가로질렀다.

로마 도로는 놀라울 정도로 직선적이고 견고했다. 기본 구조는 먼저 지반을 다지고, 그 위에 자갈과 모래 층을 깔고, 최종적으로 포장석을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주요 도로의 너비는 약 7m로, 두 대의 마차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도로 양쪽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었고, 일정 간격으로 마일스톤(이정표)이 세워져 있었다.

이 도로망은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우편 서비스(쿠르수스 푸블리쿠스)와 상업 교역을 촉진시켰다. 도로를 따라 마퇴(맨시오)라 불리는 공식 숙박 시설과 타베르나(여관)들이 들어섰고, 이는 점차 소규모 정착지로 발전했다.

초기 로마-브리튼 도시의 성장

로마의 통치는 브리튼에 도시 문화를 도입했다. 초기에는 군사 주둔지 근처에 형성된 민간인 정착지가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로마식 도시 계획에 따른 본격적인 도시들이 발전했다.

도시 체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가장 지위가 높은 것은 '콜로니아(Colonia)'로, 퇴역 군인들을 위해 설립된 로마 시민권자들의 도시였다. 카물로두눔(콜체스터), 린둠(린콘), 글레붐(글로스터), 에보라쿰(요크)이 이에 해당했다. 다음으로 '무니키피움(Municipium)'은 로마 시민권이 부여된 선주민 도시로, 베룰라미움(세인트 알반스)이 유일했다. 마지막으로 '키비타스(Civitas)'는 로마화된 브리튼 부족의 행정 중심지로, 두로베르눔 칸티아코룸(켄터베리), 노비오마구스 레겐시움(치체스터) 등이 있었다.

이 도시들은 로마식 그리드 패턴으로 설계되었으며, 중심부에는 포럼(광장)과 바실리카(공공 건물)가 위치했다. 도시에는 또한 신전, 목욕탕, 극장, 원형 경기장과 같은 공공 시설이 들어섰고, 부유한 시민들을 위한 대형 주택(도무스)도 건설되었다.

런디니움(런던)은 특별한 사례였다. 처음에는 군사 시설이 아닌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으나, 부디카 반란 이후 브리튼의 행정 수도가 되었다. 템스강 북쪽 둑에 위치한 이 도시는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였으며, 그 규모는 최대 3-4만 명에 달했다.

브리튼 영토의 점진적 확장

클라우디우스의 초기 정복은 주로 브리튼 남동부에 국한되었지만, 후대 총독들은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특히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재임 47-52년)는 서부와 중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주도했다.

스카풀라는 먼저 포스 웨이 서쪽의 도보니(현재의 글로스터셔와 서머셋)와 코리타니(현재의 동미들랜드)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또한 웨일스 경계 지역의 실루레스 부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카라타쿠스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지만, 실루레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퀸투스 베라니우스(재임 57-58년)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재임 58-61년) 총독 시기에는 북웨일스와 앵글시 섬으로 로마의 지배권이 확대되었다. 특히 파울리누스는 드루이드 세력의 본거지였던 모나 섬(현재의 앵글시)을 공격하여 정복했다.

북부 지역으로의 확장은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재임 71-74년)와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재임 77-84년) 총독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케리알리스는 브리간테스 부족을 정복했고, 아그리콜라는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까지 로마의 지배를 확대했다. 그는 특히 83년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연합군을 대파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로 남게 되었다.

로마-브리튼 사회의 형성

로마의 식민 통치는 브리튼 사회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엘리트층에서는 '로마화(Romanization)'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브리튼 귀족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로마식 이름을 채택하고, 라틴어를 배우며, 로마식 의복과 생활 방식을 따랐다.

교육도 중요한 변화였다. 로마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어 엘리트 자녀들은 문법, 수사학, 라틴 문학 등을 배웠다. 농업 기술에서도 발전이 있었는데, 로마식 쟁기의 도입, 새로운 작물의 재배, 효율적인 농장 관리 시스템 등이 브리튼 농업의 생산성을 높였다.

종교적으로는 켈트 신앙과 로마 종교의 융합이 일어났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관용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많은 켈트 신들이 로마 신들과 동일시되었다. 예를 들어 켈트의 신 수셀로스는 로마의 주피터와, 에포나는 미네르바와 연결되었다. 다만 드루이드 신앙은 로마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져 금지되었다.

사회 계층 구조도 변화했다. 로마 시민권자, 라틴 권리를 가진 자, 그리고 피정복민(페레그리니)으로 구분되는 법적 계층 체계가 도입되었다. 시민권자는 완전한 법적 권리를 누렸고, 세금 혜택도 받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브리튼인들이 시민권을 획득했고, 마침내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으로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브리튼 원주민들의 반응과 저항

로마의 지배에 대한 브리튼인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일부, 특히 남동부 지역의 엘리트층은 로마 문화와 통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들은 로마 정치 체제 내에서의 성공을 위해 자녀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로마식 빌라를 짓고, 로마 신들을 숭배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 특히 서부와 북부에서는 저항이 강했다. 웨일스의 오르도비체스와 실루레스 부족, 북부의 브리간테스 일부,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칼레도니아 부족들은 끊임없이 로마에 저항했다. 이들에게 로마의 통치는 단순한 정복자의 지배였고,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과 자유에 대한 위협이었다.

반란의 위험은 항상 존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61년 부디카의 반란이었지만, 이후에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북부 국경 지역에서는 브리간테스 부족의 반란이 수차례 발생했다. 이에 대응하여 로마는 국경 지역에 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배치했고, 결국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에 이르러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건설되었다.

결론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튼 정복은 섬나라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로마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시스템이 브리튼에 이식되면서 원주민 사회의 변화는 불가피했다. 군단 요새를 중심으로 한 군사 통치 체제가 구축되었고, 도로망이 발달했으며, 로마식 도시와 건축물이 브리튼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의 통치는 브리튼에 도시 문화, 화폐 경제, 법률 체계, 그리고 라틴어의 영향을 남겼다. 비록 5세기 초 로마군이 철수하면서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는 끝났지만, 로마-브리튼의 유산은 현대 영국 문화와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클라우디우스의 정복령으로 시작된 로마의 브리튼 통치는 단순한 군사적 점령을 넘어, 두 문화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융합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켈트 브리튼을 로마-브리튼으로 변화시켰고, 이후 영국 역사 전개의 방향을 결정짓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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