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과학철학 17. 과학적 합리성 논쟁의 진화: 객관주의와 상대주의 사이의 철학적 긴장과 실용적 해법

SSSCH 2025. 4. 1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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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합리성의 전통적 이해

과학적 합리성은 오랫동안 과학의 핵심 가치이자 다른 지식 형태와 구별되는 특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전통적인 이해에 따르면, 과학적 합리성은 논리적 일관성, 경험적 증거에 기반한 판단, 체계적인 방법론, 그리고 비판적 검증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은 인간의 편견이나 문화적 영향에서 벗어나 객관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특히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의 합리성을 형식 논리와 경험적 검증에 기초한 것으로 설명했다. 이들에게 과학적 방법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규칙들의 집합으로, 이를 충실히 따르면 누구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의 합리성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객관적 특성이라는 생각을 강화했다.

칼 포퍼의 반증주의 역시 과학적 합리성의 객관적 성격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합리성은 이론의 반증 가능성과 비판적 검토를 통해 구현된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이 틀릴 가능성을 열어두고 엄격한 시험에 기꺼이 노출시킬 때, 과학은 다른 지식 형태보다 더 합리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쿤의 도전: 패러다임과 공약불가능성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의 판단과 선택은 그들이 속한 패러다임(paradigm)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패러다임은 특정 시대의 과학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문제 설정 방식, 개념적 도구, 방법론적 규칙, 그리고 세계관을 포괄하는 총체적 프레임워크다.

쿤이 제시한 가장 도전적인 개념 중 하나는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 과학자들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를 달리 이해하며,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방법이 적절한지, 어떤 증거가 중요한지에 대한 기준도 다르다. 더 나아가, 패러다임 간의 전환은 단순한 논리적 추론이나 경험적 증거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게슈탈트 전환과 같은 심리적 변화를 수반한다.

이러한 쿤의 주장은 과학적 합리성의 객관성과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과학적 판단이 패러다임에 의존적이고, 패러다임 간의 우열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면, 과학의 발전은 객관적 진리를 향한 합리적 진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세계관 사이의 대체에 가깝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쿤의 이론은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상대주의적 해석의 길을 열었지만, 쿤 자신은 극단적 상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후기 저작에서 패러다임 선택에 작용하는 '좋은 이론의 기준'(단순성, 정확성, 일관성, 광범위함, 실용성 등)을 제시하며, 상대주의적 해석을 완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들마저도 패러다임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쿤의 이론이 갖는 상대주의적 함의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페이어아벤트의 방법론적 무정부주의

폴 페이어아벤트는 쿤보다 더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방법론적 무정부주의'(methodological anarchism)는 과학에서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방법론적 규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의 진보는 오히려 "anything goes"(무엇이든 괜찮다)라는 원칙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페이어아벤트는 과학사의 주요 혁신들이 당대의 방법론적 규범을 위반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지적했다.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은 기존의 방법론적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때로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위반함으로써 혁신적 발견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또한 페이어아벤트는 과학적 방법과 비과학적 방법 사이의 엄격한 경계 설정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점성술, 전통 의학, 종교적 세계관 등 '비과학적'이라고 간주되는 지식 체계들도 나름의 합리성을 갖고 있으며, 이들을 단순히 과학의 합리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화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일 수 있다.

페이어아벤트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의 특권적 지위와 합리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많은 비판자들은 그의 입장이 극단적 상대주의로 이어져, 결국 과학과 미신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과학의 인식론적 권위를 훼손한다고 우려했다.

라우든의 문제해결 모델

래리 라우든(Larry Laudan)은 객관주의와 상대주의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모색했다. 그의 '문제해결 모델'(problem-solving model)은 과학의 합리성을 객관적 진리나 실재에 대한 접근이 아닌, 문제 해결 능력의 증진으로 재정의했다.

라우든에 따르면, 과학의 목표는 세계에 대한 참된 진술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개념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 이론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얼마나 적은 변칙 사례와 개념적 어려움을 갖는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의 합리성이 시대와 맥락에 의존적이면서도, 완전히 상대적이지는 않다는 중도적 입장을 제공한다. 서로 다른 시대나 문화의 과학자들이 동일한 개념이나 기준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문제 해결 능력이라는 공통된 척도를 통해 이론 간의 비교와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라우든의 접근은 과학의 합리성을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의 형이상학적 부담에서 벗어나 과학의 실천적 성공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회구성주의와 에든버러 학파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사회구성주의적 과학 연구는 과학적 합리성 논쟁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특히 데이비드 블루어(David Bloor)와 배리 반스(Barry Barnes)가 주도한 '에든버러 학파'는 '강한 프로그램'(Strong Programme)을 통해 과학 지식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다.

강한 프로그램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대칭성 원리'(symmetry principle)로, 이는 과학적 믿음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그것의 형성과 수용을 동일한 유형의 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성공적인 과학 이론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수용되었고, 실패한 이론은 사회적·심리적 요인 때문에 오류를 범했다고 설명하는 비대칭적 접근을 취했다. 그러나 강한 프로그램은 모든 과학적 믿음, 즉 지금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이론들까지도 사회적·문화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적 합리성이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독립적일 수 없다는 쿤과 페이어아벤트의 통찰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에 따르면, 과학의 합리성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규범이 아니라, 특정 사회와 시대가 '합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대한 집단적 합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이 과학의 객관성과 특별한 인식론적 지위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과학 지식이 자연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측면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사회적 요인만을 강조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과 상황적 지식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과학적 합리성 논쟁에 젠더 관점을 도입했다. 특히 산드라 하딩(Sandra Harding)과 돈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와 같은 학자들은 전통적인 '객관성' 개념이 실제로는 특정 계층(주로 서구 남성 엘리트)의 관점과 경험을 보편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하딩은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 개념을 통해, 모든 지식이 특정 관점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관점의 사회적·정치적 위치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때 오히려 더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학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정의하고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해러웨이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 개념을 통해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모든 지식은 특정한 사회적·육체적·역사적 위치에서 생산되며, 이러한 '상황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관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더 포괄적이고 견고한 지식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과학적 합리성이 단일하고 보편적인 원칙들의 집합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경험들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강조했다. 이는 과학의 합리성을 더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실용주의와 자연화된 인식론

또 다른 중요한 접근법은 존 듀이(John Dewey)로부터 윌러드 콰인(W.V.O. Quine)을 거쳐 현대의 여러 철학자들에게 이어지는 실용주의적 전통이다. 이 관점에서 과학적 합리성은 형이상학적 혹은 선험적 원칙이 아니라,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실천적 도구로 이해된다.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naturalized epistemology)은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철학적 분석 자체가 과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과 추론 과정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신경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사실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으며, 따라서 합리성의 규범 역시 이러한 경험적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접근은 과학적 합리성을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인 규범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상대화하지는 않는다. 대신, 과학적 합리성은 인간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적응적이고 진화하는 능력으로 이해된다.

바스카와 과학적 실재론

로이 바스카(Roy Bhaskar)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 전통은 과학적 합리성 논쟁에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바스카는 과학의 목표가 관찰 가능한 현상들 너머에 존재하는 생성 메커니즘(generative mechanisms)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적 실재론에 따르면, 세계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된다: 실재적 영역(the Real), 현실적 영역(the Actual), 경험적 영역(the Empirical). 실재적 영역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구조와 메커니즘을 포함하며, 현실적 영역은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경험적 영역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부분을 의미한다.

바스카의 관점에서 과학적 합리성은 이러한 심층적 구조와 메커니즘을 점진적으로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과학적 실재론의 입장에서 과학의 합리성과 진보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순수한 경험주의나 사회구성주의적 접근과는 구별된다.

현대적 종합: 다원주의적 합리성

오늘날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단일한 모델보다는 다원주의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는 과학이 다양한 목표, 방법, 가치를 포괄하는 복잡한 활동이며, 따라서 그 합리성 역시 다양한 차원과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헬렌 롱기노(Helen Longino)는 '맥락적 경험주의'(contextual empiricism)를 통해 과학의 객관성이 개인적 수준이 아닌 공동체적 수준에서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객관성은 다양한 관점을 가진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비판적 담론을 통해 확보될 수 있으며, 이는 과학 공동체의 구조와 실천이 얼마나 민주적이고 포용적인지에 달려 있다.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는 과학 이론들이 제한된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모자이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과학적 합리성은 보편적 법칙의 발견이 아니라, 특정 맥락과 상황에 적합한 모델과 도구를 발전시키는 능력에 있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접근은 과학적 합리성이 단일한 알고리즘이나 규칙 체계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대신, 과학의 합리성은 다양한 목표, 가치, 방법,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협상되고 재구성되는 복합적 성격을 갖는다.

과학적 합리성과 과학 교육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과학 교육에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전통적인 과학 교육은 과학을 객관적 사실들의 집합이나 고정된 방법론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발전은 이러한 접근이 과학의 실제 모습을 왜곡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적 과학 교육은 과학의 잠정적이고 역동적인 특성, 사회문화적 맥락과의 상호작용, 다양한 방법론과 가치의 역할 등을 포함하는 더 풍부하고 복합적인 과학적 합리성 개념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학생들이 과학을 암기해야 할 고정된 지식이 아닌, 세계를 이해하고 탐구하는 살아있는 과정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학생들이 과학의 한계와 가능성을 더 깊이 인식하고, 과학 지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게 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시민들이 기후 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복잡한 사회적 이슈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다.

결론: 지속되는 대화로서의 과학적 합리성

과학적 합리성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단일한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고, 오히려 더 풍부하고 다층적인 이해로 발전해왔다. 이는 과학 자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인간 활동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현대 과학철학에서 과학적 합리성은 객관주의와 상대주의, 실재론과 구성주의, 보편주의와 맥락주의 사이의 생산적인 긴장 속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긴장은 해소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본질을 반영하는 필연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역설적으로 과학 자체가 그러하듯이 잠정적이고 비완결적이다. 새로운 과학적 방법과 실천이 등장하고, 과학과 사회의 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개념 역시 지속적으로 재검토되고 재구성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합리성은 고정된 답이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생성하는 열린 대화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대화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과학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적 태도의 핵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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