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87. 마니 풀리테 수사와 제1공화국의 붕괴 - 크락시, 안드레오티 스캔들과 정당 시스템의 완전한 해체

SSSCH 2025. 6. 25.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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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17일 밀라노에서 시작된 한 건의 뇌물 수사는 이탈리아 현대사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깨끗한 손(마니 풀리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수사는 단순한 부패 척결을 넘어서 전후 50년간 지속되어온 이탈리아 정치 시스템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전국을 뒤흔든 이 거대한 정치적 지진은 제1공화국의 종말과 새로운 정치 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마니 풀리테 수사의 시작과 확산

마니 풀리테 수사는 작은 사건에서 출발했다. 밀라노의 한 노인요양원 원장 마리오 키에사가 공공사업 계약과 관련해 7백만 리라의 뇌물을 받다가 체포된 것이 발단이었다. 하지만 이 사소해 보이는 사건은 곧 이탈리아 정치계를 뒤흔드는 거대한 스캔들의 서막에 불과했다.

수사를 주도한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와 그의 동료들은 키에사 사건을 추적하면서 이탈리아 정치와 경제계에 뿌리 깊게 박힌 부패의 실상을 발견했다. 공공사업 발주 과정에서 정치인들과 기업가들 사이에 체계적인 뇌물 수수가 이뤄지고 있었으며, 이는 개별적 일탈이 아닌 구조적 시스템이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탄젠토폴리(뇌물의 도시)'라고 불린 밀라노를 중심으로 부패 네트워크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지하철 건설, 고속도로 건설, 공항 확장 등 대규모 공공사업마다 일정 비율의 뇌물이 정치인들에게 흘러들어갔다. 이른바 '탄젠테(뇌물)' 시스템이 이탈리아 공공 부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밀라노 검찰청은 연일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소환했고, 언론은 매일 새로운 체포 소식을 보도했다. 시민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수갑을 찬 채 호송되는 고위 정치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충격에 빠졌다. 50년간 이탈리아를 지배해온 정치 엘리트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베티노 크락시의 몰락과 사회당의 해체

마니 풀리테 수사의 가장 상징적인 희생양은 베티노 크락시였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총리를 역임하며 이탈리아 정치의 핵심 인물로 군림했던 크락시는 사회당(PSI) 서기장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기독민주당(DC)과 공산당(PCI)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며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마니 풀리테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크락시와 사회당의 부패 실상이 속속 드러났다. 사회당은 공공사업 계약의 일정 비율을 당 자금으로 받아왔으며, 이 과정에서 크락시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밀라노 지하철 2호선 건설 과정에서 수십억 리라의 뇌물이 사회당으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밝혀졌다.

1993년 크락시는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고, 의회에서 면책특권 박탈 투표가 실시되었다. 국회의원들이 그의 체포 동의안에 압도적으로 찬성하면서, 크락시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끝났다. 그는 결국 튀니지로 도피하여 망명 생활을 시작했고, 2000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크락시의 몰락과 함께 이탈리아 사회당도 완전히 해체되었다. 1892년 창당 이래 100년간 이탈리아 좌파 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회당은 마니 풀리테 수사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당 조직은 와해되었으며, 정치적 유산마저 부정되었다.

사회당의 몰락은 단순히 하나의 정당이 사라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전후 이탈리아 정치 시스템의 핵심 축 중 하나가 붕괴하면서, 전체 정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독민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사회당이 사라지면서, 이탈리아 정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했다.

줄리오 안드레오티 스캔들과 기독민주당의 위기

마니 풀리테 수사의 또 다른 핵심 표적은 줄리오 안드레오티였다. '일곱 번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50년간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안드레오티는 전후 이탈리아 정치사의 살아있는 화석이었다. 그는 7차례 총리를 역임했으며, 34차례 장관직을 맡으면서 이탈리아 정치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1993년 안드레오티에 대한 충격적인 혐의가 제기되었다.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계 의혹이었다. 마피아 조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안드레오티는 오랫동안 마피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는 대가로 선거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특히 1979년 마피아 보스 살바토레 리이나와의 비밀 회동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증폭되었다. 증인들은 안드레오티가 마피아 보스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정치적 거래를 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1979년 기독민주당 당수 알도 모로의 납치와 살해에도 안드레오티가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1995년 안드레오티는 마피아 연계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정치사에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전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조직범죄와의 연계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재판은 수년간 지속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안드레오티의 정치적 명성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실추되었다.

안드레오티 스캔들은 기독민주당 전체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당의 최고 지도자가 마피아와 연계되었다는 의혹은 기독민주당의 도덕적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시민들은 50년간 이탈리아를 지배해온 기독민주당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기독민주당의 해체와 정당 시스템 재편

마니 풀리테 수사의 여파로 기독민주당은 존립 자체가 위협받았다.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당 간부들이 줄줄이 체포되거나 사임하면서, 당 조직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1946년 창당 이후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해온 기독민주당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1994년 기독민주당은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48년간 이탈리아 정치의 절대 강자였던 정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기독민주당의 잔존 세력들은 여러 개의 소규모 정당으로 분열했다. 이탈리아 인민당(PPI), 기독민주중도파(CCD), 민주연합(CDU) 등이 기독민주당의 정치적 유산을 놓고 경쟁했다.

기독민주당의 해체는 이탈리아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전후 이탈리아 정치의 양대 축이었던 기독민주당과 공산당이 모두 사라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정당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기존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자유당, 공화당, 사회민주당 등 기존의 소규모 정당들도 마니 풀리테 수사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이들 정당의 지도자들도 부패 혐의로 기소되거나 정치적 신뢰를 잃으면서, 전후 이탈리아 정당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사법부의 역할과 시민 사회의 각성

마니 풀리테 수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사법부의 독립성과 용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를 중심으로 한 밀라노 검찰청 검사들은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추구했다. 이들은 '수영장의 상어들(Squali della Piscina)'이라고 불리며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사법부의 적극적인 수사는 이탈리아 시민 사회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부패한 정치인들의 처벌을 요구했고, 정치 개혁을 촉구했다. '베르벨린게르 광장'에서 열린 시민 집회에는 수십만 명이 참여하여 정치 쇄신을 외쳤다.

언론도 마니 풀리테 수사를 적극 지원했다. 주요 일간지들은 연일 부패 스캔들을 보도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정치인들의 비리를 폭로했다. 특히 라이방송을 통한 실시간 보도는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수갑을 찬 채 호송되는 고위 정치인들의 모습은 이탈리아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시민 사회 단체들도 정치 개혁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반부패 시민단체들이 결성되었고,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는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경제계의 충격과 기업 지배구조 변화

마니 풀리테 수사는 정치계뿐만 아니라 경제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공공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던 기업들도 수사의 표적이 되었다. 건설업, 에너지업, 통신업 등 다양한 분야의 대기업 경영진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특히 ENI(국영석유공사), 에넬(국영전력공사), IRI(국영기업지주회사) 등 대형 국영기업들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들 기업은 정치적 임명을 통해 경영진이 선임되었고, 정치적 고려에 따라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마니 풀리테 수사는 이러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수사의 여파로 많은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혁을 단행했다. 투명성 제고, 내부통제 시스템 강화, 윤리강령 도입 등이 이뤄졌다. 또한 정부는 대규모 민영화를 추진하여 정치와 경제의 유착 고리를 차단하려 했다.

피아트, 올리베티, 몬테디손 등 주요 기업들도 경영진 교체와 구조조정을 겪었다. 이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연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시장 중심적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공산당의 변화와 좌파 재편

마니 풀리테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탈리아 공산당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로 인해 이념적 기반이 흔들린 공산당은 1991년 해산을 결정했다. 당명을 '좌파민주당(PDS)'으로 바꾸고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공산당의 변화는 마니 풀리테 수사와 절묘하게 맞물렸다. 기존 정치 엘리트들이 부패 스캔들로 몰락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했던 구 공산당 세력들이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얻었다. 좌파민주당은 마니 풀리테 수사를 적극 지지하며 정치 개혁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공산당 내부에서도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온건 개혁파가 좌파민주당을 결성한 반면, 강경파는 '공산재건당(RC)'을 창당하여 기존 공산주의 노선을 고수했다. 이는 이탈리아 좌파의 분열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정치적 다원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좌파 정치의 재편은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으로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노동조합들도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를 모색해야 했다. 이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독립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적 반향과 유럽 통합에 미친 영향

마니 풀리테 수사는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처럼 대규모의 정치 부패가 폭로된 것은 전례가 없었다. 외국 언론들은 이탈리아의 정치 혼란을 연일 보도했고, 이탈리아의 국가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다.

특히 유럽 통합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신뢰도가 크게 손상되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 이행을 위한 경제 개혁이 시급한 상황에서, 정치적 불안정은 심각한 장애요인이었다. 유럽연합 파트너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역량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마니 풀리테 수사는 동시에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자정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사법부의 독립성과 언론의 자유, 시민 사회의 역동성이 부패한 정치 시스템을 변화시킨 것은 민주주의의 승리로 평가받았다.

국제 투자자들은 초기에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했지만, 점차 개혁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어지고 투명성이 제고되면서, 장기적으로는 투자 환경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새로운 정치 질서를 향한 전환

마니 풀리테 수사의 결과로 이탈리아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기존 정당들이 모두 해체되거나 크게 약화되면서,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다. 이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였다.

1993년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들과 새로운 정치 세력들이 약진했다. 로마 시장에는 무소속의 프란체스코 루텔리가, 나폴리 시장에는 좌파민주당의 안토니오 바시솔리노가 당선되었다. 이는 시민들이 기존 정치 엘리트를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는 신호였다.

국민투표를 통한 선거제도 개혁 논의도 활발해졌다. 기존의 비례대표제가 정치 부패를 조장했다는 비판에 따라, 소선거구제 도입을 통한 정치 시스템 개혁이 추진되었다. 1993년 국민투표에서 82.7%의 압도적 찬성으로 선거제도 개혁이 승인되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도 예고되었다. 기존 정치에 실망한 시민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었다. 이는 곧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결론

마니 풀리테 수사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50년간 지속되어온 제1공화국 정치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이탈리아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크락시, 안드레오티로 대표되는 기존 정치 엘리트들의 몰락은 단순히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전체 정치 시스템의 실패를 상징했다. 정당들의 해체와 재편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이탈리아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정화하고 갱신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시민 사회의 각성과 사법부의 독립성, 언론의 역할은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었다. 비록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이 뒤따랐지만, 마니 풀리테 수사는 이탈리아가 더 투명하고 책임감 있는 정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제1공화국의 종말은 곧 제2공화국의 시작을 의미했으며, 이는 이탈리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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