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America

미국 역사 33. 제1차 세계대전과 윌슨주의: 참전 배경, 전시 경제, 14개 조항

SSSCH 2025. 5. 1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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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에서 참전까지의 여정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전통적인 고립주의 정책에 따라 중립을 선언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생각과 행동 모두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호소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미국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중립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미국은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로 독일과의 무역은 급감한 반면, 연합국과의 무역은 급증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연합국에 대한 수출은 4배 이상 증가했고, 미국 은행들은 연합국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했다.

문화적, 정서적으로도 많은 미국인들은 연합국에 동조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과의 유대감, 프랑스와의 역사적 우호 관계, 독일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 등이 작용했다. 또한 영국의 효과적인 선전전은 미국 여론을 연합국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민간인 학살 소식은 독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했다.

잠수함 전쟁과 루시타니아호 사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전쟁은 미국의 중립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1915년 2월 독일은 영국 주변 해역을 전쟁 지역으로 선포하고, 이 지역을 항해하는 모든 선박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전통적인 해상 전쟁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중립국 선박과 민간인의 안전을 위협했다.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 U-20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시켰다. 아일랜드 해안 근처에서 일어난 이 공격으로 1,198명이 사망했고, 그중 128명이 미국인이었다. 루시타니아호는 실제로 연합국을 위한 군수품을 운반하고 있었지만, 민간 여객선에 대한 무경고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었다.

미국 여론은 격분했고, 전쟁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은 신중했다. 그는 독일에 강력히 항의하면서도 "너무 자랑스러워서 싸우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독일은 미국의 항의에 일시적으로 잠수함 공격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준비 운동과 평화 노력

루시타니아호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군사적 대비를 주장하는 '준비 운동'이 확산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헨리 캐벗 로지 등이 이끄는 이 운동은 군비 증강과 시민 군사 훈련을 요구했다. 1916년 국방법이 통과되어 육군과 해군이 증강되었고, 예비군 장교 훈련단(ROTC)이 창설되었다.

한편 평화주의자들은 전쟁 개입에 반대했다. 제인 애덤스가 이끄는 여성평화당,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등은 중립 유지를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과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전쟁을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 중서부의 농민들과 아일랜드계, 독일계 미국인들도 대체로 참전에 반대했다.

윌슨은 1916년 재선 캠페인에서 "그는 우리를 전쟁에서 멀리하게 했다"는 슬로건을 사용했다. 근소한 차이로 재선에 성공한 그는 유럽 전쟁을 중재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1917년 1월 그는 의회에서 "승리 없는 평화" 연설을 통해 양측이 타협할 것을 호소했다.

짐머만 전보와 참전 결정

1917년 초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은 2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독일 군부는 미국이 참전하더라도 미군이 유럽에 도착하기 전에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짐머만 전보 사건이 터졌다.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어 짐머만이 멕시코 정부에 보낸 암호 전보를 영국 정보부가 해독하여 미국에 전달했다. 전보는 미국이 참전할 경우 멕시코가 독일 편에서 참전하도록 유도하고, 승리 시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멕시코에 반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1917년 3월 1일 이 전보가 언론에 공개되자 미국 여론은 들끓었다. 반전 여론이 강했던 중서부와 서부에서도 분노가 폭발했다. 독일 잠수함이 미국 상선들을 계속 격침시키면서 긴장은 극에 달했다. 3월에만 4척의 미국 선박이 격침되었다.

전쟁을 위한 십자군

1917년 4월 2일,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했다. 그의 연설은 단순한 전쟁 선포를 넘어 미국의 참전 목적을 고귀한 대의로 격상시켰다. "세계는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해져야 한다"는 그의 선언은 전쟁을 도덕적 성전으로 만들었다.

윌슨은 미국이 영토 확장이나 배상금을 원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강조했다. 그는 독일 정부와 독일 국민을 구분하여, 군국주의적 독일 정부를 타도하고 독일 국민을 해방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수사는 미국인들의 열정을 불태웠다.

4월 6일 의회는 압도적 표차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했다. 상원에서는 82 대 6, 하원에서는 373 대 50으로 통과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의원 중에는 몬태나의 저넷 랭킨이 있었는데, 그녀는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이었다. 12월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도 선전포고했다.

전시 동원 체제의 구축

미국은 신속하게 전시 체제로 전환했다. 1917년 5월 선택적 징병법이 통과되어 21세에서 30세 사이의 남성들이 징병 대상이 되었다. 첫 징병에서 240만 명이 소집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480만 명이 군복무했다. 이 중 200만 명이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경제 동원도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전시산업위원회가 설립되어 전쟁 물자 생산을 조정했다. 식량청은 허버트 후버의 지휘 아래 식량 생산과 배급을 관리했다. "밀 없는 월요일", "고기 없는 화요일" 캠페인을 통해 국민들의 자발적 절약을 유도했다. 연료청은 석탄과 석유의 생산과 배분을 통제했다.

철도청은 정부가 철도를 임시로 국유화하여 운영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정부 개입이었다. 조선청은 전시 선박 건조를 총괄했고, 전쟁 기간 동안 수백 척의 선박을 건조했다.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과 흑인들이 대거 산업 현장에 투입되었다.

전쟁 비용 조달과 국민 동원

전쟁 비용은 막대했다. 연방 정부 지출은 1916년 7억 달러에서 1919년 187억 달러로 폭증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이 대폭 인상되었고, 대규모 국채가 발행되었다. '자유 공채' 캠페인을 통해 5차례에 걸쳐 215억 달러가 조달되었다.

정부는 대대적인 선전 캠페인을 벌였다. 공보위원회(CPI)가 설립되어 조지 크릴의 지휘 아래 전쟁 지지 여론을 조성했다. 7만 5천 명의 '4분 연설가'들이 전국을 돌며 극장, 교회, 집회에서 전쟁 지지 연설을 했다. 포스터, 영화, 신문 등 모든 매체가 동원되었다.

애국심이 고조되면서 반독 정서도 확산되었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의심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어 교육이 금지되고, 독일 음악 연주가 제한되었다. 심지어 사우어크라우트는 '자유 배추'로, 햄버거는 '자유 샌드위치'로 이름이 바뀌었다. 린치와 폭력 사건도 발생했다.

시민의 자유 탄압

전시 상황은 시민의 자유를 크게 제약했다. 1917년 간첩법과 1918년 선동법은 전쟁 노력을 방해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를 처벌했다. 수천 명이 이 법에 의해 기소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다.

사회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이 주요 표적이었다. 유진 뎁스는 반전 연설로 10년 형을 선고받았고, 감옥에서 1920년 대선에 출마하여 90만 표를 얻었다.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 지도자들도 대거 체포되었다. 언론도 검열을 받았고, 일부 신문은 발행이 금지되었다.

대법원은 이러한 제한을 대체로 지지했다. 1919년 솅크 대 미국 판결에서 올리버 웬델 홀름스 대법관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을 제시했다. 전시 상황에서는 평시보다 더 많은 제한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는 나중에 시민의 자유 보호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미군의 유럽 전선 참전

미군의 유럽 파견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1917년 4월 참전 당시 정규군은 12만 명에 불과했고, 현대전 경험도 부족했다. 존 퍼싱 장군이 미국 원정군(AEF)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6월 첫 부대와 함께 프랑스에 도착했다.

퍼싱은 미군을 독립적으로 운용하기를 고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군을 자국 부대에 분산 배치하기를 원했지만, 퍼싱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미군이 독자적인 전구를 맡아 미국의 기여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는 연합국 간의 마찰을 일으켰지만, 미국의 입지를 강화했다.

1918년 봄까지 미군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최후 공세가 실패한 후 상황이 변했다. 1918년 여름부터 미군은 주요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벨로 숲 전투, 샤토 티에리 전투에서 미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생 미엘 전투와 뫼즈-아르곤 공세에서는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윌슨의 14개 조항

1918년 1월 8일,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전후 평화의 기초가 될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이는 비밀 외교의 종식, 공해의 자유, 무역 장벽 제거, 군비 축소,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 등을 포함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창설이었다.

14개 조항은 전통적인 유럽 외교와는 다른 이상주의적 비전을 제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서 영토와 배상금을 원했지만, 윌슨은 "승리 없는 평화"를 추구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이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한 볼셰비키 정권이 비밀 조약을 폭로하고 제국주의를 비난하자, 윌슨의 14개 조항은 서구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전 세계 피억압 민족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독일 내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전쟁의 종결

1918년 가을, 독일과 동맹국들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가 9월에 항복했고, 터키가 10월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1월 초에 항복했다. 독일 내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했다.

독일은 윌슨의 14개 조항을 기초로 한 휴전을 요청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프랑스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4년간 지속된 대전쟁이 끝났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짧은 참전 기간에도 11만 6천 명이 전사했고, 그중 절반은 1918년 가을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베르사유 평화회의

1919년 1월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시작되었다. 윌슨은 직접 참석하여 6개월간 머물렀는데, 이는 현직 대통령이 그렇게 오래 해외에 체류한 첫 사례였다. 그는 유럽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평화의 메시아로 여겼다.

그러나 회의는 윌슨의 기대와 달리 진행되었다. 영국의 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클레망소, 이탈리아의 올란도 등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요구했다. 비밀 회의가 진행되었고, 작은 국가들은 배제되었다.

윌슨은 타협해야 했다. 그의 14개 조항 중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무시되었다.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고, 영토를 상실했으며, 군비가 제한되었다. 전쟁 책임 조항은 독일에 모든 책임을 돌렸다. 이는 훗날 히틀러가 이용할 불만의 씨앗이 되었다.

국제연맹과 미국의 거부

윌슨이 가장 중시한 것은 국제연맹 창설이었다. 그는 국제연맹이 미래의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유지할 것이라 믿었다. 베르사유 조약에는 국제연맹 규약이 포함되었고, 윌슨은 다른 문제들에서 양보하면서도 이것만은 관철시켰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는 반대가 거셌다.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 헨리 캐벗 로지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 의원들은 국제연맹이 미국의 주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집단안보 조항은 의회의 전쟁 선포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윌슨은 타협을 거부하고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했다. 1919년 9월 그는 전국 순회 연설에 나섰지만, 과로로 쓰러졌다. 10월 2일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나머지 임기 동안 사실상 정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부인 이디스 윌슨이 대통령직을 대행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거부

1919년 11월과 1920년 3월, 상원은 두 차례에 걸쳐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수정 없는 비준을 고집한 윌슨과, 유보 조항을 요구한 로지 사이의 타협이 실패했다. 결국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1920년 대선은 사실상 국제연맹에 대한 국민투표가 되었다. 민주당 후보 제임스 콕스는 윌슨주의를 지지했지만, 공화당 후보 워런 하딩은 "정상으로의 복귀"를 약속했다. 하딩의 압도적 승리는 미국인들이 윌슨의 이상주의와 국제적 개입에 지쳤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1921년 독일과 별도의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미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돌아갔고, 1920년대 동안 유럽 문제에 대한 개입을 자제했다. 이는 1930년대 파시즘의 부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한 원인이 되었다.

전쟁의 유산과 사회 변화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시 경제 동원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크게 확대시켰다. 비록 전후에 많은 통제가 해제되었지만, 정부의 경제 개입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1930년대 뉴딜 정책의 전례가 되었다.

여성과 흑인들의 지위도 변화했다. 많은 여성들이 전시 산업에 참여하면서 경제적 독립성을 경험했다. 이는 1920년 여성 참정권 획득에 기여했다. 약 40만 명의 흑인들이 참전했고, 많은 흑인들이 남부에서 북부 공업도시로 이주했다. 이른바 '대이동'은 흑인들의 정치적, 문화적 각성을 가져왔다.

전쟁은 또한 미국인들의 국제적 시야를 넓혔다. 200만 명의 미군이 유럽을 경험했고, 미국은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고립주의로 돌아갔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세계와의 연결이 지속되었다.

결론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전통적인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유럽 전쟁에 개입한 것은 중대한 전환이었다. 윌슨의 이상주의적 비전은 전쟁을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한 성전으로 만들었지만, 현실은 더 복잡했다.

전시 동원은 미국의 산업 능력과 조직력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반대 의견을 탄압했다. 윌슨의 14개 조항은 새로운 국제 질서의 비전을 제시했지만, 베르사유 평화회의에서는 전통적인 권력 정치가 지배했다.

미국의 국제연맹 거부는 윌슨주의의 실패를 상징했다. 그러나 집단안보, 민족자결, 국제협력의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엔 창설과 미국의 국제주의로 부활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미국이 고립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세계 지도국으로서의 책임을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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