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목요일: 번영의 종말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전례 없는 공황 매도가 시작되었다. 오전 거래 시작과 함께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고, 정오까지 1,300만 주가 거래되며 시장은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거래소 밖에는 불안한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경찰이 출동해 질서를 유지해야 했다.
월스트리트의 주요 은행가들이 긴급 회동을 갖고 시장 안정화를 시도했다. J.P. 모건의 토머스 라몬트를 비롯한 은행가들이 거액의 자금을 투입해 주요 종목을 매수했다. 이들의 개입으로 오후에는 시장이 다소 진정되는 듯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다음 주 화요일인 10월 29일, "검은 화요일"로 불리는 이날 진짜 재앙이 시작되었다. 1,600만 주가 거래되며 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다. 이날 하루에만 140억 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쓴 전체 전비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패닉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지방 거래소들도 혼란에 빠졌다.
연쇄 붕괴: 금융 시스템의 마비
주식시장 붕괴는 도미노처럼 경제 전반으로 파급되었다. 증거금 거래로 주식을 산 투자자들이 대거 파산했다.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부실화되기 시작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약 9,000개의 은행이 도산했는데, 이는 전체 은행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은행 도산은 뱅크런을 촉발했다. 예금자들이 돈을 찾으려고 은행으로 몰려들었지만, 은행들은 지급 능력이 없었다. 연방예금보험제도가 없던 시절, 은행이 파산하면 예금자들은 돈을 잃었다. 수백만 명이 평생 모은 저축을 하루아침에 날렸다.
신용 경색이 극심해지면서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었다. 건전한 기업들도 운전자금 부족으로 도산했다. 1932년까지 미국 기업의 생산량은 1929년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 국민총생산(GNP)은 1929년 1,030억 달러에서 1933년 550억 달러로 거의 반 토막이 났다.
대량 실업과 인간적 비극
실업은 대공황의 가장 고통스러운 측면이었다. 1929년 3.2%였던 실업률은 1933년 25%로 치솟았다. 약 1,5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는 4명 중 1명이 실업자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일부 도시에서는 실업률이 50%를 넘었다. 톨레도와 애크런 같은 공업 도시들은 특히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실업의 고통은 통계 너머에 있었다. 가장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가족 전체가 빈곤에 빠졌다.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가족들이 거리를 헤맸다. 아이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지만, 의료 서비스를 받을 돈이 없었다.
자살률이 급증했다. 1929년에서 1933년 사이 자살률은 40% 이상 증가했다. 특히 사업 실패나 재산 손실을 경험한 중산층 남성들의 자살이 많았다. 정신병원 입원율도 크게 증가했다. 대공황은 경제적 재앙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재앙이기도 했다.
후버빌: 절망의 풍경
주거를 잃은 사람들은 도시 외곽이나 공터에 판잣집을 지어 모여 살았다. 이러한 빈민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이름을 따서 "후버빌"이라 불렸다. 가장 큰 후버빌은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었는데, 수백 명이 판자와 양철로 만든 임시 거처에서 살았다.
후버빌의 생활 조건은 비참했다. 상하수도 시설이 없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쓰레기를 뒤져 음식을 찾고, 공원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썼다. 빈 깡통으로 만든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후버빌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후버 담요"는 신문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후버 깃발"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놓은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냉소적인 별명들은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좌절을 반영했다. 후버빌은 미국이 경험한 경제적 붕괴의 생생한 상징이 되었다.
농촌의 재앙: 더스트 보울
도시만 고통받은 것이 아니었다. 농촌은 이미 1920년대부터 불황을 겪고 있었는데, 대공황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여 많은 농민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농장을 잃었다. 1930년대 초 매년 수십만 개의 농장이 압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30년대 중반 대평원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다. 과도한 경작으로 표토가 유실된 상태에서 가뭄이 겹치자, 거대한 먼지 폭풍이 발생했다. "더스트 보울"로 불린 이 재앙은 오클라호마, 텍사스, 캔자스, 콜로라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검은 먼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대낮에도 어두웠고, 먼지가 집 안까지 들어와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농작물은 말라 죽었고, 가축들은 먼지를 먹고 폐사했다. 수십만 명의 "먼지 난민"들이 농장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이들의 고난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정부의 무력함: 후버의 대응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처음에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경제가 곧 스스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고, "번영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그의 경제 철학은 자유방임주의에 기초했으며,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다.
후버는 기업가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는 기업주들에게 임금을 삭감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주정부와 지방정부에 공공사업을 확대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발적 조치들은 거대한 경제 붕괴 앞에서 무력했다.
1932년 후버는 마침내 더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 부흥금융공사(RFC)를 설립하여 은행과 기업에 대출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는 "뜨물에 낙수 효과"를 기대하는 정책으로, 직접적으로 고통받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국민들은 후버가 부자들만 돕는다고 비난했다.
보너스 군인 사태: 민주주의의 시련
1932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이 워싱턴 D.C.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1945년에 지급하기로 한 보너스를 즉시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다. 약 2만 명의 참전 용사와 그 가족들이 수도에 캠프를 치고 평화적으로 시위했다. 이들은 "보너스 원정군"이라 불렸다.
의회는 보너스 즉시 지급 법안을 부결시켰다. 많은 참전 용사들이 떠났지만, 일부는 계속 남아 시위를 이어갔다. 후버 행정부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7월 28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보너스 캠프를 공격했다.
기병대와 탱크, 최루가스를 동원한 군대는 비무장 참전 용사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캠프는 불태워졌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 참전 용사의 아내와 아이가 최루가스에 질식사했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의 오점으로 남았고, 후버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되었다.
사회적 붕괴와 가치관의 위기
대공황은 미국 사회의 기본 구조를 흔들었다. 전통적인 성 역할이 도전받았다. 많은 남성 가장들이 실직하면서 가족 부양자로서의 역할을 잃었고,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여성들은 낮은 임금을 받았고, 기혼 여성의 취업은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이혼율은 처음에는 감소했다가 나중에 증가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혼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감소했다가, 장기간의 스트레스로 가정이 붕괴되면서 다시 증가했다. 출생률은 급격히 하락했다. 1930년대 출생률은 미국 역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의 핵심 가치인 개인주의와 자조(self-help) 정신도 도전받았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졌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일부 지식인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문화적 대응: 도피와 저항
대중문화는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되었다. 영화관은 싼 입장료로 몇 시간의 환상을 제공했다. 뮤지컬과 스크루볼 코미디가 인기를 끌었다. "오즈의 마법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영화들이 큰 성공을 거뒀다. 라디오는 무료 오락을 제공했고, 연속극과 코미디 쇼가 인기를 끌었다.
동시에 사회 비판적인 문화도 등장했다. 존 스타인벡, 리처드 라이트 같은 작가들은 대공황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도로시아 랭, 워커 에반스 같은 사진작가들은 빈곤의 얼굴을 기록했다. 우디 거스리는 노동자와 이주민의 고통을 노래했다.
연방 정부의 문화 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했다. 후에 뉴딜의 일부가 된 연방예술프로젝트는 수천 명의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들은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고, 지역 역사를 기록하고, 연극을 공연했다. 이는 미국 문화사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정치적 전환점: 1932년 선거
1932년 대통령 선거는 미국 정치의 전환점이 되었다. 민주당 후보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뉴딜"을 약속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유명한 말로 국민들을 격려했다.
후버는 대공황 대처 실패로 인기를 완전히 잃었다. 선거 운동 중 그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군중들이 야유를 보냈다. 반면 루즈벨트는 어디를 가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적극적인 정부 개입을 약속했고, "잊혀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언했다.
선거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루즈벨트는 472대 59의 선거인단 표차로 승리했다. 민주당은 의회에서도 압승하여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이는 향후 20년간 지속될 민주당 우위 시대의 시작이었고, 미국 정치 지형의 근본적인 재편성을 의미했다.
결론
대공황은 미국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났고, 정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인간적 고통의 규모는 전례가 없었다. 수백만 명이 일자리와 집을 잃었고, 희망과 존엄성마저 잃었다. 후버빌과 보너스 군인 사태는 미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를 보여주었다. 더스트 보울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공황은 또한 미국인들의 회복력과 연대 정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웃들이 서로 돕고,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견뎌냈다. 문화적 창의성은 오히려 번성했고, 정치적 각성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험은 뉴딜과 현대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었다. 대공황의 교훈은 오늘날까지도 경제 정책과 사회 안전망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무제한적 자본주의의 위험성과 정부 개입의 필요성, 그리고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경험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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