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비교철학 1. 동서양 사유의 경계를 넘어 - '비교철학'의 의의와 방법론적 성찰

SSSCH 2025. 4. 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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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vs 서양'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철학의 세계에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구분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이런 구분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동양철학'이라는 범주 속에는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서로 매우 이질적인 사유 전통들이 뭉뚱그려져 있다. 인도의 베단타 철학과 중국의 도가 사상은 서로 간에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는데, 이를 하나의 '동양' 범주로 묶는 것은 너무 단순한 접근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서양철학'이라 할 때도 고대 그리스 철학, 중세 스콜라 철학, 독일 관념론, 영미 분석철학 등 서로 큰 차이를 보이는 사상들을 한데 묶고 있다.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은 '서양'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분류일까? 이런 단순한 이분법은 사실 19세기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의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타자'를 규정하면서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강조했듯이, '동양'은 서구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신비롭고 비합리적이며 정체된 세계로 규정한 일종의 '상상된 타자'였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실제 다양한 문화권의 사유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

비교철학의 탄생과 발전

비교철학(Comparative Philosophy)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20세기 초반부터 발전해 온 철학의 한 분야다. 초기 비교철학은 주로 서양 학자들이 동양 사상을 '발견'하고 이를 서양철학의 틀에 맞춰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자칫 서구중심주의적 편향을 그대로 답습할 위험이 있었다.

1930-40년대 하와이대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동서 철학 대화가 시작되었고, 찰스 무어(Charles A. Moore)가 창간한 『동서철학(Philosophy East and West)』은 비교철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기 비교철학은 주로 개념과 용어의 비교, 상이한 문화권의 유사한 철학적 주제 탐구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1960-7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교철학은 더욱 세련된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특히 알래스데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전통 간 합리성(inter-traditional rationality)' 개념이나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해석학적 전환'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발전한 철학 전통들 간의 대화 가능성을 모색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탈식민주의와 지구화의 영향으로 비교철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이나 로저 에임스(Roger T. Ames) 같은 학자들은 단순히 동서양의 개념을 비교하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사유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시도했다. 최근에는 '상호문화철학(Intercultural Philosophy)'이라는 새로운 명칭도 등장했는데, 이는 단순한 '비교'를 넘어 다양한 철학 전통 간의 적극적인 대화와 교류를 강조한다.

한국에서도 김형효, 박종홍, 정인재 등의 학자들이 1980년대부터 비교철학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최근에는 박찬국, 이진우, 조은수 등 다양한 학자들이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한국은 유교, 불교, 도교의 전통과 서양 근대철학이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경험이 있어 비교철학의 흥미로운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철학의 핵심 개념: '비교', '번역', '교섭'

비교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핵심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교(Comparison)

'비교'란 단순히 두 대상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나열하는 작업이 아니다. 진정한 철학적 비교는 서로 다른 개념 체계와 사유 방식을 맞대면시킴으로써 각 전통의 전제와 한계를 드러내고, 새로운 통찰을 얻는 과정이다. 비교는 항상 특정한 관점과 목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완전히 중립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비교철학자는 자신의 비교 작업이 갖는 편향과 한계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아'라는 개념을 비교할 때 서양 근대철학의 '자율적 주체' 개념과 불교의 '무아(無我)' 개념은 단순히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문화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른 문제의식에 대응하며 발전해온 사유 방식이다. 이 둘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자아'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번역(Translation)

비교철학에서 '번역'은 단순히 언어 간의 전환이 아니라, 한 사유 체계의 개념을 다른 체계의 맥락에서 재구성하는 복잡한 작업이다. 월터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모든 번역은 원본의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그것을 새로운 언어적·문화적 맥락에 '재배치'하는 창조적 행위다.

예컨대 중국 철학의 핵심 개념인 '도(道)'를 영어로 번역할 때, 'Way', 'Path', 'Principle'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지만 어느 것도 '도'의 복합적 함의를 완벽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러한 '번역 불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서로 다른 철학 전통 간의 대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번역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잉여'와 '결핍'이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교섭(Negotiation)

'교섭'은 서로 다른 철학 전통 간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개념 비교나 일방적 영향 관계를 넘어, 다양한 사유 방식이 서로 부딪히고 변형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이러한 교섭은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도가 사상과 만나 선종(禪宗)이라는 새로운 사유 형태를 낳았듯이, 철학적 전통들은 서로 만나 변용되고 발전해왔다.

현대에는 이런 교섭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현상학과 불교 명상 전통 사이의 대화, 생태철학과 동아시아 자연관의 접목, 인지과학과 동양의 심신수행 전통의 만남 등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교섭은 단순히 기존 철학의 '응용'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여는 창조적 과정이다.

방법론적 성찰 ① - 해석학과 언어철학

비교철학의 첫 번째 중요한 방법론적 기반은 해석학과 언어철학이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진리와 방법』에서 '해석학적 원환(hermeneutic circle)'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이해가 선이해(pre-understanding)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전통과 언어적 맥락 속에서 세계를 해석하며, 완전히 객관적인 이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비교철학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우리가 다른 문화의 철학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항상 자신의 문화적 선이해를 통해 그것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다머가 제시한 '지평 융합(fusion of horizons)' 개념은 서로 다른 문화적 지평이 대화를 통해 확장되고 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가다머의 해석학은 중국 철학의 전통적 개념인 '도선생(道先生)'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청대 학자 왕부지(王夫之)는 '도'가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선험적 원리이자,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는 가다머가 말하는 '전통'과 '역사적 의식'의 관계와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두 사상가 모두 이해와 해석이 특정한 전통 속에서 이루어지면서도, 그 전통 자체가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변화한다는 역설을 포착하고 있다.

또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game)' 개념이나 윌러드 콰인의 '번역의 불확정성' 테제도 비교철학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가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과 생활양식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철학적 개념들이 각각의 '언어게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불교의 '공(空)' 개념은 단순히 '비어있음'이나 '무'로 번역될 수 없으며, 불교 전통의 특정한 언어게임 속에서 그 의미가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서양 철학의 '존재(Being)'나 '진리(Truth)' 개념도 특정한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발전한 사유 방식이다.

이처럼 해석학과 언어철학은 비교철학이 서로 다른 사유 전통 간의 차이를 단순히 없애려 하지 않고, 그 차이 자체를 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 언어와 전통, 선이해의 차이가 철학적 대화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풍요로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방법론적 성찰 ② - 상호 변용(互變容)과 다중근대성

비교철학의 두 번째 중요한 방법론적 패러다임은 '상호 변용(互變容, mutual transformation)'과 '다중근대성(multiple modernities)' 개념이다.

상호 변용 모형

한국의 비교철학자들, 특히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상호 변용' 모형은 단순한 비교를 넘어 철학 전통 간의 창조적 만남에 주목한다. 이 모형에 따르면, 서로 다른 철학 전통이 만날 때 단순히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미치는 일방향적 관계가 아니라, 양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 변화하는 쌍방향적 과정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한국 근대 철학자 박종홍은 헤겔과 칸트의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한국적 맥락에서 재해석했다. 그는 서양 관념론의 '정신' 개념을 한국의 전통적 '마음(心)' 개념과 접목하여 독특한 '심본체론(心本體論)'을 발전시켰다. 이는 단순히 서양 철학의 '수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철학 전통 간의 창조적 대화였다.

이러한 상호 변용 모형은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평등한 철학적 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이 모형은 철학 전통들이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전통들과의 교류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중국 불교가 인도 불교와 다르고, 한국 유교가 중국 유교와 다른 것처럼, 모든 철학 전통은 끊임없는 상호 변용의 과정 속에 있다.

다중근대성 논의

'다중근대성(multiple modernities)' 개념은 사회학자 슈무엘 아이젠슈타트(S. N. Eisenstadt)가 제안한 것으로, 근대성이 서구의 단일한 모델을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회의 문화적·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서양 근대철학이 발전시킨 주체성, 합리성, 자유, 진보 등의 개념들은 아시아 사회에서도 수용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서구화'가 아니라 각 사회의 전통적 사유와 결합하여 독특한 형태의 근대적 사유를 낳았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중국의 '신문화운동'은 서구 자유주의와 과학 정신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중국의 전통적 '도덕적 자아' 개념과 결합시켰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교토학파'는 하이데거나 니체 같은 서양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사유를 불교와 일본 전통 사상의 맥락에서 재해석했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절대무(絶對無)' 개념은 서양 현상학과 선불교의 창조적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함석헌, 김지하, 박이문 등 많은 사상가들이 서양 근대성의 개념들을 한국의 전통 사상과 접목하여 독특한 사유를 발전시켰다. 특히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서양의 인격주의와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결합한 독창적인 철학으로, 한국적 다중근대성의 좋은 사례다.

이러한 다중근대성 관점은 비교철학이 단순히 서양 철학의 '보편성'을 전제로 다른 철학 전통을 평가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각 문화권의 철학 전통은 자신만의 역사적 경로를 통해 근대성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면서, 인류 사유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교철학의 미래를 향해

비교철학은 이제 단순한 '동양과 서양의 비교'라는 좁은 틀을 넘어, 보다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상호문화철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방법론적 성찰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권의 철학 전통들이 평등한 대화 속에서 서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특히 기후위기, 인공지능, 생명윤리 등 인류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들은 어느 한 철학 전통만으로는 충분히 대응하기 어려운 복합적 문제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교철학적 접근은 다양한 사유 전통의 지혜를 활용하여 보다 창의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에 대응할 때, 서양의 생태철학과 동아시아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 불교의 연기(緣起) 개념 등을 접목하면 보다 풍부한 생태윤리의 틀을 구축할 수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기술 발전이 가져온 인간성의 위기에 대응할 때도, 서양의 인간중심주의와 동양의 무아(無我) 사상 간의 대화가 새로운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비교철학은 또한 철학 자체의 자기반성을 촉진한다. 다른 문화권의 사유 방식을 접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철학적 전제와 한계를 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반성은 철학이 특정 문화적 맥락을 넘어 진정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결국 비교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인류의 다양한 사유 전통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철학적 대화'의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문화권의 철학이 다른 문화권의 철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철학 전통이 서로의 한계를 보완하며 인류의 철학적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대화는 철학의 '다양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긴장 자체를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역동적 과정이다. 비교철학은 이처럼 철학의 문화적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문화를 가로지르는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함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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