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33. 이탈리아 왕국의 독신시대와 대공작 시대 - 베렝가리오 정쟁과 카롤링 제국 분열 이후의 혼란

SSSCH 2025. 5. 2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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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의 사후 그의 거대한 제국은 급속히 분열되기 시작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제국이 삼분되면서 이탈리아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혼란의 시작이었다.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는 왕위를 두고 벌어지는 끊임없는 내전과 외침으로 극심한 혼돈을 겪었다. 이 시기는 '독신시대(Periodo anarchico)'와 '대공작 시대'로 불리며, 이탈리아 중세사의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된다.

카롤링 제국의 분열과 이탈리아의 지위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루이 경건왕이 제위를 이었지만, 제국의 통일성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이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계승 분쟁은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귀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제국은 서프랑크(현재의 프랑스), 동프랑크(현재의 독일), 그리고 중프랑크로 나뉘었고, 이탈리아는 중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중프랑크 왕국을 받은 로타르 1세는 황제 칭호도 함께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의 영토는 이탈리아에서 로렌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효과적인 통치가 어려웠다.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다시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는데, 이때 이탈리아는 루이 2세가 차지했다.

루이 2세는 이탈리아 왕이자 황제로서 상당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사라센의 침입에 맞서 남부 이탈리아를 방어했고, 교황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875년 그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이탈리아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는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루이 2세의 사후 서프랑크 왕 대머리 카를이 이탈리아 왕위를 차지했지만,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877년 그가 죽자 이탈리아 귀족들은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가 이탈리아 왕위를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분쟁이 시작되었다.

베렝가리오 1세와 이탈리아 왕위 분쟁의 시작

베렝가리오 1세는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자로, 프리울리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귀족이었다. 888년 동프랑크의 카를 3세가 폐위되자, 이탈리아 귀족들은 베렝가리오를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그의 왕위는 처음부터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탈리아 내의 다른 강력한 귀족들이 각기 다른 후보를 지지했고, 외국 세력들도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렝가리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부르군트 왕 기도였다. 889년 기도는 이탈리아 북서부 귀족들의 초청을 받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이는 외국 세력이 이탈리아 왕위에 개입한 첫 번째 사례로, 이후 수십 년간 계속될 패턴의 시작이었다. 베렝가리오와 기도 사이의 전쟁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892년 기도가 갑작스럽게 죽자 베렝가리오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위협이 나타났다. 헝가리족(마자르족)의 침입이 시작된 것이다. 899년과 900년 연이어 벌어진 헝가리족의 대규모 침입은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황폐화시켰다. 베렝가리오는 이들과의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고, 이로 인해 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헝가리족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베렝가리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자, 이탈리아 귀족들은 다시 외부 세력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프로방스 왕 루이가 선택되었다. 900년 루이는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베렝가리오는 일시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이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했다. 905년 베로나에서 벌어진 정치적 음모로 루이가 실명당하자, 베렝가리오가 다시 권력을 회복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탈리아 왕권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보여준다. 왕위는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강력한 중앙 권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각 지역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왕을 지지하거나 배신했고, 외국 세력의 개입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독신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영향

'독신시대(Periodo anarchico)'라는 명칭이 붙은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문자 그대로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다.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각 지역의 강력한 귀족들이 사실상 독립된 영주로 행세했다. 이들은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 시기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는 토스카나 후작 아달베르토 가문이었다. 그들은 토스카나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스폴레토 공작과 베네벤토 공작들도 중앙 정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인 정치체로 기능했다.

북부 지역에서는 밀라노, 파비아, 베로나 등의 도시들이 점차 자치권을 확대해 나갔다. 왕권이 약화되면서 이들 도시의 주교들과 시민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통치해야 했다. 이는 후에 이탈리아 코무네 운동의 원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 경제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중앙 정부의 붕괴로 인해 화폐 경제가 크게 위축되었고, 지역적인 물물교환이 늘어났다. 교역로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아 상업 활동이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지역 자치의 발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농업 분야에서는 대토지 소유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강력한 귀족들은 혼란을 틈타 더 많은 토지를 장악했고, 자유 농민들은 점차 농노 신분으로 전락했다. 이는 이탈리아에 봉건제가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대공작 시대와 지역 세력의 부상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는 소위 '대공작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는 강력한 지역 귀족들이 공작이나 후작의 지위를 얻어 사실상 독립된 영주로 군림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이들 대공작들은 왕을 추대하거나 폐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이브레아 후작 아르두이노였다. 그는 1002년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여 하인리히 2세의 침입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패배했지만, 그의 저항은 이탈리아 민족 의식의 발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르두이노는 외국 지배에 맞선 첫 번째 이탈리아 민족적 영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토스카나 지역에서는 후작 우고 가문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우고는 931년부터 946년까지 이탈리아 왕으로 재위했는데, 그는 지중해 세계와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특히 그의 통치 하에서 피사와 제노바 같은 해상 도시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베네벤토, 살레르노, 카푸아 등의 롱고바르드 공국들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잔틴 제국과 사라센 세력 사이에서 교묘한 균형 외교를 펼치며 독립을 유지했다. 특히 베네벤토 공국은 10세기 내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가장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여성 통치자들의 등장이었다. 로마에서는 테오필락투스 가문의 여성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특히 마로치아와 그의 딸 알베리카는 교황 선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시대는 '포르노크라치아(Pornocracy)', 즉 '창녀 정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후대의 편견이 담긴 표현이고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능한 여성들이었다.

외침과 방어: 헝가리족과 사라센의 침입

10세기 이탈리아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외침이었다. 헝가리족(마자르족)은 북쪽에서, 사라센은 남쪽에서 이탈리아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이러한 외침은 이미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정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헝가리족의 침입은 899년부터 시작되어 거의 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들은 기병 중심의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북부 평원을 종횡무진 누볐다. 특히 924년과 942년의 대규모 침입은 롬바르디아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베렝가리오 1세는 이들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고, 심지어 헝가리족에게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헝가리족의 침입은 단순한 약탈을 넘어서 이탈리아의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도시들이 파괴되면서 인구가 더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했고, 이는 새로운 정착지의 형성을 가져왔다. 또한 방어의 필요성 때문에 지역 귀족들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남부와 시칠리아에서는 사라센의 위협이 지속되었다. 827년부터 시작된 사라센의 시칠리아 정복은 902년 타오르미나 함락으로 완료되었다. 이후 사라센들은 시칠리아를 기지로 삼아 이탈리아 본토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846년에는 로마까지 침입하여 성베드로 대성당을 약탈하는 충격적인 사건도 벌어졌다.

사라센의 침입에 대응하여 교황청과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해군력 강화에 나섰다. 아말피, 나폴리, 가에타 등의 해상 도시들이 이 시기에 크게 성장한 것도 사라센 방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은 때로는 사라센과 싸우고, 때로는 교역하는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경제적 변화와 도시의 성장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경제는 완전히 정체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나타났다. 특히 해상 도시들의 성장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지중해 교역에서 이탈리아가 차지하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베네치아는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명목상으로는 비잔틴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해상 공화국으로 발전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중개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또한 헝가리족의 침입에도 라군의 특성상 안전했기 때문에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아말피도 중요한 해상 세력으로 부상했다. 아말피 상인들은 지중해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말피에서 만들어진 해상법(Tavole Amalfitane)은 중세 지중해 교역의 기준이 되었다.

북부 내륙 지역에서도 일부 도시들이 성장했다. 밀라노는 알프스 교역로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을 유지했고, 파비아는 여전히 롬바르디아 지역의 중심 도시 역할을 했다. 이들 도시에서는 수공업도 발달했는데, 특히 직물업과 금속 가공업이 주목할 만했다.

농업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계속되었다. 수도원들이 농업 혁신의 중심 역할을 했는데, 특히 시토 수도회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황무지 개간과 새로운 농법 보급에 앞장섰다.

종교와 문화의 변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종교와 문화 분야에서는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특히 교회 개혁 운동이 시작되어 후에 그레고리우스 개혁으로 이어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수도원들은 유럽 전체의 종교 개혁을 주도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이 이탈리아에도 전파되었다. 이 운동은 수도원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원래의 베네딕투스 규칙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특히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이러한 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교황청도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10세기 초 교황청은 로마 귀족들의 영향 하에 있었지만, 점차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교황 요한 12세 시대의 스캔들들은 교회 개혁의 급박함을 보여주었다.

문화 분야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달이 주목할 만하다.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에서는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발달했다. 롬바르디아의 산 암브로지오 성당, 토스카나의 산 미니아토 성당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다.

문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라틴어 문학 외에 속어(volgare) 문학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록 아직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이는 후에 이탈리아 문학의 황금기를 여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오토 1세의 침입과 신성로마제국의 부활

이탈리아의 혼란은 10세기 중반 독일 오토 1세의 침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951년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 베렝가리오 2세의 무력 통치에 반발한 이탈리아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 알프스를 넘어왔다. 이는 이탈리아사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오토 1세의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베렝가리오 2세를 물리치고 스스로 이탈리아 왕을 칭했다. 또한 전 이탈리아 왕 로타리오의 미망인 아델라이데와 결혼하여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황제 대관식을 받지 않았다.

결정적인 변화는 962년에 일어났다. 교황 요한 12세가 베렝가리오 2세의 압박을 받자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오토는 다시 이탈리아로 남하했다. 962년 2월 2일, 교황 요한 12세는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오토 1세에게 황제관을 씌워주었다. 이로써 800년 카롤루스 대제 이후 공석이었던 서로마 황제 지위가 부활했고, 이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었다.

오토 1세의 황제 즉위는 이탈리아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우선 거의 한 세기 동안 계속된 정치적 혼란이 일단락되었다. 강력한 외부 권력의 개입으로 인해 지역 귀족들 간의 분쟁이 억제되었고, 어느 정도의 질서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이탈리아가 독일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후 수백 년간 이탈리아는 독일 황제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통일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결론

9세기 말부터 10세기 중반까지의 이탈리아 독신시대와 대공작 시대는 혼란과 분열의 시기였지만, 동시에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 시기의 정치적 분열은 역설적으로 지역 자치의 발달을 촉진했고, 이는 후에 이탈리아 코무네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베렝가리오 정쟁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정치적 혼란은 중앙 권력의 취약성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이탈리아 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도 드러냈다. 각 지역이 서로 다른 발전 경로를 걸으면서 이탈리아 특유의 지역적 다양성이 더욱 뚜렷해졌다.

경제적으로는 해상 도시들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베네치아, 아말피, 피사, 제노바 등이 이 시기에 기초를 다져 후에 중세 지중해 교역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는 이탈리아가 유럽과 지중해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종교와 문화 분야에서는 교회 개혁 운동의 씨앗이 뿌려졌고, 로마네스크 예술이 발달했다. 이는 후에 이탈리아가 중세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오토 1세의 신성로마제국 부활은 이탈리아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외국 지배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후 이탈리아는 독일 황제권과 교황권 사이에서 복잡한 정치적 게임을 벌여야 했고, 이는 중세 이탈리아사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독신시대의 혼란은 끝났지만, 이탈리아의 정치적 복잡성은 오히려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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