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Europe

영국 역사 2. 청동기·철기 시대 켈트 사회 - 드루이드와 부족 문화의 형성

SSSCH 2025. 5. 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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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 섬의 역사는 청동기 시대 후기부터 켈트인들의 이주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켈트족은 브리튼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독특한 문화와 사회 체계를 형성했다. 그들이 가져온 철기 기술과 함께 종교적, 정치적으로 복잡한 사회 구조가 발달했으며, 이는 후대 브리튼 문화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켈트인의 도래와 확산

켈트인들은 단일 민족이라기보다 유사한 언어, 예술, 종교적 관행을 공유한 다양한 부족들의 집합체였다.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브리튼에 도착했는데, 특히 기원전 450년경에는 대규모 이주가 있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들은 '라 테네(La Tène)' 문화를 가져왔다. 정교한 금속 세공술과 소용돌이 무늬 장식이 특징인 이 문화 양식은 브리튼 전역에서 발견된다.

켈트인들은 처음에는 주로 남동부 지역에 정착했지만, 점차 북쪽과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들은 기존 주민들을 정복하거나 동화시키며 브리튼 전역에 켈트 문화를 퍼뜨렸다. 기원전 1세기경에 이르면 브리튼 대부분 지역이 다양한 켈트 부족들의 영토로 나뉘어져 있었다.

부족 사회와 정치 구조

켈트 사회는 다양한 부족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족은 자체적인 영토와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주요 부족으로는 남동부의 트리노반테스와 카투벨라우니, 남서부의 두로트리게스, 중부의 코리타니, 북부의 브리간테스 등이 있었다.

부족 내에서는 계층 구조가 뚜렷했다. 최상층에는 왕 또는 부족장이 있었고, 그 아래 귀족 계층과 전사 집단이 있었다. 일반 평민들은 농업, 목축, 수공업에 종사했으며, 노예 계층도 존재했다. 부와 권력은 주로 가축(특히 소)의 소유와 전쟁에서의 명성을 통해 얻어졌다.

켈트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다른 고대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 여성들은 재산을 소유하고 상속할 권리가 있었으며, 때로는 부족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부디카 여왕은 그 대표적인 예로, 후에 로마에 대항하여 큰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힐포트와 방어 체계

켈트인들은 전략적 위치에 '힐포트(Hill fort)'라 불리는 요새화된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는 높은 언덕 위에 여러 겹의 해자와 흙둑으로 둘러싸인 방어 구조물로, 유사시에는 주변 주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영국 전역에는 3,000개 이상의 힐포트 유적이 남아있으며, 메이든 캐슬, 올드 세럼, 도버리 등이 잘 알려진 예다.

힐포트는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부족의 권력과 위세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고, 수공업 생산과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부족 내 분쟁을 해결하는 정치적 중심지 역할도 했다.

철기 시대 후기에 이르면, 일부 힐포트는 '오피다(Oppida)'라 불리는 더 크고 복잡한 정착지로 발전했다. 콜체스터(카물로두눔)와 세인트 앨번스(베룰라미움) 같은 오피다는 초기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후에 로마 식민지의 중심지가 되었다.

켈트의 경제와 기술

켈트인들은 뛰어난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철제 쟁기를 사용해 이전보다 깊이 땅을 갈 수 있었고, 윤작 체계를 도입하여 토양의 비옥도를 유지했다. 주요 작물로는 밀, 보리, 귀리, 호밀 등의 곡물과 콩, 완두콩 같은 채소를 재배했다.

목축업도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소, 양, 염소, 돼지 등을 키웠으며, 특히 소는 부의 상징이자 교환 수단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말을 사육하여 전쟁과 교통에 이용했다.

금속 가공 기술은 켈트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그들은 철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어 강력한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었다. 또한 금, 은, 청동으로 정교한 장신구와 의식용 물건을 제작했다. 스네팅햄에서 발견된 '토크(Torc)'라 불리는 목걸이는 켈트 금속 세공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켈트인들은 또한 도자기 제작, 직물 생산, 가죽 가공 등 다양한 수공업에도 능했다. 특히 그들의 직물은 화려한 색상과 체크무늬로 유명했는데, 이는 현대 스코틀랜드 타탄 문양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교역과 화폐 시스템

켈트 사회는 활발한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브리튼 내에서는 다양한 부족 간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바다를 건너 유럽 대륙과도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주석, 금, 은, 철, 소금, 가죽, 사냥개 등이 있었고, 수입품으로는 포도주, 올리브유, 유리 제품, 도자기 등 지중해 지역의 사치품이 있었다.

기원전 150년경부터 브리튼 남동부의 켈트 부족들은 자체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리스 및 갈리아 화폐를 모방했지만, 점차 독자적인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이 화폐들에는 말, 멧돼지, 소용돌이 무늬 등 켈트 예술의 특징적인 모티프가 새겨져 있었다.

드루이드와 켈트 종교

켈트 사회에서 드루이드는 종교적 지도자이자 지식의 수호자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드루이드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의식을 주관하고 신탁을 해석했다. 또한 부족의 역사와 전통을 구전으로 전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드루이드가 되기 위해서는 최대 20년 동안의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천문학, 수학, 약초학, 법률, 역사, 시와 노래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습득했다. 글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지식을 암기했는데, 이는 신성한 지식이 외부인에게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켈트 종교는 다신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루그(지혜와 기술의 신), 다누(대지의 여신), 케르누노스(숲과 야생의 신) 등 수많은 신들을 숭배했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종교의 중심에 있었으며, 특정 강, 샘, 나무, 숲 등은 신성시되었다.

종교 의식은 주로 신성한 숲이나 '네메톤(Nemeton)'이라 불리는 야외 성소에서 거행되었다. 의식에는 제물 바치기, 춤, 노래, 연회 등이 포함되었으며, 중요한 의식은 계절의 변화에 맞춰 열렸다. 사마인(현대의 할로윈), 임볼크(봄의 시작), 벨테인(5월 1일), 루그나사드(수확 축제) 등이 주요 축제였다.

켈트 예술과 문화

켈트 예술은 복잡한 기하학적 패턴, 소용돌이 무늬, 동물 모티프가 특징이다. 이러한 디자인은 금속 작품, 도자기, 직물, 무기, 방패 등 다양한 물건에 적용되었다. 특히 '바터시 방패'와 같은 작품들은 켈트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켈트인들은 음악과 이야기에도 큰 가치를 두었다. '바드(Bard)'라 불리는 시인들은 부족의 영웅적 행위와 역사를 노래로 전했다. 이들의 전통은 후대 웨일스와 아일랜드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언어적으로 켈트인들은 브리토닉 켈트어와 고이델릭 켈트어를 사용했다. 브리토닉 계열은 현대 웨일스어, 콘월어, 브르타뉴어의 조상이 되었고, 고이델릭 계열은 아일랜드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맨섬어로 이어졌다.

켈트 사회의 전사 문화

켈트인들은 강한 전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은 명예와 부를 얻는 주요 수단이었으며, 뛰어난 전사들은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긴 검, 창, 방패 등으로 무장했으며, 때로는 전차를 사용하기도 했다.

전투에 앞서 켈트 전사들은 적을 위협하기 위해 카르닉스(Carnyx)라는 긴 나팔을 불고 큰 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높였다. 또한 일부 전사들은 벌거벗은 채로 싸우기도 했는데, 이는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중요한 적의 머리를 보존하여 집 입구에 전시했는데, 이는 적의 영혼과 힘을 획득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로마 정복 이전의 브리튼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브리튼 남동부에서는 더 중앙집권화된 정치 체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카투벨라우니 부족의 쿠노벨리누스(로마 자료에서는 퀴노벨리누스로 알려짐)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와의 접촉이 증가했다. 갈리아가 기원전 50년대에 로마에 정복된 후, 많은 갈리아 난민들이 브리튼으로 이주했으며, 로마 문화의 영향도 간접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일부 브리튼 부족들은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기도 했다. 예를 들어 트리노반테스 부족은 로마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후에 로마의 브리튼 정복을 지원하기도 했다.

결론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전환되는 시기, 브리튼은 켈트 문화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켈트인들은 발전된 농업 기술과 금속 가공법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회 구조와 풍부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했다.

특히 드루이드가 이끄는 종교 체계는 켈트 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그들의 예술과 전사 문화는 브리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록 로마의 정복으로 켈트 문화의 많은 부분이 변화되거나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현대 영국, 특히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문화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켈트 시대의 브리튼은 부족 간의 경쟁과 갈등이 존재했지만, 동시에 풍부한 문화적 교류와 발전이 이루어진 역동적인 사회였다. 이러한 켈트의 유산은 후대 영국 역사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영국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일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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