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sthetics

칸트미학 22. 페미니즘·탈식민 관점에서의 칸트 미학 비판

SSSCH 2025. 5. 6.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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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의 가면: 칸트 미학의 젠더적 편향

칸트의 미학 이론은 '보편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는다. 미적 판단은 단순한 개인적 선호가 아니라 보편적 동의를 요구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 '보편성'이 사실은 특정 집단, 특히 백인 남성 중심의 경험을 보편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캐롤린 코스마이어(Carolyn Korsmeyer)는 『미적 취향의 젠더(Gender and Aesthetic Taste)』에서 칸트의 미학이 은밀히 남성적 경험과 가치를 특권화한다고 지적한다. 가령, 칸트가 말하는 '무관심적 관조'의 태도는 실제 삶의 실천적 문제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특권적 위치를 전제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위치는 주로 경제적·사회적 여유를 가진 남성들에게 허용되었다.

또한 칸트가 '숭고'와 '아름다움'을 구분하면서, 숭고를 남성적 특성과, 아름다움을 여성적 특성과 연결짓는 방식도 문제가 된다. 『판단력비판』에 앞서 쓴 『아름다움과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칸트는 "여성은 숭고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여성을 미적 경험의 특정 영역으로 제한하는 성차별적 관점을 드러낸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크리스틴 바티(Christine Battersby)는 『숭고한 여성(The Sublime Woman)』에서 이러한 젠더화된 미적 범주들이 어떻게 예술사와 비평에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다.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은 '아름답지만 심오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거나, 반대로 '너무 강렬하고 공격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칸트의 미학 이론이 내포한 젠더 편향이 실제 예술 비평과 실천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칸트의 인종적 편견과 미학 이론의 관계

칸트의 인종에 관한 글들이 오늘날 학계에서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의 미학 이론 역시 인종적 편견의 관점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에마누엘 치아 에시엔(Emmanuel Chukwudi Eze)은 『인종과 계몽주의(Race and the Enlightenment)』에서 칸트의 인종 이론이 그의 철학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한다.

칸트는 인간 종족을 네 가지로 구분하고, 백인 유럽인을 가장 완전한 종족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인종적 위계는 그의 미학 이론에서 말하는 '취미의 보편성'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인종적 편견을 가진 철학자가 보편적 미적 판단의 가능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로버트 베르나스코니(Robert Bernasconi)는 『취미의 인종화(Racializing Taste)』에서 이 모순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칸트의 '보편성' 개념은 사실 특정 문화권, 즉 유럽 문화권 내에서의 보편성에 불과하다. 다른 문화권의 미적 판단과 취향은 '미개한' 또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진정한 보편성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비판은 칸트 미학의 '보편성' 개념이 사실은 유럽중심주의적 편견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칸트가 말하는 '취미의 표준'은 유럽 문화의 특수한 미적 가치를 보편화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글로벌한 맥락에서 미학을 생각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비판이다.

무관심성과 특권: 사회경제적 비판

칸트의 '무관심적 관조' 개념은 페미니즘적 비판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도 비판받는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미학 이데올로기(The Ideology of the Aesthetic)』에서 칸트의 무관심성 개념이 특권적 계급 위치를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이글턴에 따르면, 예술을 '무관심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은 일상적 생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특권이다. 노동자 계급이나 식민지 피지배자들은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이들에게 예술과 미적 경험은 종종 생존과 저항의 도구로서 실용적 관심과 분리될 수 없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구별짓기(Distinction)』에서 이러한 비판을 경험적 연구로 뒷받침한다. 그는 '무관심적' 취미가 사실은 높은 교육 수준과 문화 자본을 가진 계층의 사회적 구별짓기 전략임을 보여준다. 이는 칸트가 주장한 취미의 보편성과 순수성이 사실은 계급적 편향에 기초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비판은 칸트 미학의 탈역사적, 탈맥락적 성격을 문제 삼는다. 미적 판단은 순수한 형식적 조화나 무관심적 쾌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티(Battersby)와 '여성적 숭고'의 재해석

크리스틴 바티는 칸트의 미학 이론을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창조적으로 재해석한다. 그녀의 『젠더와 천재(Gender and Genius)』와 『현상학적 여성(The Phenomenal Woman)』은 칸트의 '숭고' 개념을 여성적 경험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바티에 따르면, 여성의 몸과 경험은 전통적인 미학 이론에서 타자화되고 배제되어 왔다. 특히 출산과 같은 여성적 경험은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주변화되었다. 그러나 바티는 이러한 경험이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숭고'를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적 숭고는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이다. 이는 칸트가 말하는 전통적 숭고와는 다르다. 칸트의 숭고에서 주체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일시적으로 위협받지만, 결국 이성의 우월성을 확인하며 자아를 강화한다. 반면, 여성적 숭고는 자아의 경계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경험을 포함한다.

이러한 재해석은 칸트 미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동시에, 그 개념적 틀을 창조적으로 변형하고 확장한다. 이는 페미니즘 미학이 단순히 비판적 해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미학적 범주와 개념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야트리 스피박과 '미적 교육'의 탈식민적 비판

후기 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은 『포스트식민주의 이성 비판(A Critique of Postcolonial Reason)』에서 칸트의 미학 이론이 식민주의적 프로젝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미적 교육' 이상은 식민지 주체들을 '문명화'하는 제국주의적 기획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칸트가 말하는 '미적 공통감(sensus communis)'은 표면적으로는 보편적 소통 가능성을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유럽적 가치와 감수성을 특권화한다. 비유럽인들은 이 '공통감'의 영역에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감수성을 포기하고 유럽적 기준을 내면화해야 한다.

스피박은 이러한 '미적 교육'의 폭력성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가진 해방적 가능성도 탐색한다. 그녀에 따르면, 미적 경험의 영역은 지배적 담론에 저항하고 대안적 주체성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다. 이는 칸트 미학의 식민주의적 측면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탈식민적 실천을 위해 전유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접근이다.

공간과 시간의 식민화: 칸트 철학의 근본적 문제

니콜라스 미르조프(Nicholas Mirzoeff)는 『시각의 권리(The Right to Look)』에서 칸트 철학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공간과 시간의 선험적 직관 형식에 관한 이론이 식민주의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칸트에게 공간과 시간은 모든 인간 경험의 보편적 조건이지만, 미르조프는 이러한 '보편성'이 사실은 유럽중심주의적 세계 인식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칸트의 선형적 시간 개념은 모든 사회가 동일한 발전 경로를 따른다는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뒷받침한다. 이는 비유럽 사회를 '전근대적'이거나 '미개발된' 상태로 규정하며, 이들에 대한 식민적 지배를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미학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식민화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칸트가 말하는 미적 경험의 시공간적 조건은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는 비서구적 미학 전통과 실천이 '진정한'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칸트 미학 비판을 넘어, 그의 철학 전체의 식민주의적 기반을 문제 삼는다. 이는 현대 미학이 진정으로 탈식민적, 탈유럽중심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근본적인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한다.

'순수한 형식'의 정치학: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칸트주의의 유산

20세기 미술비평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형식주의 비평은 칸트 미학의 현대적 계승으로 볼 수 있다. 그린버그는 추상표현주의를 옹호하면서 예술의 '매체 특정성'과 '순수한 형식'을 강조했다. 이는 칸트가 말하는 '무관심적 관조'와 형식에 대한 강조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후기 식민주의와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이러한 '순수한 형식'의 강조가 사실은 깊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고 비판한다.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과 같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은 형식주의 비평이 예술작품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기존의 권력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본다.

후기 식민주의 관점에서도 '순수한 형식'에 대한 강조는 비서구 예술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탈각시키고, 이를 서구 미학적 기준으로만 평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의 한 형태로, 비서구 예술의 복잡성과 고유성을 무시하는 폭력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칸트의 형식주의적 미학이 20세기 예술 담론과 실천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 영향의 정치적 함의를 성찰하게 한다. '순수한 형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특정한 권력 관계와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 비판의 핵심이다.

감성의 식민화와 미적 저항

아체 음베베(Achille Mbembe)는 『포스트콜로니(On the Postcolony)』에서 식민주의가 단순히 영토와 자원의 점령이 아니라, 식민지 주체들의 '감성(sensibility)'과 상상력의 식민화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감성의 식민화'는 칸트의 미학 이론이 비서구 사회에 적용될 때 어떤 효과를 낳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음베베에 따르면, 식민 권력은 피식민자들의 감각적 경험과 미적 판단의 기준을 재편함으로써 그들의 주체성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킨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미적 실천과 가치들은 '원시적'이거나 '미개한' 것으로 폄하되고, 서구적 미적 기준이 '보편적'이고 '문명화된' 것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음베베는 이러한 감성의 식민화에 대한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도 강조한다. 피식민자들은 종종 지배적인 미적 규범을 창조적으로 전유하고 변형시킴으로써 대안적인 미적 실천과 주체성을 발전시킨다. 이는 칸트 미학의 식민주의적 측면에 대한 비판을 넘어, 미적 경험이 탈식민적 저항과 해방의 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접근이다.

벨 훅스와 '전복적 미학'의 가능성

페미니스트 이론가 벨 훅스(bell hooks)는 『예술 안에서: 교육으로서의 미적 발전(Art on My Mind: Visual Politics)』에서 지배적인 미학 이론(칸트의 이론 포함)에 대한 비판과 함께, 억압받는 집단들의 '전복적 미학(transgressive aesthetics)'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훅스에 따르면, 전통적인 미학 이론은 젠더, 인종, 계급의 교차성을 간과하고, 특권적 집단의 경험과 가치를 보편화한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이러한 이론을 거부하는 대신, 이를 비판적으로 전유하고 변형하여 해방적 실천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모색한다.

특히 훅스는 흑인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전복적 미학'에 주목한다. 이들은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기대를 의식적으로 위반하고 교란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성과 공동체성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는 칸트의 '무관심적 관조'와는 대조적으로, 정치적 참여와 윤리적 책임을 미적 경험의 중심에 놓는 접근이다.

훅스의 '전복적 미학'은 칸트 미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미적 경험의 변혁적 잠재력을 긍정한다. 이는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미학이 단순한 비판을 넘어, 대안적인 미적 실천과 이론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결론: 비판 너머의 대화를 향하여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의 칸트 미학 비판은 단순히 칸트의 이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서구 철학의 지배적 전통이 어떻게 특정 집단과 경험을 특권화하고 다른 집단과 경험을 주변화했는지를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다.

동시에 이러한 비판은 칸트 미학의 해방적 가능성도 탐색한다. 칸트가 말하는 '반성적 판단'의 자유로움, 미적 경험의 비도구적 성격, 상상력의 창조적 잠재력 등은 지배적 담론에 저항하고 대안적 세계를 상상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의 칸트 미학 비판은 일방적인 거부가 아니라, 비판적이면서도 생산적인 대화의 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칸트의 이론적 유산을 더 포용적이고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하고 변형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단일한 '보편적' 미학 이론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발전한 복수의 미학적 전통과 실천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원적 미학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의 칸트 미학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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