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사상의 전환: '전회(Kehre)'
하이데거 철학은 흔히 초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그 전환점을 '전회(Kehre)'라고 부른다. 『존재와 시간』(1927) 이후 1930년대부터 하이데거의 사유는 점차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초기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 분석을 통해 존재 의미에 접근했다면, 후기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역사적 드러남과 은폐에 더 주목한다. 이 전환은 단순한 주제의 변화가 아니라, 사유 방식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후기 하이데거는 존재를 인간 주체의 이해 지평 안에서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가 역사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은폐하는 '사건(Ereignis)'으로 사유한다. 이제 중심은 인간의 존재 이해에서 존재 자체의 '밝힘(Lichtung)'으로 옮겨간다. 이러한 전환과 함께, 하이데거는 기술, 언어, 예술, 시(詩) 등의 주제를 통해 존재 사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기술에 대한 물음과 '몰아세움(Gestell)'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1953년 발표된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r Technik)」에서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몰아세움(Gestell)'으로 규정한다. 몰아세움이란 모든 것을 '유용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자원으로 동원 가능한 '재고(Bestand)'로 변형시키는 태도를 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 기술은 단순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세계와 존재자를 드러내는 특정한 방식이다. 현대 기술 아래에서 자연은 더 이상 경이로운 현존이 아니라, 계산 가능하고 활용 가능한 에너지 저장고로 나타난다. 강은 수력발전소의, 숲은 목재 산업의, 심지어 인간마저 인적 자원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이러한 도구적·계산적 사고방식은 모든 것을 '자원화'하며, 존재의 다른 드러남 방식을 가린다.
중요한 점은 하이데거가 기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기술의 본질은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기술 기반 사회에서 우리가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기술을 향해 열린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기술의 포기가 아니라,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지배에서 벗어나 더 근원적인 존재 경험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 - 하이데거의 언어철학
후기 하이데거 사상에서 언어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장소임을 강조한다. 언어를 통해 존재가 말해지고, 인간은 이 언어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존재와 관계한다.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언어관, 즉 언어를 인간 주체가 사용하는 도구로 보는 관점을 비판한다. 그에게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인간을 말하게 한다. "언어가 말한다(Die Sprache spricht)"는 하이데거의 표현은 이러한 역전된 관계를 나타낸다. 진정한 말하기는 인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에 주목한다. 시는 일상적·과학적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존재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휠더린, 트라클, 릴케 등 독일 시인들의 작품 해석을 통해,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가 어떻게 존재의 숨겨진 차원을 열어 보이는지 보여준다. 시적 언어는 계산적 사고의 지배에서 벗어나, 존재자가 자신의 고유한 현존 속에서 빛나도록 한다.
예술작품의 근원과 진리의 사건
1935년 강연 「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es)」에서 하이데거는 예술을 통해 존재의 진리가 어떻게 '작품 속에 정립되는지'를 탐구한다. 그에게 예술은 단순한 미적 체험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에 세우는 사건이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농부 신발' 그림 분석을 통해, 작품이 어떻게 일상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신발의 '존재'를 밝혀내는지 보여준다. 예술작품은 '세계(Welt)'를 열어 세우고 '대지(Erde)'를 드러내는 가운데, 세계와 대지의 투쟁으로서의 진리를 작품 속에 정립한다. 여기서 세계는 의미 연관의 총체를, 대지는 그러한 의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저항하는 물질적 차원을 의미한다.
예술은 이처럼 존재자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진리의 사건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이 점차 '문화재'나 '심미적 체험'으로 전락하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원초적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사유(思惟)와 존재 역사(Seinsgeschichte)
후기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더 이상 '철학(Philosophie)'이라 불리지 않고, '사유(Denken)'로 불린다. 그는 전통 형이상학을 '존재-신-론(Onto-Theo-Logie)'으로 규정하며, 이것이 존재자의 존재자성을 최고 존재자(신)를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존재 자체를 망각하고, 존재자의 근거만을 묻는 한계를 가진다.
반면, 하이데거가 추구하는 사유는 '계산적 사고(rechnendes Denken)'가 아닌 '성찰적 사고(besinnliches Denken)'이다. 계산적 사고가 대상을 통제하고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성찰적 사고는 존재의 드러남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지키는 태도이다. 이러한 사유는 적극적으로 대상을 포착하려 하기보다는, 존재의 부름을 기다리는 '수용적(gelassen)' 자세를 취한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를 '존재 역사(Seinsgeschichte)'로 해석한다. 이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고 은폐하는 방식의 역사적 변천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기술 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왔으나, 동시에 점점 더 은폐되어 왔다.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은 점차 존재자에만 집중하고 존재 자체를 망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극복과 '다른 시작'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은 서양 형이상학 전통을 '극복(Überwindung)'하고 '다른 시작(der andere Anfang)'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극복'은 형이상학을 단순히 거부하거나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사유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특히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시작된 '최초의 시작(der erste Anfang)'에서 출발했으나, 이후 점차 존재 망각의 길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현대의 사유는 이러한 최초의 시작으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다른 시작'을 모색해야 한다. 이 '다른 시작'은 존재의 진리를 다시금 경험하고, 인간과 존재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1936-38년에 작성한 『철학의 기여(Beiträge zur Philosophie)』에서 '존엄(Ereignis)'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유 방식을 모색한다. 존엄은 인간과 존재가 서로에게 '고유하게 됨(Er-eignen)'을 의미하며, 더 이상 주체-객체 관계가 아닌 상호 귀속의, 관계를 나타낸다.
사물(Ding)에 대한 사유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주제는 '사물(Ding)'에 대한 사유이다. 1950년 강연 「사물(Das Ding)」에서 하이데거는 단순한 대상이나 도구가 아닌,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장소로서의 사물을 사유한다. 그는 항아리를 예로 들어, 그것이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사방세계(Geviert)'—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의 모임이자 거울놀이를 통해 세계를, 밝히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물 사유는 존재자를 단순히 인간 사용을 위한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존재자의 고유한 현존을 존중하는 태도로 전환을 요구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방치(Gelassenheit)'라는 태도로 표현하는데, 이는 존재자를 통제하려는 의지를 내려놓고, 존재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있도록 허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하이데거 후기 사상의 영향과 비판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은 20세기 후반 철학, 문학, 예술, 건축, 생태학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데리다, 푸코, 레비나스 등)은 하이데거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독창적인 철학을 발전시켰다. 또한 환경 윤리학, 기술 철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 사상의 여러 흐름에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 역시 다양한 비판에 직면한다. 먼저, 그의 언어가 지나치게 난해하고 신비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있다. 특히 분석철학 전통에서는 하이데거의 용어와 문체가 명확한 의미 전달과 논리적 분석을 방해한다고 본다. 또한, 그의 기술 비판이 과도하게 비관적이며, 현대 기술의 긍정적 측면을 간과한다는 지적도 있다.
무엇보다 하이데거의 나치 관여는 그의 철학적 사상과 정치적 입장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심각한 윤리적 물음을 제기한다. 비록 그의 나치 가담이 철학적 사상의 가치 자체를 완전히 무효화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의 존재 사유가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현대 생태 철학과 기술 철학에 대한 공헌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 특히 기술 비판과 '사방세계' 개념은 현대 생태 철학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그의 '몰아세움' 비판은 환경 위기의 근본 원인을 단순한 정책 실패나 기술적 문제가 아닌,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점의 문제로 파악하게 했다. 자연을 단순한 자원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심층 생태학(Deep Ecology) 등의 환경 사상은 하이데거 철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 기술 철학은 하이데거의 통찰을 출발점으로 삼아 기술의 본질과 인간-기술 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발전시켰다. 단순히 기술의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평가하는 수준을 넘어,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존재 방식과 세계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이데거 사상의 현재적 의의
오늘날 인공지능, 유전자 기술 등 첨단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환경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하이데거의 사유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그의 '몰아세움'과 계산적 사고에 대한 비판은 기술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 방식과 자연과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특히 모든 것을 효율성과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현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오늘날 성과주의와 소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그의 사유는 우리에게 계산적 사고의 한계를 인식하고, 존재의 다른 차원에 열린 자세를 갖출 것을 촉구한다.
물론 하이데거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그의 통찰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현대적 맥락에 맞게 재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그의 기술 비판을 단순한 기술 거부나 낭만적 과거 회귀로 이해하기보다는, 기술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과 균형 있는 사유를 위한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은 이처럼 존재, 언어, 기술, 예술, 자연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사유를 자극하고 도전하는 중요한 사상적 자원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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