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파 공화당의 등장
남북전쟁이 끝난 후, 의회에서는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급진파 공화당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태디어스 스티븐스와 찰스 섬너가 이끄는 이들은 남부를 정복지로 취급하고 근본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티븐스는 특히 과격했다. 그는 남부의 대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전 노예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제안했다.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라는 구호가 퍼져나갔다. 이는 경제적 자립의 기초를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 계획은 온건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존슨의 온건 재건과 갈등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남부에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대다수 남부인에게 사면을 내리고, 주 정부가 빠르게 재조직되도록 허용했다. 1865년 말, 대부분의 남부 주들이 자치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들이 제정한 흑인법은 전국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의회가 재개되자 급진파는 존슨의 정책에 맞섰다. 그들은 남부에서 선출된 의원들의 의석을 거부했다. 연합재건위원회를 구성해 독자적인 재건 계획을 수립했다. 대통령과 의회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었다. 존슨은 자신이 링컨의 정책을 계승한다고 주장했지만, 의회는 더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봤다.
1866년 중간선거의 영향
1866년 가을 중간선거는 재건의 방향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되었다. 존슨은 전국을 돌며 자신의 정책을 옹호했다. 이른바 "스윙 어라운드 더 서클"이라 불린 이 유세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존슨의 거친 언사와 품위 없는 행동이 여론을 악화시켰다.
급진파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이들은 의회 양원에서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게 되었다. 선거 직후 뉴올리언스와 멤피스에서 일어난 인종 폭동은 더 강력한 연방 개입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의회는 이제 재건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군정 재건의 시작
1867년 3월, 의회는 재건법을 통과시켰다. 테네시를 제외한 남부 10개 주를 5개 군정 지구로 나누고 각각에 연방군 사령관을 배치했다. 이들에게는 민간 정부를 능가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필립 셰리던, 대니얼 시클스 같은 남북전쟁 영웅들이 군정 사령관이 되었다.
군정 통치하에서 남부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전 연합군 지도자들은 정치 참여가 금지되었다. 반면 흑인 남성들에게는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새로운 유권자 등록이 시작되자 많은 지역에서 흑인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했다. 이는 남부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새로운 주 헌법과 재입주
재입주를 위해서는 새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1867-68년에 열린 헌법 제정 회의는 남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모임이었다. 흑인 대의원들이 전체의 약 25%를 차지했다. 이들 중에는 자유 흑인 출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 노예들이었다.
새 헌법들은 급진적인 내용을 담았다. 보통선거권, 공교육 제도, 여성의 재산권 보호 등이 포함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미국 최초로 무상 의무교육을 헌법에 명시했다. 이런 진보적 조항들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백인 보수파들은 이를 "흑인 통치"라고 비난했다.
탄핵 위기의 전개
존슨과 의회의 갈등은 마침내 탄핵으로 치달았다. 직접적인 계기는 전쟁부 장관 에드윈 스탠턴의 해임이었다. 의회는 재임법을 통과시켜 상원 동의 없이 각료를 해임할 수 없도록 했다. 존슨이 이를 무시하고 스탠턴을 해임하자 하원은 즉각 탄핵을 의결했다.
1868년 2월 24일, 하원은 126 대 47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11개 조항 중 대부분은 재임법 위반과 의회 무시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전국이 이 역사적 사건에 주목했다.
상원 재판과 한 표의 운명
상원의 탄핵 재판은 1868년 3월 13일 시작되었다. 대법원장 새먼 체이스가 재판을 주재했다. 검사 역할을 맡은 하원 의원들은 존슨이 헌법을 위반하고 재건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재임법 자체가 위헌이며, 정책 차이를 이유로 탄핵하는 것은 위험한 선례라고 반박했다.
재판은 두 달간 계속되었다. 5월 16일 첫 투표가 있었다. 유죄 판결에는 54명 중 36명, 즉 3분의 2가 필요했다. 결과는 35 대 19였다. 단 한 표 차이로 탄핵은 실패했다. 결정적인 한 표를 던진 사람은 캔자스의 공화당 상원의원 에드먼드 로스였다. 그는 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했다고 밝혔다.
흑인 정치 참여의 확대
군정 재건하에서 흑인의 정치 참여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유권자 등록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프리드먼즈 뷰로와 유니언 리그가 주도한 이 운동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흑인 등록 유권자가 백인의 두 배에 달했다.
1867-68년 선거에서 수백 명의 흑인이 공직에 당선되었다. 주 의회에는 600명이 넘는 흑인 의원이 선출되었다. 연방 하원에는 16명, 상원에는 2명의 흑인이 진출했다. 피츠버그 켈로그 핀치백은 루이지애나 주지사 대행을 지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남부 공화당 연합
재건 시대 남부의 공화당은 독특한 연합체였다. '카펫배거'라 불린 북부 이주민, '스캘러웨그'라 불린 남부 출신 백인 공화당원, 그리고 압도적 다수인 흑인 유권자가 연합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동기를 가졌지만 재건이라는 공동 목표로 뭉쳤다.
카펫배거 중에는 이상주의적 개혁가들도 있었고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스캘러웨그는 주로 산간 지역의 소농들이나 전쟁 전부터 연방을 지지했던 사람들이었다. 흑인들은 새로 얻은 자유와 권리를 지키려 했다. 이 불안정한 연합은 백인 보수파의 끊임없는 공격에 직면했다.
재건 정부의 성과와 한계
재건 정부들은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 공교육 제도가 확립되고,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었다. 세제가 개혁되어 부담이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흑인들을 위한 병원과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이는 남부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했다. 토지 재분배는 실현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자유민은 여전히 토지가 없어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부채에 시달리는 주 정부들은 북부 자본에 의존했다. 부패 스캔들도 잦았다. 백인들의 저항은 점점 조직화되고 폭력적이 되어갔다.
결론
존슨 대통령의 탄핵부터 군정 재건까지, 이 시기는 미국 정치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들로 채워졌다. 의회는 대통령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고, 남부에 혁명적 변화를 시도했다. 흑인들이 처음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민주주의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재건의 실험은 불완전했다. 경제적 평등 없는 정치적 평등은 취약했다. 북부의 의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졌고, 남부 백인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군정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고, 연방군이 철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재건은 위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 문제가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지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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