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hics

윤리학 11. 공리주의의 성립 – 벤담과 밀의 행복 이론

SSSCH 2025. 4. 9.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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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 중 하나인 공리주의는 근대 서양 윤리학의 한 축을 담당하며 오늘날까지도 윤리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이번에는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주창한 공리주의 사상의 핵심 원리와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의무론과의 대비를 통해 근대 윤리학의 두 거대한 흐름을 이해해 보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 공리주의의 탄생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기존의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윤리 이론에서 벗어나 실질적이고 계량 가능한 윤리의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그가 제시한 원칙이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벤담에게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란 간단했다. 행위의 결과가 가져오는 쾌락(pleasure)의 총량이 고통(pain)의 총량보다 크면 그 행위는 옳은 것이다. 이때 쾌락과 고통은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는 이를 '쾌락 계산(felicific calculus)'이라 칭했다. 쾌락의 강도, 지속 시간,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 등 7가지 기준으로 행위의 결과를 계산해 가장 큰 쾌락을 가져오는 선택이 윤리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벤담의 이론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법과 형벌 제도에 관한 그의 개혁적 주장은 공리주의적 사고가 실제 사회 제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형벌의 목적이 범죄자에 대한 응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 증진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형벌은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 전체의 쾌락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적 쾌락론 – 밀의 공리주의 심화

벤담의 제자이자 대표적인 공리주의자로 성장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스승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중요한 변화를 가했다. 밀은 벤담의 쾌락 계산이 지나치게 양적이고 기계적이라고 느꼈다. 모든 종류의 쾌락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벤담의 이론에서는 "만족한 돼지"와 "불만족한 소크라테스" 중 돼지를 선택해야 하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비판했다.

1863년 출간된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서 밀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정신적·지적인 쾌락은 육체적·감각적 쾌락보다 본질적으로 가치가 높다. "두 쾌락을 모두 경험해 본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쾌락이 질적으로 우월하다"라는 그의 유명한 '능력 있는 판정자(competent judges)' 기준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판별하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질적 구분을 통해 밀은 공리주의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그의 이론에서는 단순히 쾌락의 양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차원적 쾌락(higher pleasures)을 추구하는 행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만족한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낫다"는 말은 밀의 질적 쾌락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유론과 공리주의의 조화

밀의 또 다른 대표작인 『자유론(On Liberty)』(1859)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친다. 이는 초기 공리주의가 다수의 행복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소수자의 권리나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밀은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는 개인의 표현·사상·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가 제시한 '위해의 원칙(Harm Principle)'은 오직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중요한 원칙이다. 이는 공리주의의 큰 틀 안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설명하려는 시도였으며, 현대 자유주의 윤리의 토대가 되었다.

밀의 자유론은 공리주의가 단순히 행복의 총량만을 추구하는 이론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과 발전을 중시하는 포괄적인 윤리 체계임을 보여준다. 그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와 공리주의가 충돌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공리주의 비판과 현대적 발전

공리주의는 그 영향력만큼이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결과만을 중시함으로써 정의(justice)나 권리(rights)를 경시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다. 예를 들어, 다수의 행복을 위해 무고한 소수를 희생시키는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특수 사례' 문제는 공리주의의 약점으로 지적된다.

이에 대응하여 20세기에는 규칙 공리주의(rule utilitarianism)와 행위 공리주의(act utilitarianism)로 이론이 세분화되었다. 규칙 공리주의는 개별 행위가 아닌 규칙이나 원칙의 채택이 가져올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도 권리와 정의에 대한 우려를 완화하려는 시도다.

또한 선호 공리주의(preference utilitarianism)는 단순한 쾌락이 아닌 개인의 선호나 관심사 충족을 윤리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피터 싱어(Peter Singer)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이러한 접근을 통해 동물권, 빈곤 문제 등 현대적 윤리 문제에 공리주의를 적용하고 있다.

의무론과 공리주의: 근대 윤리학의 두 축

공리주의와 함께 근대 서양 윤리학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한 것은 임마누엘 칸트의 의무론이다. 두 이론은 윤리적 판단의 기준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공리주의가 행위의 결과와 유용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칸트의 의무론은 행위의 동기와 보편적 원칙에 주목한다.

칸트에게 윤리적 행위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옳은 동기(선의지)에서 비롯되고 보편화 가능한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그의 정언명령은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행위의 결과가 아닌 그 행위를 보편적 법칙으로 삼을 수 있는지 여부가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무론과 공리주의의 대립은 오늘날까지도 윤리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 의사의 거짓말이 환자의 행복을 증진한다면 그것이 윤리적인가?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결과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와 원칙을 중시하는 의무론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와 공리주의적 사고

비록 200여 년 전에 등장한 이론이지만, 공리주의적 사고는 현대 사회에서도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특히 공공 정책, 경제 분석, 의료 윤리 등의 영역에서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이나 질 보정 수명(QALY: Quality-Adjusted Life Year) 같은 개념은 공리주의적 접근의 현대적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제한된 의료 자원의 배분, 환경 규제의 경제적 영향 평가, 복지 정책의 설계 등 현대 사회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은 종종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을 기반으로 논의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공정성, 권리, 정의와 같은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난제로 남아있다.

공리주의가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제시하는 단순명료한 원칙—'행복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라'—이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다양한 비판과 수정을 거쳤지만, 벤담과 밀이 제시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의 윤리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공리주의는 윤리적 판단에서 결과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렌즈를 제공한다. 칸트의 의무론과 함께 이 두 이론이 형성한 윤리학의 근대적 틀은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도덕적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의 토대가 되고 있다. 다양한 윤리적 상황에서 이 두 관점의 통찰을 균형 있게 고려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의 시작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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