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과학철학 15. 객관성의 남성적 가면을 벗기다, 젠더와 과학철학의 교차점

SSSCH 2025. 4. 1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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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보편적이라는 전통적 관점이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의 객관성 이면에 숨겨진 젠더 편향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과학 지식이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생산되며, 그 맥락에 내재된 젠더 관계가 과학의 내용과 방법론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번 글에서는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주요 흐름과 쟁점들을 살펴보고, 젠더 관점이 과학철학에 어떤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지 탐구한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등장 배경

여성과 과학의 역사적 관계

과학은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적 활동이었다. 중세와 근대 초기까지 여성은 대학이나 과학 아카데미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 마거릿 로시터(Margaret Rossiter)의 『여성 과학자들(Women Scientists in America)』은 과학 분야에서 여성들이 겪은 차별과 배제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예를 들어, 마리 퀴리는 방사능 연구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했고,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이중 나선 구조 발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런 여성 과학자들의 성취는 종종 과학사에서 과소평가되거나 무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단순히 여성 개인의 배제 문제가 아니라, 과학 자체의 본질과 방법론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출발점이다.

제2물결 페미니즘과 과학 비판

1960-70년대 제2물결 페미니즘은 과학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작했다. 이 시기 페미니스트들은 과학이 여성을 연구 대상에서 배제하거나, 성차별적 가정에 기초한 연구를 수행한다고 비판했다.

루스 블라이어(Ruth Bleier)의 『과학과 젠더(Science and Gender)』(1984)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어떻게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었는지 분석했다. 블라이어는 뇌의 성차에 관한 연구들이 종종 방법론적 결함을 갖고 있으며, 기존의 젠더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고 지적했다.

에블린 폭스 켈러(Evelyn Fox Keller)는 『성의 반사(Reflections on Gender and Science)』(1985)에서 과학의 언어와 은유가 어떻게 남성성과 연결되어 왔는지 분석했다. 그녀는 '객관성', '합리성', '보편성'과 같은 과학의 핵심 가치들이 역사적으로 '남성적' 특성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이에 비해 '주관성', '감정', '특수성'은 '여성적' 특성으로 폄하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과학철학에서의 페미니스트 전환

198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단순히 과학에서의 성차별 문제를 넘어, 과학 지식의 본질과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 사회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기존 과학철학의 비판적 흐름과 결합하며 발전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의 객관성은 어디서 오는가?", "지식의 생산에서 인식 주체의 위치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가치중립적 과학은 가능한가?" 등의 질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과학 인식론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산드라 하딩(Sandra Harding),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헬렌 롱기노(Helen Longino) 등 주요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의 독창적인 이론이 발전했다.

페미니스트 과학비판의 주요 흐름

과학 연구에서의 젠더 편향

페미니스트 과학비판의 첫 번째 흐름은 과학 연구에서 나타나는 젠더 편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연구 주제 선정의 편향: 어떤 연구 질문이 중요하고 자금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편향이다. 예를 들어, 여성 건강 문제나 가사 노동 관련 기술보다 군사 기술이나 남성 중심적 질병 연구에 더 많은 자원이 배분되어 왔다.
  2. 방법론적 편향: 연구 설계, 데이터 수집, 분석 과정에서 나타나는 편향이다. 예를 들어, 많은 의학 연구가 오랫동안 남성 피험자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가 여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가정했다. 이로 인해 여성의 심장마비 증상이 남성과 다르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간과되었다.
  3. 해석적 편향: 결과 해석 과정에서 나타나는 편향이다. 동일한 데이터라도 연구자의 문화적 가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로라 베타이그(Londa Schiebinger)는 동물행동학에서 암컷 영장류의 성적 행동이 종종 '수동적'이고 '선택적'으로 해석되는 반면, 수컷의 행동은 '적극적'이고 '지배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안네 파우스토-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은 『몸의 신화(Myths of Gender)』(1985)와 『다섯 개의 성(Sexing the Body)』(2000)에서 생물학적 성차에 관한 과학 연구가 어떻게 문화적 젠더 규범에 영향을 받는지 분석했다. 그녀는 성과 젠더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연속체임을 보여주는 많은 생물학적 증거들이 있음에도, 과학자들이 이분법적 성별 구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데이터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재고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두 번째 흐름은 '객관성'이라는 과학의 핵심 이상에 대한 비판적 재고다. 전통적으로 객관성은 인식 주체의 개인적, 사회적 특성으로부터 독립적인 '관점 없는 관점'(view from nowhere)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은 이러한 '위치 없는 객관성'(positional objectivity) 개념이 실제로는 특권적 사회 위치(주로 백인, 남성, 중산층)의 관점을 보편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모든 지식이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위치에서 생산된다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 개념을 제안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s)"(1988) 논문에서 과학적 객관성의 대안적 개념을 제시했다. 그녀에 따르면, 진정한 객관성은 자신의 부분적 관점을 인정하고, 다양한 위치에서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달성된다. 이는 '신의 시각'(god trick)처럼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 중립적 관점을 가정하는 전통적 객관성 개념보다 더 '강한 객관성'을 제공한다.

산드라 하딩은 『누구의 과학? 누구의 지식?(Whose Science? Whose Knowledge?)』(1991)에서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 개념을 발전시켰다. 하딩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여성, 유색인종, 노동자 등)은 종종 지배 집단이 보지 못하는 사회 구조의 측면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적 특권'(epistemic privilege)을 통해 더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지식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학의 방법론과 인식론에 대한 페미니스트 접근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세 번째 흐름은 과학 방법론과 인식론에 대한 대안적 접근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존 과학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과학적 실천을 위한 규범적 모델을 제시한다.

헬렌 롱기노는 『과학을 사회적으로 생각하기(Science as Social Knowledge)』(1990)에서 '비판적 맥락적 경험주의'(critical contextual empiricism)를 제안했다. 이 모델에서 과학적 객관성은 개인의 중립성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들의 비판적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과학 공동체가 다양한 배경과 관점을 가진 구성원들을 포함할수록, 편향을 발견하고 교정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앤더슨(Elizabeth Anderson)은 『가치 있는 과학의 탐색(The Quest for a Feminist Science)』에서 '민주적 인식론'(democratic epistemology)을 제안했다. 이는 지식 생산 과정에 다양한 사회 집단의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더 포괄적이고 강건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린 넬슨(Lynn Hankinson Nelson)은 『누가 알고 있는가(Who Knows)』(1990)에서 과학 지식 생산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녀에 따르면, 지식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이며, 과학적 합리성은 공동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현된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주요 이론과 개념

입장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

페미니스트 입장 인식론은 지식이 항상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생산되며, 지배적 위치보다 주변화된 위치가 종종 더 포괄적인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에서 영감을 받아, 낸시 하트속(Nancy Hartsock), 힐러리 로즈(Hilary Rose), 산드라 하딩 등이 발전시켰다.

하트속은 『진리의 돈(The Feminist Standpoint)』(1983)에서 여성의 경험, 특히 재생산 노동과 돌봄 노동의 경험이 어떻게 특별한 인식적 관점을 제공하는지 설명했다. 이러한 노동은 물질적 필요와 인간 관계를 직접 다루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분리된 지식보다 더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지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하딩은 입장 인식론을 더 발전시켜, 단순히 '여성의 관점'이 아니라 다양한 억압적 관계(젠더, 인종, 계급, 성적 지향 등)가 교차하는 지점에서의 복잡한 입장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에 따르면, 입장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비판적 성찰과 정치적 투쟁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

도나 해러웨이가 발전시킨 '상황적 지식' 개념은 모든 지식이 특정한 위치에서 생산되며, 객관성이란 이러한 위치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해러웨이는 전통적 객관성이 '신의 시각'을 가장한 특권적 관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며, '위치 지어진 객관성'(situated objectivity)을 제안했다.

그녀는 "Simians, Cyborgs, and Women"(1991)에서 '사이보그'(cyborg) 은유를 통해 자연/문화, 인간/기계, 남성/여성과 같은 이분법을 넘어서는 혼종적이고 유동적인 지식 생산 방식을 모색했다. 이는 어떤 단일한 '여성적' 과학이 아니라, 다양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연대와 대화를 통한 지식 생산을 의미한다.

비판적 맥락적 경험주의(Critical Contextual Empiricism)

헬렌 롱기노는 전통적 경험주의의 강점을 유지하면서도, 지식 생산의 사회적 맥락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비판적 맥락적 경험주의'를 제안했다. 이 모델에서 과학적 객관성은 다양한 관점을 가진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공동체의 비판적 상호작용을 통해 달성된다.

롱기노는 『과학의 운명(The Fate of Knowledge)』(2002)에서 효과적인 비판적 상호작용을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비판을 위한 공인된 포럼의 존재(저널, 학회 등)
  2. 비판에 대한 응답의 의무
  3. 평가를 위한 공유된 표준의 존재
  4. 인식적 권위의 평등한 분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될 때, 과학 공동체는 개인적 편향이나 사회적 가치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더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경험주의(Feminist Empiricism)

엘리자베스 앤더슨과 루이즈 앤토니(Louise Antony)가 발전시킨 '페미니스트 경험주의'는 과학의 기본 방법론적 원칙(경험적 적합성, 논리적 일관성 등)을 수용하면서도, 그 적용 과정에서 젠더 편향을 제거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앤토니는 『페미니즘과 철학 안내서(A Mind of One's Own)』(1993)에서 '편향의 역설'(bias paradox)을 제시했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과학의 남성 중심적 편향을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근거로 어떤 객관적 표준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관점이 어떤 편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되, 이러한 다양한 편향들의 비판적 상호작용을 통해 더 강건한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구체적 사례 연구

영장류학에서의 페미니스트 개입

영장류학은 페미니스트 과학 비판과 개입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분야 중 하나다. 도나 해러웨이는 『영장류의 비전(Primate Visions)』(1989)에서 영장류학의 역사를 분석하며, 이 분야가 어떻게 문화적 젠더 규범과 식민주의적 관점을 반영해왔는지 보여주었다.

1970년대 이후 여성 영장류학자들(제인 구달, 다이앤 포시, 버루테 갈디카스 등)의 연구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관점을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수컷의 공격성과 경쟁이 강조되었지만, 여성 연구자들은 암컷의 사회적 관계와 협력적 행동, 그리고 수컷의 양육 행동에도 주목했다.

사라 블래퍼 하디(Sarah Blaffer Hrdy)의 『여성, 그 미지의 영장류(The Woman That Never Evolved)』(1981)는 전통적 다윈주의가 암컷의 성적 선택과 경쟁을 과소평가해왔다고 비판하며, 암컷 영장류의 적극적인 성적, 사회적 전략을 분석했다.

생물학에서의 젠더 편향

생물학, 특히 진화생물학과 신경과학은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인 분야다. 루스 허버드(Ruth Hubbard)는 『사과 속의 정치(The Politics of Women's Biology)』(1990)에서 생물학이 어떻게 성별 차이를 과장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자연화하는 데 기여해왔는지 분석했다.

앞서 언급한 안네 파우스토-스털링은 생물학적 성(sex)이 단순히 '자연의 사실'이 아니라, 과학적 실천을 통해 구성되는 범주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인터섹스 사례 연구를 통해, 이분법적 성별 구분이 생물학적 다양성을 인위적으로 단순화한다고 주장했다.

코델리아 파인(Cordelia Fine)은 『딜루전스 오브 젠더(Delusions of Gender)』(2010)와 『테스토스테론 렉스(Testosterone Rex)』(2017)에서 뇌의 성차에 관한 연구들이 어떻게 방법론적 결함과 해석적 편향을 갖고 있는지 분석했다. 그녀는 뉴로섹시즘(neurosexism)이라는 용어를 통해, 신경과학이 종종 기존의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연구되고 해석된다고 비판했다.

생식의학과 여성 건강

생식의학과 여성 건강 분야는 페미니스트 과학 비판이 실제 의료 관행의 변화로 이어진 중요한 사례다. 보스턴 여성건강서적집단(Boston Women's Health Book Collective)의 『우리 몸, 우리 자신(Our Bodies, Ourselves)』(1970)은 여성들이 자신의 건강과 신체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의료 전문가들의 지배적 담론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바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와 데이드르 잉글리시(Deirdre English)는 『마녀, 조산사, 간호사(Witches, Midwives, and Nurses)』(1973)에서 여성 치유자들이 어떻게 남성 의사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여성 건강 지식의 주변화로 이어졌는지 분석했다.

생식기술(인공수정, 체외수정, 대리모 등)의 발전은 새로운 페미니스트 분석을 촉발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기술이 여성의 재생산 자율성을 증진한다고 보는 반면, 다른 이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의료적, 기술적 통제가 강화된다고 우려한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쟁점과 비판

상대주의와 객관성의 문제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에 대한 주요 비판 중 하나는 그것이 극단적 상대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만약 모든 지식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서 생산된다면, 어떤 지식 주장도 다른 것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은 '상황적 객관성'이나 '강한 객관성' 개념을 통해 상대주의를 피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하딩은 모든 지식이 상황적이라는 인식이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격한 객관성 기준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다양한 위치에서의 관점을 고려할 때 더 강한 객관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질주의와 차이의 정치학

또 다른 쟁점은 '여성적 관점'이나 '여성적 가치'에 호소할 때 발생하는 본질주의의 위험이다. 초기 페미니스트 과학비판 중 일부는 여성이 자연적으로 더 관계적이고 맥락적인 사고를 한다는 식의 본질주의적 가정에 기대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많은 현대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들은 '여성성'을 생물학적이나 심리학적 본질로 보기보다,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서 형성된 경험과 관점으로 이해한다. 또한 '여성'이 단일한 범주가 아니라, 인종, 계급, 성적 지향, 장애 여부 등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갖는 이질적 집단임을 강조한다.

과학적 실천에의 함의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이 실제 과학적 실천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이 있다. 일부는 기존 과학의 방법론적 원칙(경험적 적합성, 예측력, 일관성 등)을 유지하면서도 그 적용 과정에서 젠더 편향을 제거하는 '페미니스트 경험주의'를 지지한다.

다른 이들은 과학적 방법 자체의 더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환원주의적 접근 대신 복잡성과 관계성을 강조하거나, 통제와 조작 대신 참여적 관찰을 강조하는 방법론적 전환을 제안한다.

반데나 시바(Vandana Shiva)와 마리아 미즈(Maria Mies)는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1993)에서 서구 과학의 환원주의적, 메커니즘적 세계관이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와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생태적 상호의존성과 지역 지식을 존중하는 대안적 과학을 제안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현대적 발전

교차성과 다양한 위치성의 고려

현대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단일한 '여성적 관점'에서 벗어나, 젠더와 함께 인종, 계급, 장애,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의 복잡한 인식론적 문제를 탐구한다.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제안한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은 이러한 분석에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는 『흑인 페미니스트 사상(Black Feminist Thought)』(1990)에서 흑인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블랙 페미니스트 인식론'을 발전시켰다. 그녀는 대화, 감정, 윤리, 개인적 책임성을 지식 검증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했다.

치카나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는 『경계지대(Borderlands/La Frontera)』(1987)에서 경계에 위치한 정체성이 어떻게 특별한 인식론적 자원을 제공하는지 탐구했다. 그녀가 제안한 '메스티자 의식'(mestiza consciousness)은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지식 체계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고방식이다.

포스트콜로니얼 페미니스트 과학 연구

포스트콜로니얼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과학에서의 젠더 편향뿐만 아니라, 식민주의적 편향과 그 교차점에도 주목한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서벌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1988)에서 서구 지식 체계가 어떻게 비서구 주체, 특히 비서구 여성의 지식과 경험을 침묵시키는지 분석했다.

산드라 하딩은 『과학의 다른 면(Is Science Multicultural?)』(1998)에서 '포스트콜로니얼 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서구 과학이 어떻게 식민지 지배와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비서구 지식 체계가 어떻게 주변화되었는지를 탐구한다.

반데나 시바는 『바이오 해적행위(Biopiracy)』(1997)에서 서구 과학이 비서구 지역의 토착 지식, 특히 여성들이 보존해온 생물다양성과 의학 지식을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전유하고 사유화하는 과정을 비판했다.

퀴어 이론과 과학 연구

퀴어 이론은 성과 젠더의 이분법적 구분에 도전하며, 이러한 범주가 어떻게 과학적 담론을 통해 자연화되는지 분석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1990)은 성과 젠더가 생물학적 필연이 아니라 반복적 수행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조안 러지(Joan Roughgarden)는 『진화의 무지개(Evolution's Rainbow)』(2004)에서 자연계의 성적, 젠더적 다양성에 주목하며, 전통적 진화생물학이 이분법적 성별 구분과 이성애 규범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250개 이상의 척추동물 종에서 관찰되는 동성 행동, 성전환, 다양한 짝짓기 시스템 등을 분석하며, 다윈의 성선택 이론에 대안적 모델을 제시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현대적 쟁점

신경과학과 젠더

21세기 들어 신경과학에서의 젠더 편향 문제가 중요한 연구 주제로 부상했다. 앞서 언급한 코델리아 파인의 연구는 뇌의 성차에 관한 과장된 주장들이 어떻게 미디어와 대중 담론에서 확산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지겔 조엘(Daphna Joel)과 동료들은 『인간 두뇌의 모자이크(The Mosaic of the Human Brain)』 연구에서 뇌 구조의 성별 분포가 이분법적이기보다는 중첩되는 모자이크 패턴을 보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남성 뇌'와 '여성 뇌'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도전하는 결과다.

리베카 조던-영(Rebecca Jordan-Young)은 『뇌 속의 환상(Brain Storm)』(2010)에서 호르몬이 뇌 발달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들을 메타분석하며, 이 분야의 방법론적 문제점과 해석적 편향을 지적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편향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시대의 도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 과학기술 연구 영역을 열었다. 세이피야 우몰(Safiya Umoja Noble)은 『억압적 알고리즘(Algorithms of Oppression)』(2018)에서 검색 엔진 알고리즘이 어떻게 인종적, 젠더적 편향을 재생산하는지 분석했다.

캐서린 하일스(N. Katherine Hayles)는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How We Became Posthuman)』(1999)에서 정보 과학과 사이버네틱스의 역사에서 신체성과 물질성이 어떻게 지워졌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젠더화된 과정이었는지 분석했다.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은유는 인간과 기계, 유기체와 정보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대 기술 환경에서 새로운 페미니스트 인식론을 모색하는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생명공학과 생명정치학

생명공학의 발전은 몸, 생명, 재생산에 관한 페미니스트 분석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사라 프랭클린(Sarah Franklin)과 카린 너디그-슐츠(Carine Knorr-Cetina)의 연구는 체외수정과 같은 생식기술이 어떻게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여성의 몸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키는지 탐구했다.

도나 디커슨(Donna Dickenson)은 『소유물로서의 몸(Property in the Body)』(2007)에서 생명공학 시대에 여성의 몸과 생식 조직(난자, 자궁 등)이 어떻게 상품화되고 있는지 분석했다.

폴 래비노(Paul Rabinow)와 니콜라스 로즈(Nikolas Rose)는 푸코의 '생명정치학' 개념을 발전시켜, 현대 생명과학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권력과 통치성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젠더, 인종, 계급과 어떻게 교차하는지 탐구했다.

결론: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의의와 전망

과학 지식 생산의 변화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과학 지식 생산 방식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여성과 소수자의 과학 분야 참여 확대, 연구 주제와 방법론의 다양화, 젠더 분석의 주류화 등은 페미니스트 비판의 영향을 받은 변화들이다.

예를 들어,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1993년부터 임상 연구에 여성과 소수자를 포함하도록 의무화했으며, 유럽연합의 '지평 2020' 연구 프로그램은 젠더 분석을 연구 설계에 통합하도록 권고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페미니스트 과학 비판이 단순한 이론적 비판을 넘어 실질적 변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과학철학에 대한 기여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과학철학 전반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객관성, 가치중립성, 합리성과 같은 핵심 개념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고, 지식 생산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분석하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또한 과학철학과 과학기술학(STS)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과학의 철학적 분석과 사회학적, 역사적 분석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과학철학이 추상적 인식론을 넘어, 과학의 실제 실천과 그 사회적 맥락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했다.

미래 도전과 가능성

21세기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은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에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을 제시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유전체학, 신경과학, 합성생물학 등 새로운 분야들은 기존의 젠더 규범을 강화할 수도 있고, 이를 변형하고 도전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과제는 이러한 새로운 과학기술이 어떻게 젠더, 인종, 계급 등의 권력 관계와 상호작용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더 포용적이고 정의로운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단순히 과학에서의 젠더 편향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과학, 더 객관적이고 포괄적인 과학을 위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과학이 더 많은 목소리를 포함하고, 더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며, 더 넓은 사회적 책임을 인식할 때 가능해진다.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의 목표는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 시선"이 아니라, "특정한 위치에서의 시선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학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은 객관성과 주관성, 보편성과 특수성,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을 넘어, 보다 풍부하고 복합적인 세계 이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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