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정치철학 6. 중세 정치철학 -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SSSCH 2025. 4. 1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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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는 기독교가 유럽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정치철학은 종교적 세계관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정치철학의 두 거장으로, 이들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사상가의 핵심 이론을 살펴보고, 중세 정치철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아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과 두 도성 이론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초기 기독교 사상가이자 교부철학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대표작 『신국론』(De Civitate Dei)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기독교 신학과 정치철학을 결합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지상국가와 신의 도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에 두 개의 도성, 즉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과 '신의 도성'(Civitas Dei)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개념은 단순한 물리적 구분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지향점에 따른 구분이다.

  • 지상의 도성: 자기애(amor sui)에 기초하여 세속적 가치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공동체다. 이는 욕망, 권력욕, 물질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대표한다.
  • 신의 도성: 신애(amor dei)에 기초하여 영원한 진리와 신의 뜻을 추구하는 영적 공동체다. 이는 세속적 성공보다 영적 가치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두 도성을 현실의 교회와 국가와 단순히 일치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도 지상의 도성에 속한 사람이 있고, 세속 사회에도 신의 도성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본다. 이는 외적 제도보다 내적 지향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정의와 국가에 대한 견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정의 개념에 도전한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정의 없이는 진정한 국가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진정한 정의란 신에 대한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신을 부정하는 국가는 "큰 강도 집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정의가 없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큰 규모의 강도 집단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의 정당성을 세속적 효율성이나 힘이 아닌 초월적 가치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실적 관점에서 세속 국가의 역할도 인정한다. 지상의 도성은 완전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역사관과 정치철학적 함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은 목적론적이다.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신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며, 두 도성의 대립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관점은 세속 권력의 상대화를 가져왔다. 어떤 왕이나 황제도 절대적 권위를 가질 수 없으며, 모든 지상 권력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다.

이는 중세 전반에 걸쳐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 균형에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세속 권력은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할 수 없고, 더 높은 영적 목적에 종속된다는 관점은 군주의 절대권을 제한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 이론과 정치철학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중세 후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결합시킨 인물이다. 그의 주요 저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정치와 법에 관한 체계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자연법 이론의 체계

아퀴나스의 법 이론은 네 가지 층위로 구성된다:

  1. 영원법(Eternal Law): 우주를 지배하는 신의 영원한 이성적 계획
  2. 자연법(Natural Law): 인간의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영원법의 반영
  3. 인정법(Human Law): 자연법에서 도출된 구체적인 인간 사회의 법
  4. 신법(Divine Law): 성경을 통해 계시된 신의 특별한 법

이 체계에서 중요한 점은 모든 정당한 인간 법률은 자연법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든 법이라도 자연법에 위배된다면 그것은 참된 법이 아니며 따라서 구속력이 없다. 이는 법적 실증주의와 대비되는 자연법 전통의 핵심이다.

국가론과 군주정에 대한 견해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인간을 본질적으로 정치적 동물로 보았다. 국가는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 공동체는 인간 번영에 필수적이다.

정부 형태에 관해 아퀴나스는 군주정을 이상적 형태로 간주했지만, 그것은 무제한적 권력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혼합 정체'의 이점도 인정했는데, 이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요소를 결합한 형태다. 모든 정치 권력은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온다고 믿었지만, 이것이 군주의 절대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좋은 통치자는:

  • 공동선을 추구한다
  • 자연법과 신법을 존중한다
  • 덕을 갖추고 있다
  • 백성들을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선을 위해 이끈다

저항권과 폭정에 대한 견해

아퀴나스는 폭군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인정했다. 통치자가 자연법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공동선이 아닌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는 더 이상 정당한 통치자가 아니라 폭군이다. 이때 저항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저항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저항으로 인한 혼란이 폭정보다 더 큰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항은 최후의 수단이며, 성공 가능성이 있고 더 나은 대안이 확보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중세 정치철학의 특징과 영향

중세 정치철학은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는다:

신학과 정치이론의 결합

중세 정치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과 정치이론의 긴밀한 결합이다. 정치적 권위와 정당성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신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정의와 법의 개념도 초월적 질서에 기초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전통과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자연법 전통의 발전

아퀴나스를 통해 정교화된 자연법 이론은 서구 정치사상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이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그로티우스, 로크 등으로 이어지며, 인권 개념과 헌법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

중세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였다. '두 개의 칼' 이론으로 대표되는 이 문제는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경계, 우선순위를 다루며 오랜 논쟁을 낳았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 세속주의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맥락을 제공한다.

현대적 함의

중세 정치철학은 단순히 역사적 관심사가 아니라 현대 정치철학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특히:

  • 자연법과 인권: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도덕 원칙의 존재를 주장하는 자연법 전통은 현대 인권 담론의 철학적 기초 중 하나다.
  • 권력의 제한: 지상 권력에 대한 초월적 제한을 강조한 중세 정치사상은 현대 입헌주의와 권력 분립 이론의 선구로 볼 수 있다.
  • 공동선의 개념: 아퀴나스가 강조한 공동선 개념은 현대 공화주의 정치철학과 공동체주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결론: 중세 정치철학의 유산

중세 정치철학은 기독교 신학의 틀 안에서 발전했지만, 그 함의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이론과 아퀴나스의 자연법 체계는 권력, 정당성, 정의, 저항권 등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들의 사상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 근대 정치사상으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했다. 특히 자연법 전통은 근대 자연권 사상으로 발전하며 로크, 루소 등의 사회계약론에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는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중세 정치철학은 단순히 '암흑기'의 사상이 아니라, 고대와 근대를 연결하고 서구 정치사상의 풍부한 전통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 법치, 인권을 논할 때, 그 뿌리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발전시킨 정치철학적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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