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격동의 시대를 산 지식인
토머스 홉스는 1588년 영국 웨스트포트에서 태어났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영국이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던 때였다.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이어진 영국 내전, 찰스 1세의 처형(1649), 크롬웰의 공화정과 왕정복고 등 정치적 격변은 홉스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홉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후, 케번디시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하며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갈릴레오, 데카르트와 같은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17세기 과학혁명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특히 기하학적 방법론과 기계론적 세계관은 그의 정치철학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었다.
영국 내전 기간 중 홉스는 왕당파 측에 서있었지만, 그의 정치이론은 단순한 왕권 옹호를 넘어선 보다 복잡하고 체계적인 것이었다. 1651년 출판된 그의 대표작 『리바이어던』은 영국 내전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한 이론적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17세기 과학혁명의 영향
홉스의 정치철학은 당시 진행 중이던 과학혁명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연역적 방법을 모델로 삼아, 명확한 정의와 기본 원리로부터 복잡한 정치이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하고자 했다.
또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기계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인간과 사회를 물질적 운동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복잡한 기계처럼 이해했다. 그에게 인간 행동은 감각, 욕망, 이성과 같은 심리적 기제들의 인과적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학적 접근은 정치철학에서 전통적인 신학적·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경험적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기초한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구축하는 길을 열었다.
『리바이어던』과 홉스의 정치철학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이기적 존재
홉스 정치철학의 출발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비관적 견해다. 그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보았다.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는 자기 보존과 쾌락 추구, 고통 회피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모든 자발적 행위는, 모든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을 향한다; 그리고 그 행위의 목적은, 그들 자신에게 좋음이다."
이러한 인간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견해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홉스에게 인간의 사회성은 본능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며, 사회와 정치 질서는 이러한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자연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홉스가 제시한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자연상태'(state of nature)다. 이는 정치적 권위가 없는 가상의 상태로, 모든 인간이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지만 동시에 극도의 불안과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홉스는 이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고 묘사했다.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세 가지 갈등 원인에 노출된다:
- 경쟁: 희소한 자원을 두고 벌이는 경쟁
- 불신: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게 만드는 보편적 불신
- 명예: 자신의 위신과 명예를 지키려는 욕구
이런 조건 속에서 인간 생활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고 홉스는 말한다. 이는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그가 목격한 내전의 혼란과 당시 '자연 상태'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대한 유럽인들의 보고에 근거한 것이었다.
자연상태에서는 도덕이나 정의 개념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구분은 공통된 권위가 확립한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홉스에게 도덕은 정치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권위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회계약과 주권자의 탄생
자연상태의 위험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서로 합의를 통해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이를 절대 권력을 가진 주권자에게 양도한다. 이것이 바로 홉스가 말하는 '사회계약'이다.
"나는 나의 통치권을 이 인간 또는 이 합의체에 양도하고 권한을 부여한다. 다만 그대도 그대의 권리를 양도하고 같은 방식으로 그의 행위를 승인한다는 조건 하에서."
이 계약의 핵심은 상호성이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공동의 권위에 복종할 때만 안전과 평화가 보장된다. 이러한 합의를 통해 창출된 존재가 바로 '리바이어던'이라 불리는 주권자다.
'리바이어던'이라는 용어는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강력한 바다 괴물에서 따온 것으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정치적 권위를 상징한다. 홉스의 표지 그림은 이를 잘 보여주는데, 거대한 인간 형상이 수많은 작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모습은 개인들의 합의로 창출된 '인공적 인간'으로서의 국가를 시각화한 것이다.
절대 주권론
홉스가 제시하는 주권자는 절대적이고 불가분한 권력을 갖는다. 이러한 절대 권력은 사회계약의 목적인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홉스는 주장한다. 주권이 분할되거나 제한된다면, 자연상태의 혼란으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홉스의 주권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 절대성: 주권자는 모든 시민들 위에 존재하며, 그 권력에 법적 제한은 없다.
- 불가분성: 주권은 나눌 수 없다.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분립은 갈등과 내전의 원인이 된다.
- 항구성: 일단 설립된 주권은 설립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홉스의 절대 주권론이 완전한 전제정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주권자의 목적은 시민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저버린다면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또한 주권자가 시민의 생명을 위협할 경우, 시민은 저항할 자연권을 보유한다고 홉스는 주장한다.
홉스 정치철학의 주요 특징
방법론적 개인주의
홉스의 정치철학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선구적 사례다. 그는 국가와 사회를 개인의 특성보다 우선하는 유기체적 전체로 보는 대신, 개별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서 출발하여 정치 공동체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정치철학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고대와 중세의 정치사상이 인간을 자연적으로 정치 공동체에 속하는 존재로 보았다면, 홉스는 개인을 모든 사회적·정치적 관계에 선행하는 근본적 실체로 설정했다. 이는 이후 로크, 루소 등 다른 사회계약론자들과 자유주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권 개념의 근대화
홉스는 주권 개념의 근대적 형태를 확립한 주요 이론가다. 중세까지 정치적 권위는 신의 질서, 자연법, 관습법 등 다양한 원천에서 파생되었고, 왕과 귀족, 교회, 도시 등 여러 주체들 사이에 분산되어 있었다.
홉스는 이러한 중세적 권위 구조를 거부하고, 단일하고 절대적인 주권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게 주권은 분할될 수 없는 하나의 정치적 권위이며, 그 권위는 신이 아닌 인민의 동의에서 비롯된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법실증주의의 선구
홉스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는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자연법이나 신법과 같은 초월적 법 개념 대신, 주권자가 정한 것이 곧 법이라는 실증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
"법이란 명령이다. 그리고 명령이란 올바른 이성이나 자연법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 자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법 이해는 근대 법체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법의 정당성이 그 내용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정당한 권위에 의해 제정되었는가에 달려있다는 관점은 현대 법철학의 주요 흐름 중 하나가 되었다.
홉스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과 평가
주요 비판점
홉스의 정치철학은 발표 당시부터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 인간 본성의 왜곡: 많은 비판자들은 홉스가 인간의 이기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공감, 이타심, 사회적 유대와 같은 긍정적 측면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 자연상태의 비현실성: 자연상태가 순전히 가상적 구성물이거나, 실제 인류의 무정부 상태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이 있다.
- 절대 권력의 위험성: 절대 권력을 가진 주권자가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특히 자유주의 전통에서 제기되었다.
- 도덕적 상대주의: 도덕과 정의를 주권자의 명령에 종속시킴으로써 보편적 윤리 기준을 부정하는 도덕적 상대주의를 초래한다는 비판도 있다.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평가
비판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정치철학은 근대 정치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 계약론적 전통의 확립: 정치적 의무와 권위를 개인들 간의, 그리고 개인과 국가 간의 계약 관계로 설명하는 전통을 확립했다. 이는 로크, 루소, 칸트를 거쳐 롤스에 이르는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 정치적 정당성의 근대적 이해: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신의 뜻이나 전통이 아닌 피치자의 동의에서 찾는 근대적 관점의 토대를 마련했다.
- 안보와 자유의 긴장 관계: 국가의 첫 번째 임무가 시민의 안전 보장이라는 홉스의 통찰은 현대 국가의 중요한 기능을 정확히 짚었다. 안보와 자유 사이의 긴장 관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다.
- 국제관계의 현실주의: 홉스의 자연상태 개념은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권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무정부 상태로 보는 관점은 현대 국제관계 이론의 주요 패러다임 중 하나다.
오늘날 홉스는 한편으로는 절대주의의 옹호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양면성은 홉스 정치철학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보여준다.
현대 정치이론에 미친 영향
자유주의 전통과의 관계
홉스는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의 직접적 선구자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그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동의에 기초한 정치적 정당성 개념은 자유주의 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로크, 밀과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홉스의 틀을 수정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현대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롤스는 자신의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 개념이 홉스와 칸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홉스의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롤스의 원초적 입장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한 가상적 장치로 기능한다.
국가와 사회의 구분
홉스는 '국가'(state)와 '사회'(society)를 명확히 구분한 최초의 근대 정치사상가 중 하나다. 그에게 국가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을 통해 인공적으로 창출된 정치적 제도다.
이러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구분은 헤겔, 마르크스, 그람시 등을 거쳐 현대 정치이론의 중요한 분석 틀이 되었다. 오늘날 국가-사회 관계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은 홉스가 제시한 근본적 구분에 빚지고 있다.
공포정치와 권위주의 이론
홉스의 정치철학은 20세기의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나치즘과 파시즘 연구에서, 안보와 생존에 대한 불안이 어떻게 시민들로 하여금 자유를 포기하고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 홉스의 모델이 활용되었다.
한나 아렌트와 같은 정치철학자들은 홉스의 분석이 근대 전체주의 국가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예견했다고 보았다. 아렌트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전체주의 체제의 사회적 원자화와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합리적 선택 이론과 게임 이론
현대 정치학의 합리적 선택 이론은 홉스의 방법론적 전제를 상당 부분 계승했다. 개인을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행위자로 보고, 정치 제도와 결과를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접근법은 홉스의 방법론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특히 게임 이론에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모델은 홉스의 자연상태와 사회계약 이론을 형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동의 규범이나 강제력 없이는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이 집단적으로 비합리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통찰은 홉스적 문제설정의 현대적 변주다.
결론: 현대 정치철학에서 홉스의 위치
토머스 홉스는 근대 정치철학의 진정한 창시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전통적인 신학적·목적론적 정치관을 거부하고,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 기초한 새로운 정치이론을 구축했다. 그의 방법론적 개인주의, 사회계약 개념, 주권 이론은 이후의 정치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대적 함의를 갖는 정치철학의 고전이다. 안전과 자유의 갈등,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 국가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그의 물음들은 현대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로 남아있다.
비록 홉스의 절대 주권론은 현대 민주주의 이론과 큰 차이가 있지만, 그가 제기한 근본적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의 정치적 삶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국가는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가? 정치적 의무의 근거는 무엇인가? 자유와 안전은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홉스의 대답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질문의 근본적 중요성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현대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홉스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도전과 딜레마를 선구적으로 포착한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근대 정치의 기원뿐만 아니라, 현대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긴장과 과제를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던진 질문들은, 형태를 달리하여 계속해서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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