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정치철학 4.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SSSCH 2025. 4. 10. 00:14
반응형

서양 정치철학의 두 거장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제자 관계였지만, 그들의 정치사상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상주의적 접근을 비판하고, 경험적 관찰과 실천적 지혜에 기반한 더 현실적인 정치철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대표작 『정치학』(Politics)은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정치공동체의 본질, 시민의 역할, 좋은 통치의 조건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번 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중심으로 '인간이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와 그 함의를 탐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마케도니아 궁정까지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접경 지역의 스타게이로스(Stageir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궁정 의사였으며, 이러한 가족 배경은 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왕가와 관계를 맺는 데 영향을 주었다.

17세에 아테네로 건너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20년간 수학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다. 플라톤이 "독서가(reader)"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광범위한 독서와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핵심 이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고, 이는 그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플라톤의 사망(기원전 347년)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소아시아 연안의 아소스(Assos)와 레스보스(Lesbos) 섬에서 철학 교육과 자연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기원전 342년, 그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초청을 받아 왕자 알렉산드로스(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교육을 맡게 된다. 이 13세 소년을 가르친 경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과 교육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한 후인 기원전 335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교 '리케이온'(Lyceum, 페리파토스 학파의 근거지)을 설립한다. 이곳에서 그는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자연과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연구와 교육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기원전 323년) 이후 아테네에서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고조되자, "신들에 대한 불경"이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는 "아테네가 철학에 대해 두 번째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소크라테스의 처형을 첫 번째 죄로 보았다) 아테네를 떠나 에우보이아(Euboea)의 칼키스로 피신하여 이듬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의 위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기는 그리스 폴리스 체제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때였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도덕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또한 마케도니아의 부상으로 폴리스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위협받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폴리스의 본질과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상적인 정치공동체의 조건을 탐구했다. 그는 플라톤과 달리 도시국가의 자연적 발생과 역사적 발전에 주목했으며, 다양한 정체(체제)의 장단점을 경험적으로 분석했다. 그의 『정치학』은 158개 폴리스의 헌법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당시 그리스 세계의 실제 정치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이론적 통찰과 경험적 관찰을 결합하여, 도시국가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하고자 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적 본성론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 개념의 의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모든 국가(폴리스)는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어떤 선(善)을 목적으로 조직된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본성적 특징을 설명하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선언한다.

이 명제는 단순히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일반적 관찰을 넘어, 더 깊은 철학적 함의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적'(politikon)이란 단어는 폴리스(polis, 도시국가)와 직접 연관된 것으로, 인간이 단순한 생존이나 경제적 필요를 넘어 폴리스라는 윤리적·정치적 공동체 속에서만 완전한 삶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언어 능력과 연결시킨다. 그에 따르면, 인간만이 말(logos)을 통해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도덕적 판단을 공유하는 것이 가정과 폴리스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동물은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는 단순한 생존이나 물질적 교환을 넘어, 좋은 삶(eu zen)과 행복(eudaimonia)을 추구하는 윤리적 공동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없는 자는 신이거나 짐승"이라고 말함으로써, 정치공동체 밖의 삶은 인간에게 비정상적임을 강조한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신적 존재이거나, 도덕적 판단 능력이 없는 짐승이 아닌 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치공동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자연적 발생과 발전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가 인위적 계약이나 협약이 아닌 자연적 발전의 결과라고 본다. 『정치학』 1권에서 그는 공동체의 자연적 발전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가정(oikos):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로, 일상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형성된다. 여기에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포함된다.
  2. 마을(kome): 여러 가정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로, 일상적 필요를 넘어선 더 넓은 범위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3. 폴리스(polis): 여러 마을이 결합하여 형성된 정치공동체로, 단순한 생존이 아닌 좋은 삶(eu zen)을 목적으로 한다. 폴리스는 자급자족(autarkeia)이 가능한 완성된 공동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는 자연에 의해 존재하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자연에 의해'(by nature)라는 표현은 폴리스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자 완성이라는 의미다. 이는 플라톤이나 후대의 사회계약론자들과 달리, 국가의 기원을 인위적 협약이나 계약이 아닌 인간 본성 자체에서 찾는 관점이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접근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목적론적(teleological)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에게 모든 존재는 고유한 목적(telos)을 향해 발전하며, 그 목적의 실현이 그 존재의 완성이다. 인간의 경우, 정치공동체 속에서의 삶은 그 자연적 발전의 최종 단계이자 인간 본성의 완성이다.

정치적 삶과 행복(eudaimonia)의 관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적 삶과 행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정치철학은 윤리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정치학』은 하나의 연속된 탐구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행위와 선택이 어떤 선(good)을 목표로 한다고 보며, 정치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좋은 삶과 행복의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행복(eudaimonia)은 단순한 주관적 만족이나 쾌락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기능(ergon)과 덕성(arete)의 실현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이성(logos)에 따른 활동이며, 이는 두 가지 형태를 갖는다:

  1. 실천적 지혜(phronesis): 윤리적·정치적 문제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결정 능력
  2. 이론적 지혜(sophia): 불변의 진리와 원리에 대한 이해와 관조

완전한 행복은 이 두 가지 덕성의 조화로운 발휘를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덕성과 행복이 고립된 개인이 아닌 정치공동체 속에서만 온전히 발휘되고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학』 7권에서 "행복한 삶은 덕에 따른 삶(life in accordance with virtue)"이라고 정의하며, 이러한 덕성에 따른 삶이 가능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정치체제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정치는 단순히 질서 유지나 안전 보장을 넘어, 시민들의 덕성과 행복을 증진하는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적 삶은 인간 본성의 완성이자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 정치공동체는 단순한 생존 수단이나 권리 보호 장치가 아니라,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 맥락을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관과 헌정 형태

국가(폴리스)의 목적과 기능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폴리스)의 목적을 단순한 생존이나 물질적 번영을 넘어 "좋은 삶(eu zen)"과 "행복(eudaimonia)"의 실현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처음에는 "살기 위해"(to live) 형성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잘 살기 위해"(to live well)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의 주요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외적 안전 보장: 외부 위협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
  2. 내적 질서 유지: 정의의 원칙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고 사회적 조화를 유지하는 것
  3. 경제적 자급자족: 시민들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
  4. 교육과 덕성 함양: 시민들의 덕성 발달을 촉진하고 좋은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
  5. 좋은 삶의 조건 제공: 시민들이 덕성을 발휘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치학』 8권에서 국가의 교육 체계에 대해 상세히 논한다. 그에게 교육은 단순한 직업 훈련이나 지식 전달이 아니라, 시민적 덕성과 인격 형성의 과정이다. 따라서 교육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관심사이며, 정치체제의 존속과 번영에 필수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관은 현대의 자유주의적 국가관과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현대 자유주의는 국가를 주로 개인의 권리 보호와 자유로운 선택을 위한 중립적 틀로 본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국가는 특정한 덕성과 좋은 삶의 비전을 적극적으로 증진하는 윤리적 공동체다. 이런 관점은 현대의 공동체주의와 더 유사하다.

헌정 형태(정체)의 분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3권에서 다양한 정체(constitution, politeia)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분석한다. 그는 정체를 "국가의 기관들, 특히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의 배열"이라고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체 분류는 두 가지 기준에 따른다:

  1. 통치자의 수: 한 사람, 소수, 다수
  2. 통치의 목적: 공동선을 위한 통치 vs. 통치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통치

이에 따라 그는 정체를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통치자 올바른 형태(공동선 추구) 일탈된 형태(사익 추구)

한 사람 왕정(Kingship) 참주정(Tyranny)
소수 귀족정(Aristocracy) 과두정(Oligarchy)
다수 정체(Polity) 민주정(Democracy)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여섯 가지 정체 중 어느 것도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상적으로는 왕정이나 귀족정이 최선일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적합한 통치자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그는 실제적으로 '정체'(polity)가 가장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체제라고 주장한다.

'정체'는 과두정과 민주정의 요소를 결합한 혼합 체제로, 다수가 통치하되 공동선을 추구하는 체제다. 이는 빈자와 부자, 덕성과 자유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며,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지향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특징을 보여준다.

중산층과 정치적 안정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4권에서 정치적 안정과 좋은 정체를 위한 중산층(middle class)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중산층이 강하고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가 가장 안정적이고 좋은 통치를 실현할 수 있다.

그가 중산층을 중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극단의 회피: 중산층은 지나친 부나 지나친 가난의 극단을 피하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강조하는 '중용(mean)'의 원칙과 일치한다.
  2. 이성적 판단 능력: 중산층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필요에 시달리지 않으면서도, 과도한 부로 인한 오만이나 사치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성적인 정치적 판단이 가능하다.
  3. 계급 갈등 완화: 강한 중산층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극단적 대립을 완화하고, 사회적 조화를 촉진한다.
  4. 정치적 안정: 중산층이 다수를 차지하면 급진적인 정책 변화나 혁명의 위험이 줄어들고, 법치와 정치적 안정이 유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간 계층이 우세하거나 두 극단(부자와 빈자) 중 하나보다 강한 국가는 가장 안정적이다... 중간 계층이 충분히 클 때, 국가는 내분에 덜 시달린다."

이러한 중산층 중시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중용과 균형 추구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극단적 부의 집중이나 극단적 평등 모두를 경계하며,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상적인 정치적 상태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분배적 정의와 교정적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정의(justice)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시한다. 그는 정의를 가장 완전한 덕성이자 법적·사회적 질서의 기초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크게 다음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1.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 명예, 부, 안전 등 공동체의 공유 자원을 구성원들에게 분배하는 것과 관련된 정의
    • 각자의 '가치'(worth)나 '공헌'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함
    • 등가적(geometrical) 비례 원칙을 따름: 만약 A와 B의 가치가 2:1이라면, A와 B가 받는 몫도 2:1이어야 함
    •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이들을 불평등하게, 또는 불평등한 이들을 같게 대우하는 것이 부정의하다"고 주장함
  2. 교정적 정의(Corrective Justice):
    • 개인 간 거래와 불법행위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과 관련된 정의
    • 당사자들의 '가치'와 무관하게 발생한 손해와 이득을 산술적으로 평등하게 조정함
    • 예를 들어, A가 B에게 100의 피해를 입혔다면, A는 B에게 100을 배상해야 함(A와 B의 사회적 지위나 덕성과 무관)
    • 법관은 중간자(median)로서 불균형을 바로잡는 역할을 함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의 핵심은 '적절한 비례'(proper proportion)와 '평등'(equality)이다. 그러나 이 평등은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과 가치에 맞게 적절한 몫을 부여하는 '비례적 평등'이다.

특히 분배적 정의에서 '가치'의 기준은 정체(체제)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민주정에서는 자유나 시민권이, 과두정에서는 부가, 귀족정에서는 덕성이 각각 가치의 기준이 된다. 이는 정의의 내용이 정치체제와 그 체제가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짐을 보여준다.

자연적 정의와 법적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정의를 '자연적 정의'와 '법적 정의'로 구분한다:

  1. 자연적 정의(Natural Justice):
    • 인간의 합의나 결정과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정의의 원칙
    • 모든 곳에서 동일한 효력을 가지며, 인간의 의견에 따라 변하지 않음
    • 예: 약자에 대한 보호, 부모 공경, 기본적 인간 존엄성 존중 등
  2. 법적 정의(Legal Justice):
    • 특정 공동체의 법과 관습에 따라 규정된 정의의 원칙
    • 공동체마다 다를 수 있으며, 합의와 결정에 따라 변할 수 있음
    • 예: 특정 범죄에 대한 처벌, 재산권 규정, 상속법 등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들의 극단적 상대주의("정의는 단지 강자의 이익일 뿐")와 달리, 자연적 정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론과 달리, 그는 자연적 정의가 구체적 상황과 맥락 속에서 다양하게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보편성과 특수성, 원칙과 적용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정의는 보편적 원칙에 근거하지만, 그 구체적 적용은 특정 상황과 맥락의 복잡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 형평과 법적 정의의 조정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에피에이케이아'(형평, equity) 개념을 통해 법적 정의의 한계와 그 보완 방법을 논한다. 에피에이케이아는 법의 보편성과 개별 사례의 특수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법은 필연적으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형태로 표현되기 때문에, 모든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완벽하게 포괄할 수 없다. 특히 예외적이거나 입법자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법의 기계적 적용이 오히려 부정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피에이케이아는 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에 충실하여, 구체적 상황에 맞게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피에이케이아의 본질은 법이 보편성으로 인해 결함을 가질 때 그것을 교정하는 것이다... 입법자가 그 상황을 알았다면 법에 명시했을 것을 말하는 것, 그리고 만약 그가 알았다면 그렇게 입법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에피에이케이아이다."

에피에이케이아는 단순한 법적 기술이 아니라 도덕적 덕성이며, 실천적 지혜(phronesis)의 한 형태다. 그것은 규칙의 기계적 적용보다 상황의 특수성과 복잡성을 고려하는 판단 능력을 요구한다. 이는 현대 법철학에서 '형식주의' 대 '재량주의', 또는 '법의 지배' 대 '형평법'의 논쟁과도 연결된다.

에피에이케이아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맥락적 접근을 잘 보여준다. 그는 플라톤과 달리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정의의 원칙보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실현되는 정의의 실천적 차원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윤리학 전반에 나타나는 경험주의적, 실천적 성향을 반영한다.

시민권과 시민적 덕성

시민의 정의와 역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3권에서 '시민이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한다. 그에 따르면, 시민은 "정치적 판단과 공직 참여의, 무제한적이거나 제한적인 권리를 가진 자"로 정의된다. 즉, 시민은 단순히 특정 지역에 거주하거나 법적 권리를 갖는 자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과 통치에 직접 참여하는 구성원이다.

이러한 시민 개념은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적 맥락을 반영한다.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에서 시민들은 민회(assembly), 배심원단, 공직 등을 통해 직접 정치에 참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민은 "때로는 통치하고, 때로는 통치받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다.

시민의 역할은 정체(체제)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민주정에서는 광범위한 시민 참여가 이루어지지만, 과두정이나 귀족정에서는 시민권과 정치 참여가 더 제한적이다. 그러나 어떤 정체에서든, 진정한 시민은 단순한 피통치자가 아니라 통치에 참여하는 주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시민과 국가의 관계를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본다. 시민은 국가라는 유기체의 구성요소로서, 국가의 번영과 시민의 행복은 분리될 수 없다. 이는 개인과 국가를 분리하거나 대립시키는 현대 자유주의와 대조되는 관점이다.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권의 실제적 제한에 대해서도 논한다. 당시 그리스 폴리스에서 여성, 외국인, 노예 등은 시민권에서 배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배제를 자연적 차이와 기능적 필요성에 근거하여 정당화하는데, 이는 그의 사상의 역사적 한계를 보여준다.

시민적 덕성과 정치적 능력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좋은 시민의 덕성은 좋은 정치체제의 필수 조건이다. 『정치학』 3권에서 그는 "좋은 시민의 덕성"과 "좋은 인간의 덕성"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시민의 덕성은 정체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각 정체는 그 체제의 보존과 번영에 필요한 특정한 시민적 자질을 요구한다. 민주정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존중하는 시민이, 과두정에서는 재산과 질서를 중시하는 시민이 요구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체제 순응적인 시민이 아니라, 통치와 피통치의 양면을 모두 잘 수행할 수 있는 시민을 이상적으로 본다. 좋은 시민은 "잘 통치하고, 잘 통치받는"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정치적 덕성의 핵심으로 본다. 실천적 지혜는 추상적 원칙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 복잡한 정치적 문제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지식이나 이론적 이해를 넘어선 실천적 역량으로, 경험과 성찰을 통해 발달한다.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치학』 8권에서 그는 음악, 체육, 문학 등을 포함한 시민 교육의 프로그램을 논한다. 그에게 교육은 단순한 직업 훈련이나 개인적 계발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정치적 판단 능력을 기르는 공적 과정이다.

시민의 우정(philia)과 정치적 연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8, 9권에서 우정(philia)의 본질과 유형을 상세히 분석한다. 그는 우정을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유대의 기초로 본다.

특히 '시민적 우정'(civic friendship)은 정치공동체의 결속과 안정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은 입법자들이 정의보다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화합(concord)은 우정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며, 입법자들은 무엇보다 화합을 추구하고 내분(faction)을 추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민적 우정은 공동선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가치의 공유에 기반한다. 이는 상호 이익을 위한 도구적 관계('유용성에 기반한 우정')를 넘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유대를 형성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적 화합(homonoia, concord)은 모든 사안에 대한 일치나 의견의 통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근본적 이익과 가치에 대한 공유된 이해를 의미한다. 이러한 화합은 법적 강제나 이해관계의 우연한 일치를 넘어선, 더 깊은 시민적 유대와 연대의 기초가 된다.

시민적 우정은 또한 정치적 정의의 기초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의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우정이 발달한 공동체에서는 강제적 법적 규제보다 상호 존중과 배려에 기반한 자발적 협력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정치철학의 공화주의 전통과 공동체주의 접근과 연결된다. 특히 정치공동체를 단순한 권리·의무의 계약적 관계나 이익 추구의 경쟁장으로 보지 않고, 공유된 가치와 정체성에 기반한 윤리적 공동체로 보는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

가정 경제와 화폐 경제의 구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권에서 경제활동의 두 가지 형태를 구분한다: '오이코노미아'(oikonomia, 가정 경제)와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 화폐 획득술).

  1. 오이코노미아(가정 경제):
    • 가정(oikos)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재화의 생산과 관리
    • 자연적이고 정당한 경제활동으로, 자급자족과 좋은 삶을 위한 충분한 물질적 기반을 목표로 함
    • 제한된 목적(가정의 필요 충족)을 가지며, 따라서 자연적 한계를 지님
  2. 크레마티스티케(화폐 획득술):
    • 화폐 자체의 무한한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
    • 교환과 상업을 통해 이루어지며, 특히 이자를 통한 화폐의 증식(고리대금업)을 포함함
    • 자연적 한계가 없으며, 무한한 화폐 축적을 추구함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코노미아를 자연적이고 정당한 경제활동으로 보는 반면, 크레마티스티케, 특히 그 극단적 형태인 화폐의 무한 축적 추구는 부자연스럽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그는 화폐가 원래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교환 수단으로 발명되었으나, 점차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을 비판한다.

특히 이자를 통한 화폐 증식(고리대금업)은 가장 비자연적인 경제활동으로 간주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는 교환을 위해 생겨났지만, 이자는 화폐 자체를 더 많게 만든다. 그래서 '토코스'(이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이는 낳은 것이 낳은 것을 닮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즉, 화폐가 화폐를 '낳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관은 중세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신학자들의 고리대금업 비판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재산권과 공동체적 사용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2권에서 플라톤의 『국가』에 제시된 재산 공유제를 비판하며, 사유 재산과 공동 사용의 조화를 주장한다.

그는 재산의 사적 소유가 다음과 같은 이점을 가진다고 본다:

  1. 효율성: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더 잘 돌보고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2. 만족감: 사적 소유는 소유자에게 고유한 즐거움과 만족을 제공한다.
  3. 관대함: 사적 재산이 있어야 친구들에게 관대함을 베풀 수 있다.
  4. 갈등 감소: 공유 재산은 종종 분배와 사용에 관한 분쟁을 초래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사적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는 사적이되, 사용은 공동적인" 제도를 이상적으로 본다. 이는 재산의 법적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되, 그 사용과 혜택은 일정 정도 공동체와 공유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mean) 추구와 균형 감각을 잘 보여준다. 그는 플라톤의 급진적 공동체주의와 무제한적 사적 소유권 모두를 피하고,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책임 사이의 조화를 모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산관은 현대의 사유재산 절대주의와 공산주의적 재산 공유 사이의 중간 지점을 제시한다. 이는 사회적 책임을 수반하는 소유권 개념, 즉 재산이 단순한 개인적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과 책임을 수반한다는 관점과 연결된다.

경제적 정의와 교환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경제적 교환의 정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공동체의 결속과 존속을 위해 재화와 서비스의 정의로운 교환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교환적 정의의 핵심 문제는 서로 다른 재화와 서비스 사이의 '적정 비율'(just ratio)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 한 채는 신발 몇 켤레와 교환되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비교의 기준으로 '필요'(need)를 제시한다. 상이한 재화들은 그것들에 대한 사회적 필요에 따라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화폐는 이러한 필요의 대리물(representative)로서, 서로 다른 재화와 서비스를 비교하고 교환을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 자체가 가치의 절대적 척도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제도적 장치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환 이론은 단순한 시장 메커니즘을 넘어, 정의와 공동체적 유대에 기반한 경제 질서를 추구한다. 그에게 경제활동은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자급자족적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구성원 간의 상호의존성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경제학의 시장 중심, 효용 극대화 패러다임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를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 그에게 경제적 행위는 궁극적으로 좋은 삶과 공동체적 행복이라는 더 넓은 목적에 기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영향과 평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비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모두 정치를 윤리적 삶의 완성으로 보고, 좋은 삶과 덕성의 함양을 정치의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론과 정치적 비전에서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1. 인식론과 방법론:
    • 플라톤: 이데아론에 기반한 선험적, 연역적 접근. 현실 정치는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그림자로 봄
    • 아리스토텔레스: 경험적, 귀납적 접근. 실제 정치체제의 관찰과 분석에 기반한 실용적 이론 구축
  2. 이상적 정체:
    • 플라톤: 철학자-왕이 통치하는 이상 국가. 『국가』에서는 극단적 엘리트주의, 『법률』에서는 더 현실적 타협안 제시
    • 아리스토텔레스: 혼합 정체(polity)와 중산층의 중요성 강조.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추구하는 현실적 정치 질서
  3.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점:
    • 플라톤: 영혼의 삼분법(이성, 기개, 욕망)에 기반한 계급 구조. 사회는 개인 영혼의 확대된 모델
    •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보며,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기능의 복잡성 강조
  4. 재산과 가족:
    • 플라톤: 『국가』에서 통치자와 수호자 계급의 재산과 가족 공유 주장
    • 아리스토텔레스: 사적 소유와 가족 제도 옹호, 그러나 극단적 불평등과 사적 이기주의는 경계
  5. 정의관:
    • 플라톤: 정의를 "각자 자신의 일을 하는 것"으로 정의. 조화와 균형 중시
    • 아리스토텔레스: 분배적 정의와 교정적 정의 구분. 비례적 평등과 적절한 중간에 기반한 정의관

이러한 차이는 두 철학자의 기본적 세계관과 방법론의 차이를 반영한다. 플라톤이 이상적 모델을 통해 현실을 판단하고 변화시키고자 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질서를 모색했다. 플라톤이 '있어야 할 것'(ought)에 초점을 맞췄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is)과 '있어야 할 것' 사이의 실천적 연결을 중시했다.

후대 정치사상에 미친 영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서양 정치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은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고대 로마와 헬레니즘 시대:
    • 키케로, 폴리비우스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 정체론을 수용하고 발전시킴
    • 스토아학파가 그의 자연법 개념을 우주적 이성(logos)과 연결하여 확장
  2. 중세 기독교 철학:
    •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종합하여 자연법 이론 발전
    • 정의, 덕성, 공동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중세 정치신학의 중심 개념이 됨
  3.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
    •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공화주의 전통 부활
    •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 등이 정체 분류와 혼합 정체 이론에 영향 받음
  4. 근대 정치사상:
    • 헤겔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기체적 국가관과 윤리적 공동체 개념을 발전시킴
    • 마르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과 자기실현 개념을 자신의 소외론에 접목
  5. 현대 정치철학:
    • 한나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동물' 개념과 실천(praxis) 중심의 정치관을 재해석
    • 공동체주의자들(매킨타이어, 샌델, 테일러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과 공동체적 자아관을 현대적으로 재구성
    • 마사 누스바움, 아마티아 센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번영과 역량 개념을 정의론과 발전 이론에 적용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20세기 후반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부활'이다. 롤스의 『정의론』 이후 현대 정치철학은 칸트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덕성, 공동체, 정치적 판단, 좋은 삶—으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는 현대 사회의 도덕적 원자주의와 공동체 해체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모색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현대적 해석과 비판

현대 정치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다양한 해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1. 긍정적 재평가:
    • 공동체주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학과 목적론적 인간관을 현대 도덕철학의 대안으로 제시
    • 공화주의: 한나 아렌트, 필립 페팃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참여와 시민적 자유 개념을 자유주의적 소극적 자유에 대한 대안으로 재해석
    •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 마사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번영과 기능(function) 개념에 기반한 정의론을 발전시킴
  2. 비판적 관점:
    • 엘리트주의와 배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참여 모델이 여성, 노예, 외국인 등을 배제한 점은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 비판받음
    • 자연주의적 오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자연관이 '있는 것'에서 '있어야 할 것'을 도출하는 논리적 비약을 범했다는 비판
    • 정적인 사회관: 변화와 혁신보다 안정과 조화를 강조하는 보수적 경향이 역동적인 현대 사회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
  3. 현대적 재해석의 쟁점:
    • 다원주의와의 조화: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일한 '좋은 삶'의 비전이 현대 다원주의 사회의 가치 다양성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 국민국가와 세계화: 도시국가(polis)에 기반한 정치이론이 현대의 국민국가 체제와 세계화된 정치경제 질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 생태적 해석: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주의적, 유기체적 사회관을 현대 환경윤리와 생태정치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실천적 지혜의 복권: 현대 정치에서 형식적 절차와 추상적 원칙보다 맥락적 판단과 실천적 지혜(phronesis)의 중요성 재조명
  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분명 역사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의 사상은 노예제, 여성 차별, 외국인 배제 등 당시 그리스 사회의 차별적 관행을 일정 부분 정당화했다. 또한 그의 목적론적 자연관은 현대 과학의 기계론적, 비목적론적 세계관과 충돌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여전히 현대 정치사상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그의 인간관('정치적 동물'), 정치의 목적(좋은 삶), 시민적 덕성과 판단력의 중요성, 정치공동체의 윤리적 차원 등은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사적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의 핵심 통찰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지속적 생명력과 적응력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 재정리

정치적 동물과 폴리스의 본질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명제는 단순히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일반적 관찰을 넘어, 다음과 같은 심층적 함의를 갖는다:

  1. 언어와 도덕적 추론: 인간은 언어(logos)를 통해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을 구분하고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이러한 도덕적 추론과, 판단의 공유가 정치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2. 자기 완성으로서의 정치: 정치적 삶은 인간 본성의 완성이자 표현이다. 인간은 정치공동체 속에서만 자신의 모든 잠재력과,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
  3. 목적으로서의 폴리스: 폴리스(정치공동체)는 단순한 생존이나 안전을 위한 도구적 연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삶의 목적이자 맥락이다. "폴리스는 잘 살기 위해 존재하며, 단순히 함께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4. 자연적 발전의 결과: 폴리스는 인위적 계약이나 협약이 아닌, 인간 본성의 자연적 발현이자 발전의 결과다. 이는 근대 사회계약론과 대비되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정치를 단순한 권력 투쟁이나 이익 경쟁으로 보지 않고, 인간 번영과 덕성 실현의 필수적 조건으로 본다. 정치는 인간 삶의 부수적 영역이 아니라 그 핵심이며, 정치적 참여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표현이다.

동시에 이 관점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함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개인과 공동체는 대립하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전체의 부분들이다. 개인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좋은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번영과 완성을 가능하게 한다.

실천적 지혜와 정치적 판단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실천적 지혜'(phronesis)다. 이는 구체적 상황에서 올바른 행동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능력, 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실천적 지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이론과 실천의 통합: 추상적 원칙과 구체적 상황을 연결하는 능력. 보편적 지식을 특수한 맥락에 적용하는 판단력.
  2. 경험과 성찰의 산물: 단순한 이론적 학습이 아니라, 경험과 성찰을 통해 발달하는 실천적 역량.
  3. 맥락적 감수성: 구체적 상황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인식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선택하는 능력.
  4. 중용의 파악: 특정 상황에서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의 적절한 중간점을 찾아내는 능력.
  5. 숙고와 선택: 가능한 행동 대안들을 신중하게 숙고하고,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능력.

실천적 지혜는 정치에서 특히 중요하다. 정치적 문제는 복잡하고 불확실하며, 상충하는 가치와 이해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에 단순한 기술적 지식이나 추상적 원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좋은 정치인과 시민은 구체적 상황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공동선을 위한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정치를 단순한 기술적 문제 해결이나 보편적 원칙의 적용으로 보는 현대적 경향에 대한 중요한 대안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과학(episteme)이나 기술(techne)이 아니라 실천(praxis)의 영역이며, 그 핵심은 알고리즘적 해결책이 아닌 현명한 판단과 숙고다.

정의와 형평의 원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은 현대 정치철학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의 정의론은 다음과 같은 핵심 요소를 포함한다:

  1. 분배적 정의와 비례적 평등: 공동체의 재화와 명예는 각자의 '가치'에 비례하여 분배되어야 한다. 이는 산술적 평등(모두에게 동일한 몫)이 아니라 비례적 평등(각자의 가치에 비례한 몫)을 의미한다.
  2. 교정적 정의와 산술적 평등: 개인 간 거래와 불법행위에서는 당사자들의 가치와 무관하게 발생한 손해와 이득을 산술적으로 균등하게 조정해야 한다.
  3. 자연적 정의와 법적 정의의 구분: 인간의 합의와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자연적 정의와, 특정 공동체의 법과 관습에 따라 규정된 법적 정의를 구분한다.
  4. 형평(epieikeia)의 원리: 법의 보편성으로 인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구체적 상황에 맞게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 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에 충실한 판단.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은 현대 정의론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분배적 정의론은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단순히 모두에게 동일한 몫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과 필요에 맞는 적절한 분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형평 개념은 법적 정의의 기계적 적용의 한계를 인식하고, 구체적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한 유연한 적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현대 법철학에서 법적 형식주의와 재량주의의 균형에 관한 논쟁과 연결된다.

셋째, 그의 정의관은 정의를 단순한 절차적 공정성이나 권리 보장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좋은 삶과 인간 번영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다.

현대 정치철학에의 함의

자유주의 vs. 공동체주의 논쟁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논쟁인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대립에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현대 자유주의(특히 롤스, 드워킨, 노직 등의 이론)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개인의 우선성: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을 사회적 가치나 공동선보다 우선시함
  2. 중립적 국가: 국가는 특정한 좋은 삶의 관념을 증진하지 않고, 다양한 가치관의 공존을 위한 중립적 틀을 제공해야 함
  3. 절차적 정의: 정의는 주로 공정한 절차와 권리 보장의 문제로 이해됨
  4. 비구속적 자아관: 개인은 자신의 목적과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로 봄

이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매킨타이어, 샌델, 테일러, 왈저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한다:

  1. 사회적 구성체로서의 자아: 개인의 정체성과 가치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됨
  2. 공동체와 공동선의 중요성: 좋은 삶은 공동체적 맥락과 공유된 가치 없이는 실현 불가능함
  3. 실질적 좋음의 비전: 정치는 단순한 권리 보장을 넘어, 좋은 삶과 인간 번영의 조건을 증진해야 함
  4. 시민적 덕성과 참여: 민주주의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시민적 덕성과 정치 참여가 필수적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이 논쟁에서 공동체주의적 입장에 중요한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다. 그의 '정치적 동물' 개념, 폴리스와 좋은 삶의 관계, 덕성과 실천적 지혜의 강조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가치 중립성에 대한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정치철학에서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통합 또는 균형을 모색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공화주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시민성과 참여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현대적 자유와 권리의 중요성을 수용한다. 또한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나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와 같은 중간적 입장도 발전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균형 감각은 이러한 통합적 접근에도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그의 정치철학은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맥락, 권리와 책임, 자유와 덕성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민주주의와 시민 교육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아테네 민주정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정치철학은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그의 시민적 덕성과 교육에 관한 관점은 현대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을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된다.

현대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1. 시민 참여의 감소: 정치적 무관심과 낮은 투표율, 공적 영역으로부터의 퇴각
  2. 정치적 양극화: 합리적 숙의와 타협을 어렵게 만드는 이념적, 정서적 분열
  3. 전문가주의와 기술관료주의: 정치적 판단을 기술적 문제 해결로 축소하는 경향
  4. 공론장의 위기: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의 정보 조작, 가짜 뉴스, 에코 챔버 현상

이러한 도전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관점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1. 시민적 덕성의 중요성: 좋은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와 절차가 아니라, 덕성 있는 시민의 존재에 달려 있다. 시민적 덕성은 공적 토론에 참여하고,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며, 공동선을 위해 사적 이익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2. 시민 교육의 필요성: 시민적 덕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적절한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시민 교육은 필수적이다.
  3. 실천적 지혜와 정치적 판단: 민주적 정치는 단순한 다수결이나 이익 집단 경쟁이 아니라, 공적 숙의와 현명한 판단을 통한 공동선의 실현이다. 이를 위해 시민들의 실천적 지혜와 정치적 판단 능력이 중요하다.
  4. 중산층과 정치적 안정: 극단적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안정과 민주주의의 질을 위협한다. 강한 중산층의 존재는 민주주의의 안정과 질적 향상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 민주주의 이론, 특히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와 참여 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 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 이들 이론은 형식적 절차와 투표를 넘어, 시민들의 실질적 참여와 공적 숙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시민적 문화와 덕성에 기반한 생활양식임을 상기시킨다. 좋은 민주주의는 좋은 시민을 필요로 하며, 좋은 시민은 적절한 교육과 정치적 참여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정치경제학과 좋은 삶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은 현대 경제체제와 정치경제학에 대한 중요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그의 '오이코노미아'(가정 경제)와 '크레마티스티케'(화폐 획득술)의 구분은 현대 자본주의의 근본적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현대 주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무한한 욕망과 성장: 인간의 욕망과 경제 성장에는 자연적 한계가 없다고 가정함
  2. 시장 자율성: 시장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으로 보며,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함
  3. 효용 극대화: 인간 행동의 목적을 주관적 선호와 효용의 극대화로 봄
  4. 가치 중립성: 경제학은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며,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으로 자처함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은 다음과 같은 대안적 시각을 제시한다:

  1. 자연적 한계: 좋은 삶에 필요한 물질적 재화는 자연적 한계가 있으며, 무한한 부의 축적은 자연스럽지 않고 좋은 삶에 기여하지 않음
  2. 경제의 내재성: 경제는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맥락에 내재된 활동. 경제활동의 목적은 공동체의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
  3. 객관적 인간 번영: 인간의 목적은 주관적 욕망 충족이 아니라 객관적인 인간 번영(eudaimonia)과 탁월함의 실현
  4. 충분성의 원칙: '더 많은 것이 항상 더 좋다'는 원칙 대신, 좋은 삶에 '충분한' 물질적 기반을 강조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은 현대의 여러 대안적 정치경제학 접근—생태경제학, 사회적 경제, 박애 경제학, 탈성장 운동, 공동선 경제학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은 무한한 경제 성장과 소비주의의 환경적, 사회적, 심리적 한계를 인식하고, 인간 번영과 행복에 대한 더 풍부하고 다차원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아마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이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 번영과 기능(function) 개념에 기반하여, 경제 발전의 목적을 소득 증가가 아닌 인간 역량의 확장으로 재정의한다. 이는 경제를 수단으로, 인간 번영을 목적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관은 현대 자본주의의 무한 성장 가정과 소비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제기한다. 그것은 경제를 다시 그것의 본래 목적—좋은 삶의 물질적 조건 제공—에 복무하도록 재정향하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결론: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현대적 의의

균형과 중용의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균형과 중용(mean)의 추구다. 그는 정치적, 사회적 극단을 경계하고, 다양한 원칙과 가치의 균형 잡힌 조화를 모색한다.

이러한 균형 추구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나타난다:

  1. 혼합 정체: 어떤 단일 원리(민주적, 과두적, 군주적)에 기반한 체제보다 이들의 균형 잡힌 결합을 선호함
  2. 중산층의 중요성: 정치적 안정과 좋은 통치를 위해 극단적 부와 빈곤 사이의 중간적 계층의 중요성 강조
  3. 분배적 정의: 극단적 평등과 불평등 모두를 피하고, 비례적 평등에 기반한 적절한 분배 추구
  4. 형평의 원리: 법의 엄격한 적용과 자의적 예외 사이의 균형으로서 형평(epieikeia) 개념 제시
  5. 정치적 참여와 전문성: 시민 참여의 가치와 정치적 전문성·덕성의 중요성 사이의 균형 모색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균형 감각은 현대 정치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현대 정치는 종종 이념적 양극화, 정체성 정치, 포퓰리즘적 단순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균형 추구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단순화의 위험을 경계하고, 다양한 가치와 원칙의 복잡한 균형을 모색하는 정치적 지혜를 강조한다.

특히 그의 실천적 지혜(phronesis) 개념은 현대 정치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실천적 지혜는 상황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가치와 원칙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며, 극단을 피하는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다. 이는 이념적 교조주의나 기술관료적 환원주의를 넘어선 정치적 판단의 모델을 제시한다.

정치와 윤리의 연결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정치와 윤리의 불가분성이다. 그에게 정치학은 윤리학의 연장이자 완성이며, 둘은 동일한 목적—인간 행복과 좋은 삶—을 공유한다.

이러한 정치와 윤리의 연결은 현대 정치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 가치 중립성의 한계: 정치는 단순한 권력 투쟁이나 이익 조정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윤리적 활동이다. 가치 중립적 정치는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2. 공동선의 중요성: 정치의 목적은 단순한 개인 선호의 집합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공동선의 실현이다. 공동선은 구체적 맥락에서 시민들의 숙의와 판단을 통해 형성된다.
  3. 정치적 덕성: 좋은 정치체제는 단순한 제도나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덕성 있는 시민과 지도자의 존재에 달려 있다. 정치적 덕성은 공적 토론에 참여하고,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며, 공동선을 위해 사적 이익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4. 정치적 판단의 중요성: 정치적 결정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 해결이나 이익 계산이 아니라, 복잡한 윤리적 판단을 요구한다. 이러한 판단은 규칙의 기계적 적용이 아닌 실천적 지혜에 기반해야 한다.
  5. 인간 번영의 정치적 조건: 행복하고 번영하는 삶은 적절한 정치적, 사회적 조건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치의 목적은 이러한 조건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현대 정치에서 정치와 윤리의 분리 경향—예를 들어, 정치를 단순한 권력 투쟁으로 보는 현실주의, 정치를 가치 중립적 기술적 문제 해결로 보는 기술관료주의, 정치를 단순한 선호 집합으로 보는 경제학적 접근—에 대한 대안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윤리학은 중요한 교정적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그의 관점은 현대 정치의 도덕적 진공 상태와 시니시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정치는 단순한 권력 게임이나 이익 극대화의 장이 아니라, 좋은 삶과 인간 번영의 조건을 실현하는 윤리적 활동이다. 이러한 이해는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소외와 무관심을 극복하고, 정치적 참여와 숙의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경험주의와 실용주의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그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 성격이다.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연역적 접근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 정치체제의 경험적 관찰과 분석에 기반한 실용적 이론을 구축한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 접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다양한 정체의 경험적 분석: 아리스토텔레스는 158개 폴리스의 헌법을 연구하고, 다양한 정체의 장단점을 경험적으로 분석했다고 전해진다.
  2. 문제 중심적 접근: 그는 이상적 정체에 대한 추상적 이론보다, 실제 정치 문제(정치적 안정, 혁명 방지, 법치의 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중시한다.
  3. 맥락 민감성: 정치적 처방은 각 국가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 점진적 개선: 급진적 혁명보다는 기존 체제의 점진적 개선과 안정을 중시한다.
  5. 중용과 실현 가능성: 극단적 이상보다는 실현 가능한 중간적 해결책을 선호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 접근은 현대 정치철학과 정치학에 중요한 방법론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그 가치가 있다:

첫째, 그의 접근은 추상적 이론과 구체적 현실 사이의 균형을 강조한다. 좋은 정치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도, 현상 유지에 안주하는 현실주의도 아니라,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그것을 개선하려는 비판적 성찰이어야 한다.

둘째, 그의 문제 중심적 접근은 현대 정치학의 문제 해결적 지향과 연결된다. 정치철학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실제 정치 문제에 대한 실천적 지혜를 제공해야 한다.

셋째, 그의 맥락 민감성은 보편적 처방이나 일률적 해결책의 한계를 인식하게 한다. 정치적 처방은 각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그의 점진적 접근은 급진적 이상주의와 현상 유지적 보수주의 사이의 중간 길을 제시한다. 정치적 변화는 기존의 좋은 요소를 보존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 접근은 현대 정치철학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이념적으로 되는 경향에 대한 중요한 교정을 제공한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 보편적 원칙과 특수한 맥락 사이의 균형을 모색하는 정치적 지혜의 모델을 제시한다.

나가며: 정치적 동물의 시대적 소명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정의한 것은 단순한 기술적 관찰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과 소명에 대한 근본적 통찰이었다. 인간은 정치공동체 속에서만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실현하고 진정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 정치적 삶은 인간 번영의 필수 조건이자 인간 본성의 완성이다.

21세기의 복잡한 도전들—기후 위기, 디지털 혁명, 글로벌 불평등, 민주주의의 위기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동물' 개념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한 기술적 해결책이나 시장 메커니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집단적 숙의, 공동선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동시에 현대 사회의 여러 경향—개인주의의 심화, 공적 영역의 약화, 정치적 소외와 냉소주의의 확산, 디지털 기술에 의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은 인간의 정치적 본성을 위협한다. 정치가 단순한 권력 투쟁이나 이익 경쟁으로 축소될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차원을 상실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우리에게 정치의 본질적 가치와 의미를 상기시킨다. 정치는 단순한 필요악이나 불가피한 타협의 장이 아니라, 공동체의 좋은 삶을 함께 구상하고 실현하는 고귀한 활동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핵심적 표현이자 완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정치의 과제는 단순한 권리 보장이나 이익 조정을 넘어, 모든 시민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는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숙의, 공적 영역의 활성화, 시민적 덕성과 실천적 지혜의 함양을 필요로 한다.

현대의 '정치적 동물'은 자신의 정치적 본성을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조건 속에서 그것을 새롭게 표현하고 실현해야 한다. 이는 지역적 수준에서부터 글로벌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함께 모색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지혜를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은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시대적 소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그의 '정치적 동물' 개념, 실천적 지혜, 중용의 원칙, 정치와 윤리의 통합은 현대 정치의 도전에 응답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정치는 우리의 완전한 인간성을 실현하는 필수적 차원이며, 정치적 참여와 숙고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좋은 삶의 본질적 요소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