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네덜란드와 국제도시 뉴암스테르담
1609년 헨리 허드슨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위해 탐험한 후, 네덜란드는 북아메리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621년 설립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모피 무역을 목적으로 허드슨 강 유역에 교역소를 설치했다. 1624년 공식적으로 뉴네덜란드 식민지가 설립되었고, 1626년 총독 페터 미누이트는 맨해튼 섬을 원주민들로부터 60길더(약 24달러) 상당의 물품으로 구입했다.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은 처음부터 상업 도시였다. 네덜란드의 관용적인 문화가 반영되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643년 예수회 신부 이삭 조그는 이 도시에서 18개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네덜란드인뿐만 아니라 플랑드르인, 왈롱인, 프랑스 위그노, 독일인, 스칸디나비아인, 영국인, 유대인, 아프리카인들이 함께 살았다.
종교적 관용도 뉴암스테르담의 특징이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공식 종교였지만, 다른 종파들도 예배의 자유를 누렸다. 유대인들은 1654년부터 정착하기 시작했고, 북아메리카 최초의 유대교 회당이 이곳에 세워졌다. 이러한 다양성과 관용은 훗날 뉴욕의 국제적 성격의 토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통치 체제는 패트룬(patroon) 제도를 특징으로 했다. 50명 이상의 이주민을 데려온 사람에게는 허드슨 강변의 광대한 토지가 수여되었다. 패트룬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봉건 영주처럼 통치했다. 킬리안 반 렌셀러의 렌셀러위크는 70만 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영지였다.
허드슨 강 유역의 모피 무역
뉴네덜란드의 경제는 모피 무역에 크게 의존했다. 특히 비버 모피는 유럽에서 모자 제작에 사용되어 높은 수요가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로쿼이 연맹과 긴밀한 무역 관계를 맺었다. 포트 오렌지(현재의 올버니)는 주요 무역 중심지였다.
네덜란드의 무역 방식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랐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동등한 무역 파트너로 대했고,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려 노력했다. 이는 프랑스와 유사한 접근이었지만, 영국이나 스페인과는 대조적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원주민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관습을 존중했다.
하지만 모피 무역은 원주민 사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사냥 패턴이 바뀌고, 부족 간 경쟁이 심화되었다. 총기와 알코올의 도입은 특히 파괴적이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네덜란드로부터 얻은 총기로 주변 부족들을 압도하며 모피 무역을 독점하려 했다.
1640년대 네덜란드 총독 빌렘 키프트는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1643-1645년의 키프트 전쟁은 양측에 큰 피해를 입혔다. 네덜란드 정착민들은 안전을 위해 뉴암스테르담으로 피신해야 했다.
펜실베이니아와 퀘이커의 '거룩한 실험'
1681년 찰스 2세는 윌리엄 펜에게 광대한 토지를 수여했다. 이는 펜의 부친이 왕실에 제공한 차관에 대한 상환이었다. 펜은 이 땅을 '펜실베이니아'(Penn's Woods)라 명명하고, 퀘이커교도들을 위한 안식처로 만들고자 했다.
퀘이커(공식 명칭은 친우회, Society of Friends)는 1640년대 영국에서 조지 폭스가 창시한 종파였다. 그들은 모든 인간 내면에 '신의 빛'이 있다고 믿었고, 성직자나 예배 의식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평등주의, 평화주의, 단순한 삶을 추구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박해받았다.
펜은 펜실베이니아를 "거룩한 실험"이라 불렀다. 그는 종교의 자유, 민주적 통치, 원주민과의 평화적 공존을 실현하고자 했다. 1682년 제정된 펜실베이니아 헌법(Frame of Government)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사형은 반역과 살인에만 적용되었다.
필라델피아('형제애의 도시')는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다. 격자형 거리와 넓은 공원이 특징이었다. 펜은 "녹색 전원도시"를 꿈꿨고, 각 집에는 정원이 있도록 했다. 이는 런던의 대화재(1666년) 경험을 반영한 것이었다.
남부 식민지의 형성
메릴랜드는 1632년 칼버트 경(로드 볼티모어)에게 수여되었다. 그는 가톨릭교도였고, 메릴랜드를 가톨릭의 안식처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개신교도들도 받아들여야 했다. 1649년 종교관용법(Toleration Act)은 모든 기독교 종파에 예배의 자유를 보장했다.
캐롤라이나는 1663년 8명의 영주에게 수여되었다. 그들은 존 로크와 함께 캐롤라이나 기본 헌법을 작성했다. 이는 귀족적 계급 사회를 구상했지만, 실제로는 실현되지 못했다. 캐롤라이나는 곧 남북으로 분리되어 발전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소규모 자작농들이 주를 이뤘다.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좋은 항구가 없어 대규모 농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찰스턴을 중심으로 번영했다. 바베이도스에서 온 농장주들이 노예제 플랜테이션을 도입했다.
조지아는 1732년 제임스 오글소프를 중심으로 한 자선 단체에 의해 설립되었다. 원래 목적은 영국의 빚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과 빈민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한 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대한 완충 지대 역할도 했다. 초기에는 노예제와 럼주가 금지되었지만, 경제적 압력으로 인해 곧 허용되었다.
플랜테이션 체제의 발달
남부 식민지는 플랜테이션 농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는 담배,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쌀과 인디고, 조지아는 후에 면화를 주요 작물로 재배했다. 이들 작물은 모두 노동 집약적이었고, 대규모 토지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플랜테이션은 자급자족적인 경제 단위였다. 대농장주는 수백에서 수천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했고, 수십에서 수백 명의 노예를 부렸다. 플랜테이션에는 주인의 대저택, 노예 숙소, 작업장, 창고, 때로는 교회와 학교까지 있었다.
계층 구조는 뚜렷했다. 정상에는 대농장주들이 있었고, 그들은 정치적 권력도 독점했다. 중간에는 소규모 자작농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맨 아래에는 계약 노동자와 노예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약 노동자는 줄어들고 아프리카 노예가 주요 노동력이 되었다.
체서피크 지역(버지니아, 메릴랜드)과 로우컨트리(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는 다른 특성을 보였다. 체서피크는 담배 재배로 인해 농장들이 강변에 분산되어 있었다. 로우컨트리는 쌀 재배에 적합한 해안 습지대에 집중되었고, 찰스턴 같은 도시가 발달했다.
네덜란드령의 영국 정복
1664년 영국은 네덜란드령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했다. 찰스 2세는 이 지역을 동생 요크 공작(훗날 제임스 2세)에게 수여했고, 도시 이름은 뉴욕으로 바뀌었다. 페터 스타위베산트 총독은 저항을 포기했는데, 주민들이 영국 통치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관용적 전통을 대체로 유지했다. 네덜란드 주민들은 재산권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네덜란드어는 계속 사용되었고, 네덜란드 법률과 관습도 많이 남았다. 이러한 다문화적 유산은 뉴욕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했다.
뉴욕은 곧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주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훌륭한 항구와 허드슨 강을 통한 내륙 접근성이 유리했다. 또한 다양한 인구 구성은 국제 무역에 유리했다. 뉴욕 상인들은 서인도제도, 유럽, 아프리카와 활발히 거래했다.
요크 공작은 뉴저지 지역을 버클리 경과 카터렛 경에게 양도했다. 뉴저지는 동서로 분할되어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후에 퀘이커들이 서뉴저지를 매입했고, 이는 펜실베이니아와 유사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중부 식민지의 다양성
중부 식민지(뉴욕,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는 '빵바구니 식민지'로 불렸다. 비옥한 토양과 온화한 기후로 곡물 생산에 적합했다. 밀, 옥수수, 보리가 주요 작물이었고, 이는 서인도제도와 남부 식민지에 수출되었다.
인구 구성이 가장 다양했다. 영국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인, 프랑스 위그노, 유대인 등이 섞여 살았다. 각 집단은 자신들의 언어, 종교, 관습을 유지했다. 이는 문화적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종교적 다원주의가 특징이었다. 퀘이커, 장로교, 루터교, 개혁교회, 가톨릭, 유대교 등이 공존했다. 국교가 없었고, 종교의 자유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독점이나 남부의 성공회 지배와 대조적이었다.
경제 구조도 다양했다. 대규모 영지(뉴욕의 매너)와 소규모 자작농이 공존했다. 필라델피아와 뉴욕 같은 상업 도시가 발달했다. 제조업도 성장했는데, 제분소, 제재소, 철공소가 많았다.
퀘이커 펜실베이니아의 성공
펜실베이니아는 빠르게 번영했다. 윌리엄 펜의 적극적인 홍보로 많은 이민자들이 왔다. 특히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더치'로 불렸다(Dutch는 Deutsch의 잘못된 발음). 메노나이트, 아미시 같은 평화주의 종파들이 정착했다.
펜의 원주민 정책은 독특했다. 그는 원주민들을 공정하게 대했고, 토지를 정당하게 구매했다. 유명한 'Great Treaty'는 엘름나무 아래서 맺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평화적 관계는 프렌치-인디언 전쟁까지 지속되었다.
필라델피아는 빠르게 성장하여 18세기 중반에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종교적 관용과 경제적 기회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인물들이 활동하며 문화와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퀘이커의 이상주의는 현실과 충돌하기도 했다. 평화주의는 방어 문제를 야기했고, 평등주의는 기존 사회 질서와 맞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속화가 진행되고, 퀘이커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델라웨어의 독특한 위치
델라웨어는 원래 뉴스웨덴 식민지였다. 1638년 스웨덴과 핀란드 정착민들이 델라웨어 강변에 정착했다. 그들은 통나무집을 도입했는데, 이는 미국 프런티어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1655년 네덜란드가 점령했고, 1664년 영국령이 되었다.
델라웨어는 펜실베이니아의 일부가 되었지만,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주민들은 퀘이커가 아닌 사람들이 많았고, 필라델피아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1704년 별도의 의회를 갖게 되었지만, 펜실베이니아 총독의 지배는 계속 받았다.
델라웨어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체서피크 만과 델라웨어 강 사이에 위치하여 남북을 연결했다. 또한 필라델피아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위치는 델라웨어를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결론
중부와 남부 식민지는 뉴잉글랜드와는 매우 다른 사회를 만들어냈다. 네덜란드의 상업적 관용, 퀘이커의 평화주의적 이상, 남부의 플랜테이션 체제는 각각 독특한 문화와 제도를 낳았다. 이러한 다양성은 미국의 복잡한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
중부 식민지의 종교적, 민족적 다원주의는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예고했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같은 도시들은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펜실베이니아의 민주적 실험은 미국 정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체제는 또 다른 미국을 만들었다. 노예제에 기반한 경제, 귀족적 사회 구조, 농업 중심의 문화는 북부와 뚜렷이 구별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미국을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의 경험들은 미국의 근본적인 특성들을 형성했다. 다양성 속의 통일, 실용주의와 이상주의의 공존, 자유와 불평등의 모순 - 이 모든 것들이 중부와 남부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 각 식민지의 독특한 성격은 연방 체제의 필요성을 낳았고, 이는 미국 정치 체제의 핵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