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 에드워드 6세의 등장
1547년 1월, 헨리 8세가 사망하고 그의 9세 아들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6세로 즉위했다. 어린 왕은 지적이고 학구적이었지만, 실제 통치는 섭정 위원회와 그의 외삼촌 에드워드 시모어(서머셋 공작)에게 맡겨졌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영국 왕국의 호군공'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사실상 영국을 통치했다.
에드워드 6세 시대는 영국 종교개혁이 급격히 가속화된 시기였다. 헨리 8세가 조직적인 측면에서 로마 교회와 결별했다면, 에드워드 통치 시기에는 교리와 예배 형식까지 개신교적으로 변화했다. 이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였다.
크랜머와 급진적 종교개혁
토마스 크랜머는 에드워드 시대에 영국 교회의 교리와 예배를 개신교화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549년에는 최초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편찬했다. 이 책은 영어로 된 통일된 예배 형식을 제공했으며, 가톨릭적 요소를 줄이고 개신교적 신학을 반영했다.
1552년에는 더 급진적인 제2판 공동기도서가 발행되었다. 이 판에서는 가톨릭의 미사 개념이 사실상 폐지되고, 성찬식이 단순한 기념 의식으로 변화했다. 또한 '42개 신조'가 발표되어 영국 교회의 공식 교리가 되었는데, 이는 후에 '39개 신조'로 수정되어 오늘날까지 영국 국교회의 기본 교리로 남아있다.
사회적 혼란과 반발
급격한 종교 변화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많은 지역에서 전통적인 가톨릭 의식을 선호하는 민중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1549년에는 콘월과 데번 지역에서 '기도서 반란'이 일어났고, 같은 해 '노퍽 반란'은 경제적 불만과 종교적 변화에 대한 저항이 결합된 형태였다.
서머셋 공작은 이러한 반란들을 진압했지만, 경제 정책의 실패와 정치적 라이벌인 존 더들리(노섬벌랜드 백작)의 부상으로 1549년 실각했다. 그 후 노섬벌랜드 백작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더욱 급진적인 개신교 정책을 추진했다.
에드워드의 죽음과 계승 위기
에드워드 6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1553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왕위 계승 위기를 초래했다. 헨리 8세의 유언에 따르면 다음 계승자는 메리(캐서린 오브 아라곤의 딸)였지만, 개신교인 노섬벌랜드는 가톨릭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 종교개혁이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에드워드를 설득해 왕위 계승 순서를 바꾸는 유언장을 작성하게 했다. 이 유언장은 헨리 8세의 두 딸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배제하고, 대신 헨리의 여동생인 서퍽 공작 부인의 후손인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제인은 노섬벌랜드의 아들과 결혼한 상태였다.
9일의 여왕, 제인 그레이
에드워드 사망 후, 16세의 제인 그레이가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단 9일에 불과했다. 메리는 신속하게 지지자들을 모았고, 영국 귀족과 민중 대부분이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로 메리를 지지했다. 노섬벌랜드는 체포되었고, 제인 그레이도 폐위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인들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보여준다. 비록 메리가 가톨릭이었지만, 그녀는 헨리 8세의 장녀로서 정당한 계승권을 가졌다고 여겨졌다.
메리 1세와 가톨릭 복원
1553년, 37세의 메리 1세가 영국의 첫 여성 군주로 즉위했다. 그녀의 주요 목표는 영국을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메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 캐서린 오브 아라곤의 이혼 과정에서 겪은 고통이 그녀의 종교적 신념을 더욱 강화했다.
메리는 의회를 통해 에드워드 시대의 종교 개혁을 무효화하고, 헨리 8세 시대 이전의 가톨릭 교회 상태로 되돌리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1554년에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의 권위 아래 돌아갔다. 라틴어 미사가 부활하고, 가톨릭 성직자들이 복직했다.
스페인과의 동맹과 필립 2세와의 결혼
메리의 또 다른 주요 정책은 스페인과의 동맹 강화였다. 그녀는 1554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영국 내에서 큰 반발을 샀는데, 많은 영국인들은 강력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했다. 의회는 필립이 영국의 내정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조항을 결혼 조약에 삽입했다.
메리는 필립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녀가 임신했다고 믿었던 것은 사실 종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그녀는 후계자 없이 사망하게 된다.
개신교도 박해와 '피의 메리'
메리 1세 시대의 가장 논란이 되는 측면은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다. 그녀는 이전 왕들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거나 실행했던 이들을 반역자로 간주했다. 1555년부터 1558년까지 약 300명의 개신교도들이 이단으로 화형당했는데, 그 중에는 토마스 크랜머와 같은 고위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박해는 메리에게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러한 박해가 당시 유럽의 종교 갈등 상황에서는 예외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 모두 종교적 반대자들을 잔인하게 처벌했던 시대였다.
칼레 상실과 메리의 죽음
메리의 통치 마지막 해인 1558년, 영국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영토인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겼다. 칼레는 200년 넘게 영국이 보유했던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고, 그 상실은 국가적 수치로 여겨졌다. 메리는 "내 심장을 열어보면 그 안에 '칼레'라고 쓰여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558년 11월, 메리는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고,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메리의 짧은 통치는 영국을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마지막 시도였으나, 그녀의 사망과 함께 이러한 시도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결론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 시대는 영국 역사에서 종교적 극단이 번갈아 가며 나타난 시기였다. 에드워드 치하에서는 급진적 개신교 개혁이 추진되었고, 메리 통치 시기에는 가톨릭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급격한
종교적 변화는 사회 전반에 혼란과 불안을 야기했다.
두 통치자의 시대는 모두 짧았지만, 영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메리 시대의 개신교도 박해는 영국인들의 집단 기억에 오래 남았고, 이후 영국의 종교 정책과 대외 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극단적인 종교 갈등은 후에 엘리자베스 1세가 더 중도적인 종교 노선을 채택하는 배경이 되었고, 결국 영국 국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History > Europ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 역사 34. 동인도회사 설립과 초기 식민지 개척의 시작 (1) | 2025.05.22 |
---|---|
영국 역사 33. 엘리자베스 1세와 영국 르네상스의 황금시대 (0) | 2025.05.22 |
영국 역사 31. 헨리 8세의 종교개혁과 영국 국교회의 탄생 (0) | 2025.05.22 |
영국 역사 30. 튜더 왕조의 개창과 헨리 7세의 통치 (0) | 2025.05.22 |
영국 역사 29. 요크 가문의 승리와 리처드 3세의 비극적 결말 (0) | 2025.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