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역사이론 2. 랑케식 실증주의와 애널리티컬 역사학 - 역사를 과학으로 만들려는 시도들

SSSCH 2025. 5. 13. 00:02
반응형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가" - 랑케의 명제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제시한 "wie es eigentlich gewesen"(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명제는 역사학의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짧은 문장에는 역사학이 추구해야 할 이상과 방법론이 압축되어 있다.

랑케는 역사가의 임무가 과거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역사가가 자신의 편견이나 도덕적 판단을 배제하고, 오직 사료가 말해주는 사실만을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1차 사료, 특히 외교 문서와 정부 기록물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강조했다.

랑케의 방법론은 혁명적이었다. 그 이전의 역사 서술은 대부분 교훈적이거나 문학적인 성격이 강했다. 역사가들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거나, 자신의 시대를 정당화하려 했다. 반면 랑케는 역사를 독립적인 학문으로 확립하려 했다. 그는 기록보관소를 직접 방문하여 원사료를 연구했고, 사료들을 교차 검증하여 사실을 확인했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확산과 발전

랑케의 방법론은 19세기 후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각국의 대학에서는 랑케식 세미나가 개설되었고, 역사학도들은 사료 비판의 기술을 익혔다. 독일에서는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이 로마사 연구에 이 방법을 적용했고, 프랑스에서는 가브리엘 모노(Gabriel Monod)가 실증주의 역사학을 도입했다.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역사 연구를 체계화했다. 사료를 수집하고 편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독일사료집성』(Monumenta Germaniae Historica)같은 방대한 사료집이 출간되었고, 각국에서는 국가 기록보관소가 설립되었다. 역사학은 점점 더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었다.

그러나 랑케의 이상은 쉽게 달성될 수 없었다. 역사가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있는가? 사료만으로 과거를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랑케식 실증주의의 한계가 명확해졌다.

논리실증주의의 도전

20세기 초, 철학계에서는 논리실증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비엔나 학파로 대표되는 이들은 검증 가능한 명제만이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고는 역사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설명은 어떻게 검증될 수 있는가? 역사 법칙은 존재하는가?

카를 구스타프 헴펠(Carl Gustav Hempel)은 역사적 설명의 논리 구조를 분석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도 일반 법칙과 초기 조건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이른바 '포괄법칙 모델'(covering law model)이다. 예를 들어, "혁명은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할 때 일어난다"는 일반 법칙과 "18세기 말 프랑스는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했다"는 초기 조건으로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역사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역사적 사건은 너무나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여 일어나므로,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인간의 의도와 선택, 우연적 요소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었다.

애널리티컬 역사학의 등장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1940년대부터 영미권에서는 '애널리티컬 역사학'(analytical history)이 발전했다. 이들은 역사적 설명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고, 역사학의 개념과 방법론을 명확히 하려 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R. G. 콜링우드(R. G. Collingwood), 윌리엄 드레이(William Dray), 아서 단토(Arthur Danto) 등이 있다.

콜링우드는 역사적 이해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그는 역사가가 과거 행위자의 사고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재연'(re-enactment) 이론이다. 역사가는 증거를 통해 과거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는 자연과학의 설명과는 다른, 역사학 고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드레이는 헴펠의 포괄법칙 모델을 비판하며 '합리적 설명'을 제시했다. 역사적 행위는 일반 법칙이 아니라 행위자의 합리성에 의해 설명된다. 특정 상황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것이 합리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역사적 설명의 핵심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개념 분석과 역사학

애널리티컬 역사학자들은 역사학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을 정교하게 분석했다. '원인', '설명', '이해', '객관성' 같은 개념들이 역사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탐구했다. 이들은 역사가들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을 명료하게 만들려 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원인'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시간적으로 앞선 사건이 원인인가? 아니면 필요충분조건을 만족해야 하는가? 역사적 원인은 복수일 수 있는가? 근접 원인과 원격 원인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역사가들이 실제 연구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이다.

단토는 '서사적 문장'(narrative sentence)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나중에 일어난 사건을 참조하여 이전 사건을 기술하는 문장이다. 예를 들어,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의 아버지가 태어났다"라는 문장은 조지 워싱턴의 탄생을 기술하지만, 이는 나중에 일어난 독립전쟁을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서술이다. 이는 역사 서술의 회고적 성격을 보여준다.

실증주의와 분석철학의 한계

랑케식 실증주의와 애널리티컬 역사학은 모두 역사학을 엄밀한 학문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전자는 사료 비판을 통해, 후자는 개념 분석을 통해 역사학의 과학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두 접근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실증주의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은 역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사와 외교사 중심의 역사 서술은 민중의 삶이나 문화적 변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또한 역사가의 해석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역사를 건조한 사실의 나열로 만들 위험이 있었다.

애널리티컬 역사학은 역사학의 논리적 구조를 밝히는 데는 기여했지만, 실제 역사 연구와는 거리가 있었다. 개념 분석에 치중한 나머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서구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새로운 역사학을 향해

20세기 후반부터 역사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회사, 문화사, 미시사 등 다양한 접근법이 등장했다. 이들은 실증주의의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더 넓은 시야와 다양한 방법론을 추구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도 있었다.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역사 서술이 본질적으로 문학적 성격을 띤다고 주장했다. 역사가는 사실들을 플롯으로 구성하고,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랑케의 객관성 이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랑케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다.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토, 증거에 기반한 주장, 학문적 엄밀성의 추구는 여전히 역사학의 기본이다. 다만 이제는 완전한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결론

랑케식 실증주의와 애널리티컬 역사학은 역사학을 근대적 학문으로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역사 연구의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역사적 설명의 논리를 명확히 하려 했다. 비록 완전한 객관성이나 과학적 법칙의 발견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이들의 노력은 역사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현대 역사학은 이들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엄밀한 사료 비판과 논리적 사고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해석의 다양성과 관점의 차이도 인정한다. 역사는 과학이 되려는 시도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