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America

미국 역사 34. 광란의 1920년대와 금주법: 재즈 에이지, 문화 모더니즘, KKK 2차 부활

SSSCH 2025. 5. 1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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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으로의 복귀와 경제 호황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워런 하딩 대통령이 약속한 '정상으로의 복귀'를 추구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정상'은 전쟁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시대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또는 '재즈 시대(Jazz Age)'로 불리며, 전례 없는 경제 호황과 문화적 변혁의 시기였다.

미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제조업 생산은 60% 증가했고, 1인당 소득은 30% 상승했다. 자동차 산업이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헨리 포드의 대량 생산 방식으로 자동차 가격이 하락하면서 1920년 800만 대였던 자동차 등록 대수는 1929년 2,300만 대로 증가했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미국인의 생활 방식을 바꾸었다.

전기 제품의 보급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라디오,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이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 1920년 6만 대였던 라디오는 1929년 1,000만 대로 증가했다. 할부 판매의 확산으로 소비자들은 미래 소득을 담보로 현재의 소비를 즐길 수 있었다.

주식 시장 붐과 투기 열풍

1920년대는 월스트리트의 황금기였다. 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했고, 많은 미국인들이 주식 투자에 뛰어들었다. 1920년 150만 명이던 주식 투자자는 1929년 2,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마진 거래'를 통해 적은 돈으로도 큰 투자가 가능했고, 이는 투기를 부추겼다.

기업들은 호황을 누렸다.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으로 이익이 급증했다. 그러나 임금 상승은 이에 미치지 못했고, 부의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1929년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23.9%를 차지했다. 농민들은 예외였다.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농촌 경제는 침체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파산했다.

투기 열풍은 부동산 시장으로도 확산되었다. 특히 플로리다에서는 토지 투기가 극에 달했다. 1925년 플로리다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많은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었지만, 주식 시장의 열기는 계속되었다.

금주법의 시행과 실패

1920년 1월 17일, 수정헌법 18조에 의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볼스테드법은 알코올 도수 0.5% 이상의 음료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했다. 금주법은 진보주의 시대의 마지막 개혁으로, 음주로 인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금주법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불법 주류 제조와 밀매가 성행했고, 지하 술집인 '스피크이지'가 번성했다. 1929년 뉴욕에만 3만 2천 개의 스피크이지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통한 밀수입도 활발했다.

조직 범죄가 급성장했다. 알 카포네 같은 갱스터들이 주류 밀매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시카고에서 카포네의 조직은 연간 6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경찰과 정치인들의 부패도 만연했다. 1929년 발렌타인 데이 대학살 같은 갱단 간 전쟁으로 치안이 악화되었다.

재즈의 시대와 할렘 르네상스

1920년대는 재즈의 시대였다.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재즈는 시카고와 뉴욕을 거쳐 전국으로 퍼졌다.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같은 뮤지션들이 미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재즈는 즉흥연주와 싱코페이션으로 전통적인 음악 규범을 깨뜨렸다.

뉴욕 할렘은 흑인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할렘 르네상스'로 불리는 이 문화 운동은 흑인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표현했다. 랭스턴 휴즈, 클로드 맥케이 같은 시인들, 진 투머, 넬라 라슨 같은 소설가들이 흑인의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코튼 클럽, 사보이 볼룸 같은 나이트클럽은 재즈의 성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클럽은 백인 고객만 받았지만, 흑인 연주자들의 음악은 인종 장벽을 넘어 미국 대중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조세핀 베이커 같은 흑인 연예인들은 국제적 스타가 되었다.

플래퍼와 변화하는 성 역할

1920년대는 여성의 역할이 극적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플래퍼'로 불린 젊은 여성들은 전통적인 성 역할에 도전했다. 그들은 짧은 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자유롭게 데이트를 즐겼다.

1920년 여성 참정권 획득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의 상징이었다. 더 많은 여성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에 나갔다. 1929년까지 전체 대학생의 40%가 여성이었고, 1,000만 명의 여성이 직장에서 일했다. 비록 대부분은 교사, 간호사, 비서 등 전통적인 '여성 직업'에 종사했지만, 변화는 분명했다.

성에 대한 태도도 변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소개되면서 성은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다. 피임 정보가 확산되고, 혼전 성관계가 증가했다. 1920년대 태어난 여성의 절반 이상이 혼전 성관계를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혼율도 상승하여 1920년 10만 건에서 1929년 20만 건으로 두 배가 되었다.

대중문화의 확산

라디오와 영화는 대중문화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920년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후, 라디오는 급속히 보급되었다. NBC(1926)와 CBS(1927)가 설립되어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아모스 앤 앤디 쇼 같은 프로그램은 수백만 명이 동시에 청취했다.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대 매주 1억 명의 미국인이 영화관을 찾았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들인 찰리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루돌프 발렌티노는 국민적 우상이 되었다. 1927년 '재즈 싱어'의 개봉으로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스포츠도 대중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베이브 루스는 야구의 전설이 되었고, 잭 뎀프시는 권투의 영웅이었다. 레드 그레인지는 미식축구를, 빌 틸든은 테니스를 대중 스포츠로 만들었다. 1920년대는 스포츠 영웅의 시대였고, 라디오와 신문은 이들을 국민적 스타로 만들었다.

문학의 모더니즘과 잃어버린 세대

1920년대 미국 문학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작품들을 생산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는 재즈 시대의 화려함과 공허함을 그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26)는 전쟁으로 상처받은 세대의 방황을 묘사했다.

이들 작가들은 종종 '잃어버린 세대'로 불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환멸을 느낀 이들은 전통적 가치관을 거부하고 새로운 문학적 표현을 추구했다. 많은 작가들이 파리로 이주하여 국외자의 시각으로 미국을 관찰했다.

싱클레어 루이스는 『메인 스트리트』(1920)와 『바비트』(1922)에서 미국 중산층의 속물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1930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셔우드 앤더슨,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도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쿠 클럭스 클랜의 재부활

1915년 조지아 주에서 재건된 쿠 클럭스 클랜은 1920년대 중반 절정에 달했다. 회원 수는 400만-5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미국 성인 백인 남성의 15%에 해당했다. 새로운 KKK는 흑인뿐만 아니라 가톨릭교도, 유대인, 이민자들도 적대시했다.

KKK는 더 이상 남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인디애나, 오하이오, 일리노이 같은 중서부 주에서 특히 강세를 보였다. 인디애나에서는 주지사와 주 의회를 장악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KKK는 '100% 아메리카니즘'을 주장하며 백인 개신교 우월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1925년 인디애나 KKK 지도자 D.C. 스티븐슨의 성폭행 살인 사건이 터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내부 부패와 폭력 스캔들이 계속 터지면서 중산층 지지자들이 이탈했다. 1929년까지 회원 수는 20만 명 이하로 감소했다.

이민 제한과 고립주의

1920년대는 이민 제한이 강화된 시기였다. 1921년 긴급 할당법과 1924년 이민법(존슨-리드법)은 국적별 쿼터를 설정하여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크게 제한했다. 아시아인의 이민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연간 이민자 수는 80만 명에서 15만 명으로 급감했다.

이러한 이민 제한은 당시의 인종주의와 토착주의를 반영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구 이민'(북유럽, 서유럽)은 우수하고 '신 이민'(남유럽, 동유럽)은 열등하다고 믿었다. 우생학이 과학적 근거로 이용되었고, '인종 자살'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대외 정책에서도 고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고,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1921-22)와 켈로그-브리앙 조약(1928) 같은 평화 유지 노력에는 참여했지만, 실질적인 안보 공약은 피했다.

기술 혁신과 소비 문화

1920년대는 기술 혁신의 시대였다. 항공 산업이 급성장했고, 1927년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단독 횡단 비행은 세계를 흥분시켰다. 화학 공업의 발달로 레이온, 셀로판, 플라스틱 같은 신소재가 개발되었다.

광고 산업도 급성장했다. 기업들은 라디오, 잡지, 신문을 통해 대규모 광고 캠페인을 벌였다. 광고는 단순한 제품 정보 전달을 넘어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판매했다. '계획적 진부화' 전략으로 소비자들은 끊임없이 새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되었다.

체인점이 확산되면서 쇼핑 문화도 변했다. A&P 같은 식료품 체인, 울워스 같은 잡화점 체인이 전국에 매장을 열었다. 1929년까지 체인점이 전체 소매 판매의 22%를 차지했다. 할부 구매의 일반화로 '지금 사고 나중에 지불하는' 문화가 정착했다.

농촌과 도시의 격차

1920년대 호황은 주로 도시와 산업 부문에 집중되었다. 농촌 지역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1920년 처음으로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를 넘어섰다.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기회를 찾아 도시로 이주했고, 농촌은 고령화되고 쇠퇴했다.

문화적 갈등도 심화되었다. 도시는 모더니즘과 세속주의를 대표했고, 농촌은 전통주의와 근본주의를 고수했다. 1925년 테네시 주에서 벌어진 스코프스 재판(원숭이 재판)은 이러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진화론 교육을 금지한 법을 둘러싼 이 재판은 과학과 종교,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드러냈다.

농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전쟁 중 높았던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많은 농민들이 부채에 시달렸다. 1920년대 동안 60만 농가가 파산했다. 정부의 농업 지원 정책은 미미했고, 농촌의 불만은 점차 커졌다.

1920년대의 어두운 면

화려한 번영 아래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숨어 있었다.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어 1929년 상위 5%가 전체 소득의 33%를 차지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했고, 노동조합 활동은 탄압받았다.

인종 차별도 계속되었다. 1919년 '붉은 여름'에는 전국적으로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1921년 털사 인종 학살에서는 번화한 흑인 상업지구가 파괴되고 수백 명이 사망했다. 북부로 이주한 흑인들도 주거와 직업에서 차별을 받았다.

환경 파괴도 심각했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대기와 수질 오염이 악화되었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이 파괴되었고, 1930년대 더스트 볼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소비주의 문화는 자원 낭비와 쓰레기 문제를 야기했다.

결론

1920년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모순적인 시대였다. 전례 없는 경제 호황과 문화적 창조성이 꽃피웠지만,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들이 잠재해 있었다. 재즈와 플래퍼, 자동차와 라디오로 상징되는 현대성과, 금주법과 KKK, 이민 제한으로 드러난 반동성이 공존했다.

이 시대의 낙관주의와 물질주의는 1929년 대공황과 함께 무너졌다. 하지만 1920년대의 문화적 유산은 지속되었다. 재즈는 미국 음악의 고전이 되었고, 할렘 르네상스는 흑인 문화의 자부심을 일깨웠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대중문화의 확산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광란의 20년대는 미국이 전통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대의 실험과 실패, 창조와 파괴는 현대 미국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번영과 타락, 자유와 억압이 뒤얽힌 이 시대는 미국 역사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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