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와 노동자 계급의 형성
19세기 후반 미국의 급속한 산업화는 거대한 노동자 계급을 탄생시켰다. 공장과 광산, 철도 건설 현장에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했다. 이들 대부분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미국인들과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187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약 2천 3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미국 산업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노동 조건은 극도로 열악했다. 하루 10-14시간, 주 6일 근무가 일반적이었고, 임금은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1900년 평균 노동자의 연봉은 400-500달러 정도였는데, 이는 4인 가족이 기본 생활을 하기에도 빠듯한 금액이었다. 작업 환경은 위험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산업재해가 빈발했다.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보호 장치나 보상 제도가 없었다.
초기 노동조합 운동의 태동
노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 맞서 조직화를 시작했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는 주로 숙련공들이 직종별 조합을 결성했다. 인쇄공, 제화공, 목수, 벽돌공 등이 자신들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조합을 만들었다. 이들은 도제 제도를 통해 노동 공급을 통제하고, 집단 교섭을 통해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1866년에는 전국노동조합(National Labor Union)이 결성되어 8시간 노동제를 주요 목표로 내세웠다. 비록 1873년 경제 공황으로 해체되었지만, 이는 미국 최초의 전국적 노동조합 연합체였다. 이 조직은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를 중시했고, 독자적인 노동당 창당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동기사단의 부상과 몰락
1869년 필라델피아에서 창립된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은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조직이었다. 초기에는 비밀결사로 시작했지만, 1881년 테렌스 파우덜리가 지도자가 되면서 공개 조직으로 전환했다. 노동기사단의 혁신적인 점은 숙련공과 비숙련공,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을 모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만 중국인 이민자들은 배제했는데, 이는 당시 만연한 반중국인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노동기사단은 협동조합주의와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 8시간 노동제, 아동노동 금지, 평등한 임금, 협동조합 설립 등을 목표로 했다. 1885년 미주리퍼시픽 철도 파업에서 승리하면서 회원이 급증하여 1886년에는 7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미국 전체 노동자의 약 10%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하지만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발생한 헤이마켓 사건이 노동기사단에 치명타가 되었다. 비록 노동기사단이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대중들은 노동운동 전체를 폭력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노동기사단은 급속히 쇠퇴하여 1890년대에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헤이마켓 사건과 8시간 노동운동
1886년 5월 1일, 미국 전역에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시카고는 이 운동의 중심지였고, 약 8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3일 맥코믹 수확기 공장에서 파업 노동자들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몇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다음날인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이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경찰이 해산을 명령하자 누군가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경찰 1명이 즉사했고, 이어진 총격전에서 경찰 6명과 시민 4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부상자는 수십 명에 달했다.
당국은 즉시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했다. 8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폭탄을 던진 사람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증거 없이 7명에게 사형이, 1명에게 15년 형이 선고되었다. 국제적인 항의에도 불구하고 4명이 처형되었고, 1명은 감옥에서 자살했다. 1893년 일리노이 주지사는 나머지 3명을 사면하며 재판이 부당했음을 인정했다.
헤이마켓 사건은 미국 노동운동에 큰 상흔을 남겼다.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5월 1일이 국제 노동절로 기념되는 계기가 되었다. 8시간 노동제 요구는 계속되어 결국 20세기 초에 점진적으로 실현되었다.
미국노동총연맹(AFL)의 결성과 실용주의 노선
1886년 12월, 사무엘 곰퍼스를 중심으로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이 결성되었다. AFL은 노동기사단과는 달리 숙련공 중심의 직종별 조합들의 연합체였다. 곰퍼스는 영국 출신 시가 제조공으로, 실용주의적 노동운동 노선을 추구했다.
AFL의 전략은 '순수하고 단순한 조합주의'였다. 정치 활동이나 급진적 사회 개혁보다는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작업 조건 개선 등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목표에 집중했다. 파업 기금을 조성하여 조직적인 파업을 지원했고, 숙련공들의 기술력을 무기로 사용자들과 협상했다.
AFL은 또한 배타적이었다. 주로 백인 남성 숙련공들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비숙련공이나 여성, 흑인, 신규 이민자들은 대부분 배제했다. 이는 노동시장에서의 경쟁을 제한하여 회원들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전략이었다. 1900년까지 AFL 회원은 50만 명으로 성장했고, 1920년에는 400만 명에 달했다.
격렬한 노동 쟁의들
1890년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노동 쟁의들이 발생한 시기였다. 1892년 펜실베이니아 홈스테드 제철소에서 카네기 철강회사와 노동조합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회사가 임금을 삭감하고 조합을 와해시키려 하자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회사는 핑커튼 탐정회사의 사병 300명을 동원했고, 양측의 충돌로 10명 이상이 사망했다. 결국 주 방위군이 투입되어 파업은 진압되었고, 조합은 붕괴했다.
1894년 풀먼 파업은 더욱 대규모였다. 시카고의 풀먼 침대차 회사가 임금을 삭감하자 미국철도노조(ARU)가 파업에 돌입했다. 유진 뎁스가 이끄는 이 조합은 풀먼 차량을 운행하는 모든 열차를 보이콧했다. 파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철도 교통이 마비되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연방군을 투입했고, 법원은 파업 중단 명령을 내렸다. 뎁스는 법원 명령을 거부하여 투옥되었고,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1902년 펜실베이니아 무연탄 파업에서는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에 나섰다. 이는 연방정부가 노사 분쟁에 중립적 입장에서 개입한 첫 사례였다. 광부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얻어냈고, 이는 노동운동의 중요한 승리로 기록되었다.
엘리스 아일랜드와 새로운 이민의 물결
1892년 뉴욕 항구의 엘리스 아일랜드에 이민 검문소가 개설되었다. 이후 1954년까지 약 1,200만 명의 이민자들이 이곳을 통해 미국에 입국했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미국으로 가는 관문'이자 '희망의 섬'으로 불렸다. 하지만 동시에 엄격한 심사와 검역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1880년대부터 이민의 패턴이 크게 변화했다. 이전에는 주로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온 '구이민'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온 '신이민'이 주류가 되었다.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그리스, 헝가리 등에서 수백만 명이 미국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였고, 종교적 박해나 경제적 궁핍을 피해 미국으로 왔다.
엘리스 아일랜드에서의 검사 과정은 복잡했다. 의료 검사에서 전염병이나 정신 질환이 발견되면 입국이 거부되었다. 문맹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고, 일정한 금액의 소지금을 보여야 했다. 약 2%의 이민자들이 입국을 거부당했는데, 이들에게 엘리스 아일랜드는 '눈물의 섬'이 되었다.
도시 이민자 사회의 형성
이민자들은 주로 뉴욕, 시카고, 보스턴, 필라델피아 같은 대도시에 정착했다. 같은 출신지역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리틀 이탈리아, 차이나타운, 유대인 지구 등의 민족 집거지를 형성했다. 이러한 공동체는 이민자들에게 정서적 안정과 상호부조의 기반을 제공했다.
이민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 대부분은 좁고 비위생적인 공동 주택(tenement)에서 살았다.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인구 밀도는 1평방마일당 70만 명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한 방에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았고, 환기와 채광이 불량하여 질병이 만연했다.
이민자들은 주로 공장, 건설 현장, 광산 등에서 일했다. 언어 장벽과 기술 부족으로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자리를 맡았고, 임금도 미국 태생 노동자들보다 낮았다. 여성들은 봉제 공장에서 일하거나 가내 수공업에 종사했다. 아동 노동도 일반적이어서 10세 이상의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민자 상호부조 조직과 노동운동
이민자들은 자체적인 상호부조 조직을 만들어 서로를 도왔다. 이탈리아계의 '상호부조회', 유대계의 '란츠만샤프트', 중국계의 '회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의료 지원, 장례 비용 지원, 실업 보조 등을 제공했다. 또한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공간으로서 정서적 위안을 주었다.
종교 기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톨릭 교회는 이탈리아계와 폴란드계 이민자들의 중심이 되었고, 동방정교회는 그리스계와 러시아계 이민자들을 뭉치게 했다. 유대교 회당은 유대계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 기관들은 예배뿐만 아니라 교육, 복지, 문화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민자들은 점차 노동운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미국 태생 노동자들과 갈등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대를 형성했다. 특히 의류 산업에서는 유대계와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09년 뉴욕 셔츠웨이스트 제조공 파업에서는 2만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참여했는데, 대부분이 이민자들이었다.
삼각공장 화재와 노동 개혁
1911년 3월 25일 뉴욕의 삼각 셔츠웨이스트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미국 노동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공장은 10층 건물의 8, 9, 10층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주로 젊은 이민자 여성들이 일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비상구는 잠겨 있었고, 화재 대피 시설은 부족했다. 노동자들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비극적인 광경이 목격되었고, 146명이 사망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16-23세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이 참사는 큰 충격을 주었고, 노동 안전 규정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뉴욕 주는 공장 조사 위원회를 설립하여 작업장 안전을 조사했고, 이후 4년 동안 36개의 새로운 노동 보호법을 제정했다. 건물 안전 규정, 화재 예방 조치, 노동시간 제한, 아동노동 금지 등이 포함되었다. 이는 진보시대 노동 개혁의 중요한 성과가 되었다.
반이민 정서와 이민 제한
이민자들의 급증은 기존 미국인들 사이에서 반이민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개신교 중심의 기존 미국 사회는 가톨릭이나 유대교를 믿는 신이민자들을 경계했다. 또한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낮춘다는 경제적 우려도 있었다. 문화적 차이와 언어 장벽은 갈등을 심화시켰다.
1894년 이민제한연맹이 결성되어 문맹 테스트를 통한 이민 제한을 주장했다. 노동조합들도 이민 제한을 지지했는데, 특히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1882년 중국인배척법이 제정되어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이 금지되었고, 이는 미국 역사상 특정 인종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이민 금지법이었다.
1917년 이민법은 문맹 테스트를 도입하고 아시아 지역 대부분으로부터의 이민을 금지했다. 1921년과 1924년의 할당법은 국적별 이민 쿼터를 정하여 남유럽과 동유럽으로부터의 이민을 크게 제한했다. 이러한 제한적 이민 정책은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도시 개혁 운동과 정착촌
도시의 빈곤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개선하려는 개혁 운동도 활발했다. 제인 애덤스는 1889년 시카고에 헐 하우스를 설립하여 정착촌 운동을 시작했다. 정착촌은 중산층 개혁가들이 빈민가에 거주하면서 이민자들에게 교육, 의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영어 교육, 직업 훈련, 아동 보육, 문화 프로그램 등을 운영했다.
릴리언 왈드는 뉴욕에서 헨리 스트리트 정착촌을 운영하며 방문 간호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러한 정착촌들은 단순한 자선 활동을 넘어 사회 개혁의 거점이 되었다. 노동법 개정, 주택 개선, 공중보건 향상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많은 정착촌 활동가들이 후에 정부 기관에서 일하며 복지 정책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개
20세기 초 노동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05년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이 결성되었다. '워블리스'라고 불린 IWW는 AFL과 달리 모든 노동자를 조직하려 했다. 인종, 성별, 기술 수준에 관계없이 '하나의 거대한 조합'을 만들고자 했다. IWW는 급진적이고 전투적이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목표로 했다.
IWW는 특히 이민자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았다. 1912년 매사추세츠 로렌스 직물 파업에서 IWW는 다양한 민족의 노동자들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우리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는 구호는 생존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열망을 표현했다. 파업은 승리로 끝났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쟁취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IWW는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전쟁에 반대한 IWW 지도자들은 간첩법과 선동법 위반으로 대거 체포되었다. 전후에는 '적색 공포' 속에서 급진적 노동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민자들 중 급진적 활동가들은 추방되었고, 노동운동은 다시 온건한 방향으로 선회했다.
결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노동운동과 이민자 사회는 현대 미국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열악한 노동 조건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점진적으로 노동권을 확대시켰고, 복지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헤이마켓 사건부터 삼각공장 화재까지, 비극적 사건들은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수천만 명의 이민자들은 미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차별과 착취를 겪었다. 엘리스 아일랜드를 통해 들어온 이민자들은 도시 빈민가에서 힘든 삶을 살면서도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이들의 문화와 전통은 미국 문화를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의 갈등과 투쟁은 미국이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이었다. 노동권, 이민자 권리, 사회 정의를 위한 싸움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당시의 경험은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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