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이탈리아 역사 34. 도시 자치(코무네) 운동과 롬바르드 동맹의 성장 - 파비아 칙령과 겔프·기벨린 대립의 시작

SSSCH 2025. 5. 28.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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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와 12세기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혁명적 변화의 시대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중앙 집권적 통치에 맞서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며 일어선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코무네(comune) 운동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독특하고 혁신적인 정치 실험이었으며, 이는 후에 근대 민주주의의 선구적 형태로 평가받는다. 특히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롬바르드 동맹 간의 대립은 교황권과 황제권의 갈등과 맞물려 중세 이탈리아 정치의 기본 구조를 형성했다.

코무네 운동의 등장 배경

코무네 운동의 등장은 11세기 이탈리아의 경제적,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0세기 말부터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들이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원은 비옥한 토지와 편리한 교통로 덕분에 상업과 수공업이 급속히 발달했다.

밀라노,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등의 도시들은 지중해와 북유럽을 연결하는 중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동 무대는 더욱 넓어졌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은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을 가져왔는데, 바로 상인과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시민 계층이었다.

이들 새로운 시민 계층은 기존의 봉건적 질서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혈통보다는 능력이, 토지 소유보다는 상업적 성공이 더 중요했다. 또한 자유로운 교역과 안전한 재산권 보장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정치 질서가 필요했다. 하지만 기존의 봉건 영주들과 황제의 관리들은 이러한 새로운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종교적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세기에 시작된 그레고리우스 개혁은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영성의 회복을 주장했다. 이러한 개혁 정신은 시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기존 권위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자치 의식을 키웠다. 특히 파타리아(Pataria) 운동 같은 시민 주도의 종교 개혁 운동은 코무네 운동의 직접적인 전조가 되었다.

초기 코무네의 성립과 특징

최초의 코무네는 11세기 후반 북부 이탈리아에서 등장했다. 1081년 루카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초기 코무네는 모두 비슷한 패턴을 보였는데, 도시의 유력한 시민들이 모여 '코무네'라는 이름으로 동맹을 결성하고 공동으로 도시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코무네의 핵심은 '콘술(consul)' 제도였다. 로마 공화정의 콘술에서 이름을 따온 이 직책은 선거로 선출되었고, 보통 2명 이상이 공동으로 집정했다. 임기는 1년으로 제한되어 권력의 집중을 막았다. 콘술들은 행정, 사법, 군사 업무를 담당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시민 총회나 원로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밀라노는 초기 코무네의 대표적인 사례다. 1097년 밀라노 시민들은 대주교의 권위에 맞서 자체적인 콘술을 선출했다. 이들은 도시의 방어와 치안, 상업 규제, 세금 징수 등을 담당했다. 특히 밀라노는 주변 농촌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실질적인 도시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피렌체도 12세기 초에 코무네를 형성했다. 피렌체의 코무네는 처음에는 귀족들이 주도했지만, 점차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길드(arte)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코무네 내부의 민주적 발전을 보여주는 사례다.

제노바와 피사는 해상 공화국으로 발전하면서 독특한 형태의 코무네를 만들었다. 이들은 해외 교역을 바탕으로 한 상업 공화국의 성격을 가졌으며, 외교와 군사에서도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했다.

황제권과 코무네의 갈등

코무네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황제권과의 충돌을 불러왔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직할령으로 여겼고, 코무네의 자치권 주장을 반역으로 간주했다. 특히 하인리히 4세와 5세 시대에는 서임권 투쟁으로 인해 황제권이 약화되어 코무네들이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152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는 강력한 황제권 복원을 목표로 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나오는 세수가 제국 운영에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서는 코무네들의 자치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154년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에서 그는 코무네들에게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1158년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롱카글리아(Roncaglia)에서 제국의회를 열고 파비아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황제권의 우위를 명확히 하고 코무네들의 자치권을 대폭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각 도시에 포데스타(podestà)라는 황제 대리인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파비아 칙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모든 도시의 통치권은 황제에게서 나온다. 둘째, 도시의 요새화와 군대 보유는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셋째, 교역과 관련된 세금 징수권은 황제가 독점한다. 넷째, 도시 간 동맹 결성은 금지된다. 이는 사실상 코무네 제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밀라노는 파비아 칙령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다. 1159년 밀라노 시민들은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고 저항을 선언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61년과 1162년 두 차례에 걸쳐 밀라노를 포위 공격했고, 결국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추방했다. 이는 코무네 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다른 도시들의 연대 의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롬바르드 동맹의 결성과 발전

밀라노의 파괴는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에게 황제권의 위험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각 도시는 혼자서는 황제의 압력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는 도시 간 연합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1167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비밀 회의에서 16개 도시가 참가하여 롬바르드 동맹(Lega Lombarda)을 결성했다.

롭바르드 동맹의 창립 멤버는 밀라노(재건 후), 크레모나, 만토바, 베르가모, 브레시아,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 트레비소, 베네치아, 페라라, 볼로냐, 파르마, 피아첸차, 모데나, 리미니였다. 이들은 공동 방어와 황제권에 대한 저항을 목표로 했다. 특히 알레산드리아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교황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따라 명명함으로써 교황청과의 연대를 표시했다.

동맹의 조직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각 도시는 일정한 병력과 자금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고, 공동 사령관(rector)이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또한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공동 정책을 결정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보기 드문 공화제적 연맹 체제였다.

롬바르드 동맹의 가장 큰 성과는 1176년 레냐노 전투에서의 승리였다.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제국군을 상대로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밀라노의 카로치오(carroccio, 전차에 실은 도시의 깃발)를 중심으로 한 시민군이 황제의 기사단을 물리쳤다. 이는 봉건적 기사 계급에 대한 시민 계급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레냐노 전투의 승리는 1183년 코스탄차 평화조약으로 이어졌다. 이 조약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롬바르드 동맹의 존재를 인정하고 코무네들의 자치권을 보장했다. 다만 명목상의 황제 주권은 인정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는 코무네 운동의 역사적 승리였다.

겔프와 기벨린 대립의 시작

롬바르드 동맹과 황제권의 갈등 과정에서 이탈리아 정치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겔프(Guelfo)와 기벨린(Ghibellino)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원래 이 용어들은 독일에서 벨프(Welf) 가문과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가문 간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교황파와 황제파를 가리키는 용어로 변화했다.

겔프는 교황을 지지하고 황제권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 계층과 교회 개혁을 지지하는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겔프의 중심 도시는 밀라노, 볼로냐, 피렌체 등이었다. 이들은 코무네의 자치권을 확대하고 교황의 영적 권위를 존중한다는 입장이었다.

기벨린은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주로 전통적인 봉건 귀족과 황제로부터 특권을 받은 도시들로 구성되었다. 기벨린의 대표적인 도시는 파비아, 크레모나, 피사 등이었다. 이들은 질서와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겔프와 기벨린의 대립은 단순한 교황파와 황제파의 갈등을 넘어서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는 각 도시나 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피사는 해상 교역에서 제노바와 경쟁하기 위해 황제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벨린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은 이탈리아 도시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같은 롬바르드 동맹에 속해 있으면서도 겔프와 기벨린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통합을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코무네 내부의 사회 구조와 정치 발전

코무네는 단순한 도시 자치 단체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가진 정치 공동체였다. 초기에는 주로 귀족(nobili)과 시민(popolo)으로 구성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세분화되었다. 귀족은 주로 토지를 소유한 기사 계급이었고, 시민은 상인과 수공업자로 구성되었다.

12세기 후반부터는 길드(corporazioni 또는 arti) 제도가 발달했다. 각 직업별로 조직된 길드는 단순한 동업자 조합을 넘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었다. 특히 피렌체에서는 주요 길드(arti maggiori)와 소길드(arti minori)로 나뉘어 복잡한 권력 구조를 형성했다.

길드의 발달은 코무네 정치의 민주화를 촉진했다. 상인 길드, 모직업 길드, 은행업 길드 등이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면서 기존 귀족 중심의 정치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13세기에는 많은 코무네에서 '포폴로(popolo)' 운동이 일어나 시민 계층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었다.

콘술 제도도 점차 발전했다. 초기의 콘술은 주로 귀족 출신이었지만, 점차 상인과 법학자들도 선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외부에서 중립적인 포데스타를 초청하여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도 도입되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 원리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사법 제도에서도 혁신이 있었다. 로마법의 재발견과 볼로냐 대학의 법학 연구가 결합되어 새로운 법체계가 발달했다. 코무네들은 자체적인 법령(statuto)을 제정했는데, 이는 봉건법과는 다른 상업법적 성격을 가졌다.

경제적 기반과 상업 혁명

코무네 운동의 성공은 강력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12세기는 유럽 경제사에서 '상업 혁명'의 시대로 불리는데, 이탈리아 도시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동방 교역의 확대, 농업 생산력의 증가, 화폐 경제의 발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베네치아는 동방 무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립했다. 1082년 비잔틴 제국과 맺은 통상 협정으로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지중해에서 거의 모든 특권을 누렸다. 십자군 전쟁 중에는 십자군에게 수송 서비스를 제공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제노바와 피사는 서지중해와 북아프리카 무역에서 경쟁했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을 통해 향료, 비단, 보석 등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특히 제노바는 흑해까지 진출하여 동방 교역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다.

내륙 도시들도 제조업과 금융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밀라노는 무기와 갑옷 제조의 중심지였고, 피렌체는 모직물 가공으로 유명했다. 또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은행업의 선구자가 되어 유럽 전역에 지점을 설치했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은 새로운 사회 계층의 등장을 가져왔다. 전통적인 농업 귀족과는 다른 상업 귀족이 나타났고, 이들은 정치권력에도 도전했다. 또한 숙련된 수공업자들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중간 계층을 형성했다.

문화와 교육의 발전

코무네 운동은 문화와 교육 분야에서도 혁신을 가져왔다. 도시의 부와 자치 의식은 새로운 문화적 요구를 만들어냈고, 이는 학문과 예술의 발달로 이어졌다. 특히 법학과 신학 연구에서 큰 발전이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1088년 설립되어 유럽 최초의 대학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로마법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이르네리우스와 그의 제자들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주석한 작업은 중세 법학의 기초가 되었다. 볼로냐에서 배출된 법학자들은 코무네의 자치권 이론을 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살레르노 의학교가 유명했다. 이곳은 그리스, 아랍, 라틴의 의학 전통을 종합하여 새로운 의학 체계를 만들어냈다. 특히 해부학과 외과학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건축과 예술에서는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코무네들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웅장한 두오모(대성당)와 팔라초 델 코무네(시청)을 건설했다. 밀라노 두오모, 피사 두오모, 모데나 두오모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문학에서는 속어(volgare) 문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라틴어 대신 일상 언어로 쓰인 작품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후에 단테의 『신곡』으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문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무네 제도의 확산과 변화

롬바르드 동맹의 성공은 코무네 제도를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역과 움브리아 지역에서도 유사한 코무네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도 일부 도시에서 자치 운동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 코무네의 형태는 다양하게 발전했다. 북부의 상업 도시들은 공화정적 성격이 강했지만, 중부의 일부 도시들은 영주제적 요소를 유지했다. 또한 해상 도시들은 독특한 공화국 체제를 발달시켰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코무네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계급 갈등이 심화되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증가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코무네에서 시뇨리아(signoria)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강력한 개인이나 가문에게 일정 기간 독재권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시뇨리아 제도의 도입은 코무네 민주주의의 쇠퇴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안정과 효율성을 가져오기도 했다.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 베로나의 스칼라 가문,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등이 이러한 시뇨리아를 발달시켰다.

결론

11세기와 12세기의 코무네 운동과 롬바르드 동맹의 성장은 이탈리아사뿐만 아니라 유럽사 전체에 큰 의미를 가진다. 이는 봉건제 사회에서 시민 사회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으며, 근대 민주주의의 선구적 형태로 평가받는다.

코무네 운동의 성공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경제적 번영, 교육과 문화의 발달, 종교 개혁의 영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자치 의식이 결합되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파비아 칙령에 맞선 저항과 롬바르드 동맹의 결성은 이러한 시민 의식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겔프와 기벨린의 대립은 이탈리아 정치사의 기본 구조를 형성했다. 이는 단순한 교황파와 황제파의 갈등을 넘어서 이탈리아 도시들 간의 복잡한 경쟁 관계를 반영했다. 이러한 분열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통합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발달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코무네 제도는 중세 이탈리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로 발전할 때, 이탈리아는 도시 공화국들의 연합체 형태를 유지했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다양성과 혁신의 원동력이 되어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문화적 꽃을 피우는 토양이 되었다. 코무네 운동은 이탈리아인들의 자유와 자치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는 소중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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