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개척의 마지막 단계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서부 개척은 가속화되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면서 동부와 서부가 연결되었고, 수많은 정착민들이 서부로 향했다. 정부는 1862년 홈스테드법을 통해 160에이커의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했고, 철도 회사들도 적극적으로 토지를 분양하며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팽창은 필연적으로 대평원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대평원의 원주민들은 버팔로를 중심으로 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라코타(수족), 샤이엔, 아라파호, 코만치, 키오와 등의 부족들은 말을 타고 버팔로를 사냥하며 광활한 평원을 자유롭게 이동했다. 버팔로는 단순한 식량원이 아니라 의복, 주거, 도구 등 생활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1860년대 초 대평원에는 약 1,500만 마리의 버팔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대평원 전쟁의 시작
1860년대부터 1890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충돌을 통틀어 '대평원 전쟁' 또는 '인디언 전쟁'이라 부른다. 이는 단일한 전쟁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크고 작은 충돌들의 연속이었다. 정착민들의 서진과 철도 건설, 금광 개발은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사냥터와 신성한 땅을 침범했고, 이는 불가피한 충돌로 이어졌다.
1864년 콜로라도의 샌드크릭 학살은 이 시기의 비극을 상징한다. 존 치빙턴 대령이 이끄는 콜로라도 의용군이 평화적인 샤이엔과 아라파호 마을을 공격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150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동부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고,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백인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1866년부터 1868년까지의 레드 클라우드 전쟁은 원주민들의 중요한 승리였다. 라코타족의 지도자 레드 클라우드는 와이오밍의 보즈먼 트레일을 지나는 군사 요새들을 공격했다. 1866년 페터만 학살에서는 윌리엄 페터만 대위가 이끄는 80명의 병사들이 전멸했다. 이 전쟁은 1868년 라라미 요새 조약으로 끝났는데, 미국 정부는 요새들을 포기하고 대평원 지역을 원주민들의 영구 보호구역으로 인정했다.
조약과 배신의 역사
미국 정부와 원주민들 사이에는 수백 개의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대부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부는 필요에 따라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거나 수정했다. 1851년 라라미 요새 조약은 각 부족의 영토를 명확히 규정했지만, 금이 발견되거나 철도가 건설되면 즉시 무시되었다.
특히 1874년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블랙힐스는 라코타족에게 신성한 땅이었고, 1868년 조약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탐험대가 금을 발견하자, 수천 명의 광부들이 불법적으로 침입했다. 정부는 라코타족에게 블랙힐스를 매각하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그들은 "우리는 어머니인 대지를 팔 수 없다"며 거부했다.
리틀 빅혼 전투와 그 여파
1876년 6월 25일, 몬태나 준주의 리틀 빅혼 강에서 역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제7기병대 210명이 시팅 불과 크레이지 호스가 이끄는 라코타, 샤이엔, 아라파호 연합군에게 전멸당했다. 이는 인디언 전쟁 중 원주민들의 가장 큰 승리였다.
하지만 이 승리는 역설적으로 원주민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미국 정부와 국민들은 커스터의 죽음에 격분했고, 대규모 보복 작전을 전개했다. 수천 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원주민들을 추적했고, 부족들은 흩어져 도망쳐야 했다. 시팅 불은 캐나다로 피신했고, 크레이지 호스는 1877년 항복했다가 체포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버팔로의 멸종과 원주민 생활의 붕괴
원주민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버팔로를 멸종시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의도적으로 버팔로 사냥을 장려했다. 필립 셰리던 장군은 "버팔로 사냥꾼들은 의회나 군대가 30년 동안 할 수 없었던 인디언 문제 해결을 몇 년 만에 해냈다"고 말했다.
철도 회사들은 버팔로 가죽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냈고, 수많은 사냥꾼들이 대평원으로 몰려들었다. 한 사냥꾼이 하루에 수백 마리를 죽이는 일도 흔했다. 가죽만 벗기고 고기는 썩도록 내버려두었다. 1870년대 초 1,500만 마리였던 버팔로는 1890년경에는 1,000마리도 채 남지 않았다.
버팔로의 멸종은 평원 원주민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식량과 생활 필수품의 원천이 사라진 원주민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배급에 의존해야 했다. 자유롭게 이동하던 유목민들은 좁은 보호구역에 갇혀 농사를 지어야 했지만, 대부분은 농업에 적응하지 못했다.
도스법과 토지 분할 정책
1887년 제정된 도스법(Dawes Act)은 원주민 정책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법은 부족 공동체 소유의 보호구역 토지를 개인 소유로 분할하여 원주민들을 '문명화'시키려는 시도였다. 각 가장에게는 160에이커, 독신자에게는 80에이커가 할당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원주민들을 미국 시민으로 통합시키려는 정책이었지만, 실제로는 원주민 토지를 빼앗는 수단이 되었다. 개인에게 분할하고 남은 '잉여' 토지는 백인 정착민들에게 개방되었다. 1887년 1억 3,800만 에이커였던 보호구역 토지는 1934년까지 4,800만 에이커로 줄어들었다.
도스법은 원주민들의 부족 정체성과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토지의 개인 소유는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공동체주의와 맞지 않았고, 많은 원주민들이 사기나 강압에 의해 토지를 잃었다. 또한 농업 경험이 없는 원주민들은 할당받은 토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기숙학교와 문화적 동화 정책
미국 정부는 원주민 아동들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보내 '문명화'시키려 했다. 1879년 펜실베이니아 칼라일에 설립된 칼라일 인디언 산업학교가 대표적이었다. 리처드 프랫 대령이 설립한 이 학교의 모토는 "인디언을 죽이고 인간을 살려라"였다.
기숙학교에서는 원주민 아동들의 전통 의상을 벗기고 머리를 자르며, 모국어 사용을 금지했다. 이름도 영어식으로 바꾸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아이들은 가족과 부족으로부터 격리되어 백인 문화를 강제로 학습해야 했다. 체벌과 학대가 일상적이었고, 많은 아이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1900년까지 전국에 150개 이상의 원주민 기숙학교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동화 정책은 원주민들의 언어, 종교, 전통을 말살시키는 문화적 제노사이드였다. 많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백인 사회와 원주민 사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이 되었다.
운디드니 학살과 고스트 댄스 운동
1880년대 후반, 절망에 빠진 원주민들 사이에서 '고스트 댄스'라는 종교 운동이 확산되었다. 네바다의 파이우트족 예언자 워보카가 시작한 이 운동은 평화적인 천년왕국 운동이었다. 워보카는 원주민들이 고스트 댄스를 추면 죽은 조상들이 돌아오고, 버팔로가 다시 대평원을 가득 채우며, 백인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고스트 댄스는 빠르게 대평원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라코타족 사이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백인들은 이 운동을 위험한 반란으로 오해했다. 일부 라코타족이 고스트 댄스 셔츠가 총알을 막아준다고 믿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1890년 12월 29일, 사우스다코타 운디드니 크릭에서 비극이 발생했다. 제7기병대가 빅풋 추장이 이끄는 라코타족을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핫치키스 기관총까지 동원된 학살로 300명 이상의 라코타족이 죽었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군인 25명도 사망했지만, 대부분은 아군 오사로 인한 것이었다.
원주민 지도자들의 운명
19세기 후반 원주민 저항의 상징적 인물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아파치족의 제로니모는 1886년 항복한 후 플로리다와 앨라배마의 감옥에 갇혀 여생을 보냈다. 그는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1909년 오클라호마의 실 요새에서 죽었다.
시팅 불은 캐나다에서 4년간 망명 생활을 한 후 1881년 미국으로 돌아와 항복했다. 한때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고스트 댄스 운동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1890년 12월 15일 체포 과정에서 부족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네즈 퍼스족의 조셉 추장은 1877년 1,700마일에 걸친 도주 끝에 캐나다 국경 40마일 전에서 항복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항복 연설은 유명하다. 그는 약속과 달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04년 워싱턴 주의 콜빌 보호구역에서 세상을 떠났다.
보호구역 시대의 시작
1890년 운디드니 학살은 사실상 인디언 전쟁의 종말을 알렸다. 원주민들은 완전히 제압되어 정부가 지정한 보호구역에 갇혀 살게 되었다. 보호구역은 대부분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고, 정부의 배급에 의존해야 했다. 전통적인 사냥과 유목 생활은 불가능해졌다.
보호구역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질병이 만연했고, 알코올 중독이 확산되었다. 실업률은 극도로 높았고, 자살률도 치솟았다. 정부 관리들의 부패로 배급품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시민권도 없는 이방인으로 자기 땅에서 살아야 했다.
1924년이 되어서야 원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많은 주에서는 여전히 투표권을 제한했고, 차별은 계속되었다. 보호구역의 빈곤과 사회 문제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상태로 남아있다.
프런티어 시대의 종말
1890년 인구조사국은 더 이상 명확한 프런티어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는 1893년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프런티어가 미국의 민주주의와 국민성을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프런티어의 종말은 미국인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1890년대 말 스페인과의 전쟁과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이어졌다.
서부 개척 시대는 미국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카우보이, 보안관, 무법자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낭만화된 서부는 원주민들의 비극과 환경 파괴라는 어두운 면을 가리고 있었다.
결론
프런티어의 종말과 원주민 저항의 진압은 미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평원 전쟁, 도스법, 고스트 댄스 운동, 운디드니 학살은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주민들은 토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 언어, 정체성까지 빼앗겼다.
이 시기의 역사는 미국의 팽창주의와 인종주의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서부 개척은 원주민들에게는 대재앙이었다. 버팔로와 함께 사라진 것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한 문명의 삶의 방식이었다.
오늘날 미국 원주민들은 여전히 이 시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보호구역의 빈곤, 문화적 정체성의 상실, 역사적 트라우마는 현재진행형이다. 프런티어의 종말은 미국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지만, 원주민들에게는 끝없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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