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자연의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활동일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구성된 지식 체계일까? 전통적인 과학관은 과학지식이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진실을 점진적으로 밝혀낸다고 본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은 과학지식 역시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번 글에서는 인식론적 대칭성 원칙을 중심으로 사회구성주의의 주요 주장과 과학지식의 사회적 차원을 탐구한다.
과학의 사회학과 지식사회학의 등장
전통적 과학관과 머튼의 과학사회학
과학지식의 사회적 차원에 관한 논의는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의 과학사회학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머튼은 과학을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 바라보고, 과학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규범들을 분석했다. 그가 제시한 과학의 규범적 구조(CUDOS)는 다음과 같다:
- 보편주의(Universalism): 과학적 주장은 인종, 국적, 종교, 계급 등 제안자의 개인적 속성과 무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 공동체주의(Communalism): 과학적 발견은 공동의 소유이며, 비밀로 간직하지 않고 공개되어야 한다.
- 무사무욕(Disinterestedness): 과학자들은 개인적 이득보다 지식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한다.
- 조직화된 회의주의(Organized Skepticism): 모든 과학적 주장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머튼의 접근법은 여전히 과학지식 자체는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사회학의 대상은 과학의 '내용'이 아니라 '맥락'이었다. 즉, 과학지식의 생산 방식과 과학 공동체의 구조에 관심을 두었지만, 과학지식의 내용은 자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에든버러 학파와 강한 프로그램의 등장
1970년대 에든버러 대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과학사회학 흐름이 등장했다. 데이비드 블루어(David Bloor), 배리 반스(Barry Barnes), 도널드 맥켄지(Donald MacKenzie) 등이 주도한 '강한 프로그램'(Strong Programme)은 과학지식의 내용까지도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강한 프로그램은 다음 네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 인과성(Causality): 지식 형성의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원인들을 탐구해야 한다.
- 공평성 또는 대칭성(Impartiality or Symmetry): 참된 믿음이든 거짓된 믿음이든 동일한 유형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
- 반사성(Reflexivity): 과학지식에 적용되는 설명 방식은 사회학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 대칭성(Symmetry): 성공한 과학과 실패한 과학, 참된 이론과 거짓된 이론을 동일한 유형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
특히 '대칭성 원칙'은 강한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전통적 관점이 참된 과학은 '자연이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과학은 '사회적 편향이나 오류 때문에' 설명했다면, 강한 프로그램은 참과 거짓 모두 동일한 유형의 사회적, 문화적 요인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인식론적 대칭성의 원칙
대칭성 원칙의 의미와 함의
인식론적 대칭성 원칙은 과학적 믿음의 참과 거짓, 합리성과 비합리성, 성공과 실패를 동일한 유형의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과학사회학이 어떤 이론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미리 판단하지 않고, 그 이론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수용되는지를 탐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이 수용된 것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이 거부된 것을 설명할 때, 단순히 "뉴턴 역학이 참이기 때문에" 또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이 거짓이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대칭성 원칙에 따르면, 두 이론의 수용과 거부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들을 동등하게 분석해야 한다.
대칭성 원칙은 과학철학에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이는 과학지식이 순수하게 '자연의 발견'이라는 관점에 도전하며, 모든 지식은 특정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구성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또한 과학적 '객관성'의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다.
블루어의 지식사회학
데이비드 블루어는 『지식과 사회적 형상화(Knowledge and Social Imagery)』(1976)에서 강한 프로그램의 이론적 기초를 제시했다. 그는 모든 지식, 심지어 수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분야도 사회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블루어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rule-following) 논의를 활용하여, 과학적 규칙과 방법론은 그 자체로 해석과 적용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적 방법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객관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지식의 사회학이 과학지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형태의 지식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연주의적' 접근으로, 지식 자체를 자연적 현상으로 보고 경험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스와 이익 모델
배리 반스는 과학적 믿음과 이론 선택을 설명하는 데 '이익'(interests) 개념을 도입했다. 그에 따르면, 특정 과학적 믿음이 수용되는 것은 그것이 특정 사회 집단의 이익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널드 맥켄지는 통계학의 발전이 19세기 영국에서 특정 사회 계급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우생학과 통계학의 발전은 당시 지배 계급의 사회적 위계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익 모델'은 과학적 내용의 선택과 해석이 순수하게 인식적 기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이익과 권력 관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실험실 연구와 미시사회학적 접근
라투르와 울가의 실험실 생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은 1970년대 말부터 과학자들의 일상적 실천을 직접 관찰하는 '실험실 연구'로 발전했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와 스티브 울가(Steve Woolgar)는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사회적 구성(Laboratory Life: The Social Construction of Scientific Facts)』(1979)에서 캘리포니아의 한 신경내분비학 실험실에서 2년간의 참여 관찰 결과를 기술했다.
그들은 과학적 '사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미시적으로 관찰했다. 그들에 따르면, 과학적 사실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협상, 설득, 자원 동원의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실험 장비, 기록 방식, 논문 작성, 인용 패턴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라투르와 울가는 과학적 주장이 어떻게 점차 '사실화'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불확실한 가설이나 추측으로 시작된 주장이, 반복된 실험, 동료 평가, 교과서 포함 등을 거치면서 점차 '자명한 사실'로 변모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래의 가설적 성격, 조건부 성격은 지워지고, 마치 처음부터 '자연의 사실'이었던 것처럼 간주된다.
넬과 핀치의 논쟁 연구
해리 콜린스(Harry Collins)와 트레버 핀치(Trevor Pinch)는 『골렘: 모두가 알아야 할 과학과 기술의 내부(The Golem: What Everyone Should Know About Science)』에서 과학적 논쟁 사례들을 분석했다. 그들은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나 실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해석적 유연성'(interpretative flexibility)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에딩턴(Eddington)의 1919년 일식 관측을 분석하면서, 콜린스와 핀치는 관측 결과의 해석에 상당한 주관적 판단과 사회적 요소가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데이터와 이론 사이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고 직접적이지 않으며, 데이터의 의미는 항상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콜린스는 '실험자의 회귀'(experimenter's regress) 문제를 지적했다. 좋은 실험은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산출하는 실험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결과란 좋은 실험에서 나오는 결과라는 순환적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순환을 깨는 것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험 공동체 내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브루노 라투르, 미셸 칼롱(Michel Callon), 존 로(John Law) 등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도구, 기계, 이론, 제도 등) 사이의 네트워크 형성으로 이해한다.
ANT에 따르면, 과학적 사실이나 기술적 혁신의 성공은 다양한 행위자들의 '동원'(mobilization)과 '번역'(translation) 과정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파스퇴르의 백신 개발 성공은 단순히 그의 과학적 천재성이 아니라, 미생물, 실험실 장비, 농부, 정치인, 언론 등 다양한 행위자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능력에 있었다.
라투르는 『실험실에 가기: 과학적 권위의 구성(Science in Action)』(1987)에서 '블랙박스화'(black-boxing) 개념을 소개했다. 일단 과학적 주장이나 기술이 안정화되면, 그것의 내부 작동 방식이나 구성 과정은 불투명한 '블랙박스'로 변한다. 우리는 그저 입력과 출력만 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사회적, 기술적, 과학적 과정은 보이지 않게 된다.
지식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논쟁
과학 전쟁과 소칼 사건
1990년대에는 사회구성주의적 과학 연구와 전통적 과학관 사이에 소위 '과학 전쟁'(Science Wars)이 벌어졌다. 물리학자 앨런 소칼(Alan Sokal)은 1996년 학술지 『소셜 텍스트(Social Text)』에 "경계를 넘어서: 변형적 해석학을 향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이 논문은 포스트모더니즘적 표현과 과학적 용어들을 난해하게 혼합한 패러디였으나, 심사를 통과하여 출판되었다.
소칼은 곧 자신의 논문이 패러디였음을 폭로하며, 이를 통해 과학학 분야의 학문적 엄밀성 부재를 비판했다. 이 사건은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에 대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판자들은 사회구성주의가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부정하는 극단적 상대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많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오해받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들은 과학의 객관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객관성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지를 연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실재론 vs. 구성주의 논쟁
과학철학에서 실재론과 구성주의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과학적 실재론자들은 과학 이론이 관찰 불가능한 실체(전자, 쿼크, 유전자 등)를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점진적으로 발견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구성주의자들은 과학적 개념과 범주가 자연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적, 사회적 실천을 통해 구성된다고 본다.
이언 해킹(Ian Hacking)은 『무엇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가?(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1999)에서 실재론과 구성주의 사이의 중간 입장을 모색했다. 그는 "구성"이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며, 무엇이 구성된다고 말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전자'라는 개념이나 범주는 사회적으로 구성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자 자체가 구성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앤드류 피커링(Andrew Pickering)은 『과학의 망고: 실천과 문화로서의 과학(The Mangle of Practice)』(1995)에서 '실천의 망고'(mangle of practice) 개념을 통해 과학적 지식이 인간 행위자와 물질적 행위자의 상호작용 속에서 창발적으로 생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구성주의를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물질세계의 저항(resistance)과 적응(accommodation)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재구성했다.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상황적 지식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은 사회구성주의의 통찰을 수용하면서도, 특히 젠더와 권력 관계가 지식 생산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s)"(1988) 논문에서 모든 지식은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신체적 위치에서 생산된다고 주장했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과학의 객관성은 '신의 시각'(god's eye view)처럼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 중립적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적 관점들의 비판적 대화에서 나온다. 이는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 개념으로 발전했다.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은 "여성주의자의 질문: 과학에서 권력의 위치(Whose Science? Whose Knowledge?)"(1991)에서 '입장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을 발전시켰다. 이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은 오히려 더 객관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배적 관점의 한계와 편향을 더 잘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주의의 다양한 흐름과 응용
과학기술학(STS)의 발전
과학지식사회학에서 출발한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은 더 넓은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 분야로 발전했다. STS는 과학, 기술, 사회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제적 분야로, 과학사,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기술사, 기술철학 등을 포괄한다.
STS는 과학과 기술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기술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 SCOT) 이론은 기술 발전이 순수하게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집단의, 상이한 이해관계와 해석의 협상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랭던 위너(Langdon Winner)의 "인공물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Do Artifacts Have Politics?)"(1980) 논문은 기술이 특정한 정치적 관계와 권력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뉴욕의 로버트 모세스(Robert Moses)가 설계한 다리들은 버스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낮게 지어져, 대중교통에 의존하는 저소득층(주로 흑인)이 해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지식과 권력: 푸코의 영향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식과 권력에 관한 분석은 과학기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푸코는 지식이 중립적이거나 순수하게 인식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권력 관계와 얽혀 있다고 보았다.
그의 '지식-권력'(power-knowledge) 개념에 따르면, 지식은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이자 권력 관계의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정신의학이나 범죄학과 같은 학문 분야는 단순히 정신 질환이나 범죄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과 생각을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통제하는 권력 장치로 기능한다.
푸코의 '계보학'(genealogy) 방법론은 지식 체계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권력 관계가 작용했는지를 분석한다. 이는 과학지식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연구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민주주의와 전문성의 문제
과학기술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인식은 '기술 민주주의'(technological democracy)나 '참여적 기술 평가'(participatory technology assessment)와 같은 실천적 논의로 이어졌다.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면, 그 구성 과정에 다양한 사회 집단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셰일라 자사노프(Sheila Jasanoff)는 '공동 생산'(co-production) 개념을 통해, 과학기술과 사회질서가 서로를 형성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그녀는 특히 생명공학, 기후변화 등의 분야에서 과학적 지식과 정치적 결정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연구했다.
브라이언 윈(Brian Wynne)은 영국 컴브리아 지역의 양치기들과 방사능 전문가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면서, 전문가 지식과 '일반인' 지식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분석했다. 그는 전문가들이 종종 자신들의 지식의 한계와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일반인들의 '지역적 지식'(local knowledge)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결론: 사회구성주의의 의의와 한계
사회구성주의의 공헌
사회구성주의는 과학철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첫째, 과학지식이 순수하게 자연의 거울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둘째,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이 추상적 기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과학적 실천과 제도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분석했다. 셋째,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를 제공했다.
사회구성주의는 또한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활동에 대한 더 반성적인 이해를 촉구했다. 과학적 실천이 항상 특정한 가치와 관점을 내포한다는 인식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가 갖는 사회적, 윤리적 함의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
비판과 한계
그러나 사회구성주의는 많은 비판도 받았다. 가장 강력한 비판은 극단적 형태의 사회구성주의가 과학의 인식적 권위와 객관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주장이 모두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면, 어떤 주장이 다른 주장보다 '더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진다는 우려다.
폴 보기안(Paul Boghossian)은 『상대주의에 관하여(Fear of Knowledge)』(2006)에서 '구성적 인식론'을 비판하며, 과학적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이라고 주장했다. 구성주의자들 자신의 주장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참'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비판자들은 사회구성주의가 과학적 방법의 실제 성공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과학이 단지 '또 다른 사회적 관행'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예측력과 기술적 응용을 가능하게 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과학의 객관성은 우리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중도적 입장의 모색
최근의 과학철학은 극단적 객관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 사이에서 균형 잡힌 입장을 모색하고 있다. 헬렌 롱기노(Helen Longino)의 '비판적 맥락적 경험주의'(critical contextual empiricism)는 과학의 경험적 기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항상 사회적 맥락 속에서 해석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롱기노에 따르면, 과학적 객관성은 개인의 중립성이 아니라 과학 공동체의 비판적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다양한 관점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검토함으로써, 개인적 편향이 걸러지고 더 객관적인 지식이 생산될 수 있다.
미리엄 솔로몬(Miriam Solomon)은 '사회적 경험주의'(social empiricism)를 통해, 과학적 합의가 형성되는 사회적 과정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이 완전히 자의적이지 않고 경험적 증거에 제약된다고 주장했다.
필립 키처(Philip Kitcher)는 『과학, 진리, 민주주의(Science, Truth, and Democracy)』(2001)에서 '잘 구성된 과학'(well-ordered science) 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과학의 사회적 차원을 인정하면서도, 과학이 공적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과학과 사회: 새로운 관계 모색
사회구성주의는 단순히 과학철학의 학술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과학이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맥락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는 중요한 정치적, 윤리적 질문이 된다.
참여적 과학과 공동 생산
최근에는 '시민 과학'(citizen science), '참여적 연구'(participatory research) 등 과학 지식 생산에 다양한 사회 집단이 참여하는 모델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과학적 전문성과 일반 시민의 지역적 지식이 상호보완적일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또한 '책임있는 연구와 혁신'(Responsible Research and Innovation, RRI) 같은 프레임워크는 과학기술 연구가 사회적 가치와 필요에 부응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을 단순히 분석적 관점이 아니라, 규범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시도다.
후기 진실 시대의 과학적 권위
역설적이게도, 과학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현대 사회에서 '후기 진실'(post-truth)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등장했다. 일부 정치인과 이익 집단은 사회구성주의의 통찰을 왜곡하여, "과학은 단지 또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의 인식적 권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과학의 사회적 차원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지식 주장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는 피해야 한다. 과학적 방법론의 특수성과 신뢰성을 인정하되, 그것이 항상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실행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맺음말: 과학적 지식의 이중성
인식론적 대칭성과 사회구성주의는 과학철학에 도전을 제기하면서도 새로운 통찰을 가져왔다. 과학지식은 자연에 대한 진술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러한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더 풍부하고 현실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과학의 사회적 차원을 인식하는 것은 과학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이 더 책임 있고 반성적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과학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누구의 목소리가 포함되고 배제되는지, 어떤 가치와 이익이 반영되는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더 나은 과학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궁극적으로, 사회구성주의의 통찰은 과학이 순수한 지적 탐구이자 동시에 사회적 실천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 두 측면을 조화롭게 이해할 때, 우리는 과학의 인식적 권위를 존중하면서도 그것이 더 넓은 사회적 맥락과 가치에 부합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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