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포스트모더니즘 2. 리오타르의 거대담론 해체와 포스트모던 지식의 조건

SSSCH 2025. 5. 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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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담론의 종언: 리오타르가 진단한 시대적 조건

포스트모던 사상의 중심에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있다. 1979년 출간된 그의 저서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현대 지식의 위상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이란 단순히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가 아니라,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특징지어지는 문화적·인식론적 상황을 의미한다. 근대성을 지탱해온 과학, 진보, 해방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들이 설득력을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 지식은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며, 정당화되는가? 리오타르의 질문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인식론적 위기를 드러낸다.

근대 사회에서 지식은 보편적 진리와 인류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거대담론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계몽주의 이래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이 진리에 도달하고, 그 진리가 인류를 무지와 억압에서 해방시킬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20세기의 역사적 경험—두 차례의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핵무기의 개발—은 이러한 믿음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리오타르는 이제 지식이 더 이상 거대담론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인 '언어게임'의 규칙에 따라 정당화되는 상황을 포스트모던 조건이라 부른다.

지식의 정당화 방식 변화: 서사적 지식에서 과학적 지식으로

리오타르는 지식의 정당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신화, 전설, 구전 등에 의존하는 '서사적 지식(narrative knowledge)'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와 증명에 기초한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서사적 지식이 공동체의 결속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적 지식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서사적 지식은 '미신'이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격하되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지점은 과학적 지식조차도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결국 서사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근대 과학은 '진리를 향한 인류의 진보'라는 서사, 즉 '지식의 메타서사(metanarrative)'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메타서사는 계몽주의적 이상, 헤겔의 정신 변증법,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상황에서는 이러한 메타서사들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인류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은 보편적 진리나 해방의 서사가 아닌, 효율성과 수행성의 원리에 따라 정당화된다.

언어게임과 지식의 다원성

리오타르는 지식의 정당화 문제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언어게임이란 특정한 맥락에서 작동하는 언어 사용의 규칙들을 의미한다. 과학, 윤리, 예술, 종교 등은 각기 다른 언어게임이며, 각각의 게임은 고유한 규칙과 목적을 갖는다.

포스트모던 조건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적인 영역으로 존재한다. 과학적 진리가 윤리적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으며, 미적 가치가 인식론적 타당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이는 단일한 메타언어나 보편적 판단 기준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상황을 '이질성(heterogeneity)'과 '병렬성(paralogy)'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거대담론의 종언은 통일된 진리 체계의 붕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지식 형태와 담론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에게 포스트모던 상황은 다원주의와 창조적 불일치의 시대이다.

수행성(performativity)의 원리와 지식의 상품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점점 더 '수행성(performativity)'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수행성이란 투입 대비 산출의 효율성, 즉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를 의미한다. 과학적 발견의 가치는 진리에 대한 기여보다는 기술 혁신과 경제적 이익 창출 능력에 의해 평가된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경향이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식은 하나의 상품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며, 그 과정에서 지식의 내재적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가 중요해진다. 대학과 연구 기관은 '진리의 탐구'라는 전통적 목표보다 '효율적인 지식 생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정보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가속화된다. 리오타르는 컴퓨터와 데이터베이스의 등장이 지식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지식은 점점 더 디지털화되고, 저장·처리·전송이 가능한 정보의 형태로 변환된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그것을 소유한 주체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유통되는 상품이 된다.

포스트모던 교육과 지식의 정치학

리오타르의 분석은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진다. 근대 교육은 계몽의 이상과 국민 형성이라는 거대담론에 기초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교육의 목적은 '유능한 수행자'의 양성으로 변화한다. 학생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요구받는다.

이러한 변화는 교육의 상품화와 시장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대학은 지식 생산의 중심지가 아닌 지식 상품의 공급자로 기능하며, 학생은 교육의 주체가 아닌 소비자로 위치한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상황이 지식의 비판적·해방적 잠재력을 약화시킨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조건이 반드시 비관적인 전망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의 종언은 지식의 독점과 권위에 대한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리오타르는 '작은 이야기(petit récit)'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는 거대담론과 달리, 작은 이야기들은 국지적이고 맥락적인 지식을 생산하며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허용한다.

디지털 네트워크와 지식의 미래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집필할 당시는 컴퓨터와 정보 기술이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디지털 기술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가져올 혁명적 변화를 정확히 예측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된 오늘날, 그의 통찰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발달은 지식의 탈중심화와 민주화를 가속화했다. 누구나 정보에 접근하고 지식을 생산·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전통적인 지식 권위체가 독점해온 힘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알고리즘과 빅데이터를 통한 새로운 형태의 지식 통제 메커니즘이 등장했다.

리오타르가 우려한 것처럼, 디지털 시대의 지식은 점점 더 수행성과 효율성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 검색 엔진, 추천 알고리즘, AI 시스템은 '유용한' 정보를 선별하고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지식에 대한 우리의 접근과 이해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결론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지식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거대담론의 종언, 지식의 상품화, 수행성의 원리, 디지털 네트워크의 영향 등 그가 분석한 현상들은 오늘날 더욱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모던 상황은 도전인 동시에 기회다. 단일한 진리 체계의 붕괴는 불확실성과 상대주의의 위험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지식 형태와 가치들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리오타르의 통찰은 우리에게 지식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적 자각과 더불어, 이질적인 언어게임들 사이의 대화와 창조적 불일치를 모색하는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지식이 정보로, 교육이 상품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비판이론은 우리에게 지식의 생산과 유통 방식에 내재된 권력 관계를 성찰하고, 다양한 지식 형태들 사이의 정의로운 관계를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인공지능이 발전하는 21세기, 이러한 성찰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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