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라는 도시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7명의 왕들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까지 약 240년간 이어진 로마 왕정은 단순한 도시국가에서 강력한 지중해 세력으로 성장하는 로마의 기초를 다진 시대였다. 로물루스부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까지, 각각의 왕들이 남긴 유산은 후의 로마 공화정과 제정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건국 신화와 로물루스의 도시 건설
로마의 건국 신화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서 시작된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이 형제들이 티베르 강변의 일곱 언덕에 도시를 건설하려 했지만, 결국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혼자서 로마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라는 구체적인 건국 연도까지 전해진다.
물론 이는 신화일 뿐이고, 실제 역사는 훨씬 복잡하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라틴족, 사비니족, 에트루리아족 등 여러 부족들이 티베르 강 연안의 언덕들에 정착하면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도시다. 특히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노 언덕을 중심으로 한 초기 정착지들이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로물루스는 이런 통합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단순히 도시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로마의 기본적인 사회 제도를 마련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사비니 여인 약탈' 사건이다. 여성이 부족했던 초기 로마에서 인근 사비니족의 여성들을 납치해 결혼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실제로는 서로 다른 부족 간의 혼인 동맹을 통한 정치적 통합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로물루스 시대에 확립된 또 다른 중요한 제도가 바로 원로원이다. 초기 원로원은 각 씨족의 가장들로 구성된 자문기구였다. 왕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이들의 조언을 구했고, 이런 전통이 후에 공화정 시대의 원로원 중심 정치로 이어졌다. 또한 시민을 쿠리아라는 30개 단위로 나누는 쿠리아 제도도 이때 시작되었다.
누마 폼필리우스와 종교 제도의 체계화
로물루스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누마 폼필리우스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통치자였다. 로물루스가 전쟁과 정복의 왕이었다면, 누마는 평화와 종교의 왕이었다. 그는 사비니족 출신으로, 43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로마의 종교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누마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의 종교 달력을 만든 것이다. 기존의 10개월 달력을 12개월로 확장하고, 각종 종교 축제와 의식의 날짜를 정했다. 특히 야누스 신전의 문을 열고 닫는 의식을 통해 전쟁과 평화를 상징화했는데, 평화시에는 문을 닫고 전쟁시에는 열어두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또한 누마는 베스타 처녀들 제도를 확립했다. 베스타는 화덕의 여신으로, 도시의 영원한 불꽃을 지키는 6명의 처녀 제관들이 30년간 순결을 지키며 신전을 관리했다. 이들이 불꽃을 꺼뜨리거나 순결을 잃으면 산 채로 매장당하는 극형에 처해졌을 정도로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담당했다.
누마는 또한 플라멘이라는 주요 신들의 전담 제관 제도를 만들었다. 유피테르, 마르스, 퀴리누스의 세 주요 신을 섬기는 플라멘 마이오르와 12명의 플라멘 미노르가 각각 담당 신의 제사를 전담했다. 이런 체계적인 종교 조직은 로마 시민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의 정복 전쟁
세 번째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다시 군사적 팽창 정책으로 돌아갔다. 그의 이름 자체가 '적대적인'이라는 뜻으로, 32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알바 롱가와의 전쟁이다.
알바 롱가는 로마보다 오래된 라틴족의 중심 도시였다. 두 도시 간의 전쟁에서 각각 세 명의 형제가 대표로 나서 결투를 벌였는데, 로마 측 호라티우스 삼형제와 알바 롱가 측 쿠리아티우스 삼형제의 대결이 그것이다. 결국 로마가 승리해 알바 롱가를 멸망시키고 주민들을 로마로 이주시켰다. 이는 로마가 라틴 동맹의 맹주가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시대에는 로마의 군사 제도도 발전했다. 시민군의 조직이 더욱 체계화되었고,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로마 시민으로 편입시키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이런 관용적인 편입 정책이 후에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종교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쟁에만 몰두하며 신들에 대한 제사를 게을리 했다가 결국 유피테르의 번개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는 로마인들이 종교와 정치의 균형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안쿠스 마르키우스와 도시 확장
네 번째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누마 폼필리우스의 외손자로, 할아버지의 평화적 성향과 군사적 필요성 사이의 균형을 추구했다. 24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로마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면서도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를 바다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티베르 강 하구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해 로마의 항구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로마는 내륙 농업 도시에서 해상 무역도 가능한 복합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오스티아는 후에 로마 제국의 곡물 수입항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그는 아벤티노 언덕과 야니쿨룸 언덕을 로마 영역에 편입시켜 도시의 규모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야니쿨룸 언덕에는 요새를 건설해 에트루리아족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최초의 다리인 서블리키우스 다리를 티베르 강에 가설했는데, 이는 순전히 나무로만 만든 다리였다. 종교적 이유로 철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또한 로마의 법 제도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는 국제법의 기초가 되는 페키알레스 제도를 확립했다. 이는 다른 도시나 민족과 조약을 맺거나 전쟁을 선포할 때 따라야 할 종교적, 법적 절차를 정한 것이다. 페키알레스라는 특별한 제관이 적국 국경까지 가서 정당한 전쟁임을 선포하고 창을 던지는 의식을 행했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와 에트루리아 문화 도입
다섯 번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부터는 에트루리아계 왕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는 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이 출신으로, 본명은 루쿠모였지만 로마에 정착하면서 로마식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아내 타나킬은 예언 능력이 뛰어난 에트루리아 여성으로, 남편이 로마에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38년간 재위하면서 로마에 에트루리아의 발전된 문명을 도입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건설이다. 이는 전차 경주를 비롯한 각종 경기를 위한 거대한 경기장으로, 최대 2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이런 대규모 공공 시설은 로마 시민들의 오락과 결속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로마 신전 건축에 에트루리아 양식을 도입했다. 특히 카피톨리노 언덕에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세 신을 모시는 거대한 신전 건설을 시작했다. 이 신전은 후에 로마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개선식 때 장군들이 참배하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의 사회 계층도 재편했다. 그는 원래 300명이었던 원로원을 600명으로 확대했고, 기존의 3개 트리부스(부족)에 새로운 트리부스를 추가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기존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그는 전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사회 개혁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노예 출신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왕비 타나킬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양육했으며,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44년간의 긴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로마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가장 중요한 개혁은 센투리아 제도의 도입이다. 기존의 출생에 따른 신분제 대신 재산에 따라 시민을 분류하는 새로운 체계를 만든 것이다. 시민들을 재산 정도에 따라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나누고, 각 등급에서 징병과 조세를 차등 부담하게 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인구 조사이자 체계적인 사회 제도였다.
1등급 시민들은 가장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갖춰 중장보병으로 복무했고, 하위 등급은 그에 맞는 장비로 군복무를 했다. 5등급 이하의 가난한 시민들은 프롤레타리이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군복무 대신 자손(proles)을 낳아 로마의 인구를 늘리는 것이 의무였다. 이런 체계는 시민의 의무와 권리를 재산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변화였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또한 로마 시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그는 로마의 일곱 언덕을 모두 포함하는 성벽을 건설했는데, 이를 세르비우스 성벽이라고 부른다. 이 성벽은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종교적 경계선이기도 했다. 성벽 안쪽이 신성한 로마 영역(pomerium)이고, 바깥쪽은 속세였다.
또한 그는 라틴족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아벤티노 언덕에 디아나 신전을 건립했다. 이 신전은 로마와 라틴 동맹 도시들의 공동 성소 역할을 했으며, 로마가 라틴족의 맹주임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왕정의 몰락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교만한 타르퀴니우스'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전제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사위였지만 장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25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로마 전통의 견제와 균형 체계를 파괴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원로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운영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자의적으로 처형하거나 추방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원로원의 자문을 구하지 않았다. 이는 로물루스 이래 지켜져 온 로마의 정치 전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외 정책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라틴 동맹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고, 볼스키족과 헤르니키족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다. 특히 가비이 점령은 그의 대표적인 군사적 성과였다. 그의 아들이 가비이에 망명자로 가장해 들어가 도시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교묘한 전략을 사용했다.
내정에서는 거대한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아버지가 시작한 카피톨리노 신전을 완성했고, 특히 클로아카 막시마라는 거대한 하수도 시설을 건설했다. 이 하수도는 로마의 늪지대를 배수해 포룸 로마눔을 조성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공사를 위해 시민들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했고, 이는 민심 이반을 가져왔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저지른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이었다. 고결한 로마 여성 루크레티아가 왕자에게 능욕당한 후 자결한 사건은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와 그의 친구 브루투스가 시민들을 선동해 왕정 타도 운동을 일으켰고, 기원전 509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로마 왕정의 정치적·종교적 유산
240여 년간 이어진 로마 왕정은 단순한 전제정치가 아니라 복잡한 제도적 균형 위에 서 있었다. 왕은 최고 권력자였지만 원로원의 자문을 받아야 했고, 민회의 승인도 필요했다. 또한 종교적 권위도 왕권의 중요한 기반이었지만, 동시에 종교법의 제약도 받았다.
이런 복합적인 정치 체계는 후의 공화정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집정관은 왕의 행정권을, 원로원은 자문 기능을, 민회는 승인 권한을 물려받았다. 특히 로마인들이 권력 집중을 견제하고 상호 균형을 중시하는 정치 문화도 왕정 시대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 제도 역시 로마 문명의 핵심적 특징이 되었다. 누마가 확립한 종교 달력과 제관 제도,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만든 국제법적 의식들은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로마인들이 실용적이면서도 전통을 중시하는 특성을 보인 것도 이런 왕정 시대의 유산이다.
결론
로마 왕정 7왕의 이야기는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로마 문명의 기원을 보여준다. 로물루스의 건국 신화에서 시작해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몰락까지, 각각의 왕들은 로마가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의 강자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로마인들이 외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만의 독특한 체계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에트루리아의 도시 문명, 그리스의 종교와 문화, 라틴족의 농업 전통이 조화롭게 융합되어 로마만의 독특한 문명을 만들어냈다. 이런 개방성과 적응력이 바로 로마가 천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왕정 시대에 확립된 정치적 균형감,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력의 조화, 그리고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관용성은 모두 후의 로마 공화정과 제정의 기반이 되었다. 비록 마지막 왕의 전제정치로 왕정은 막을 내렸지만, 그 유산은 로마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가 되어 오늘날까지 서구 문명의 뿌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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