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Philosophy of Art

예술철학 15. 형식주의와 '순수미술' 논쟁: 유의미한 형식과 내용 배제의 역설

SSSCH 2025. 4. 2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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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주의 미학의 등장 배경과 문화적 맥락

20세기 초 영국에서 클라이브 벨과 로저 프라이를 중심으로 발전한 형식주의 미학은 당시 급변하는 예술계와 문화적 환경에 대한 이론적 반응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예술은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큐비즘, 추상표현주의 등 혁신적 운동들을 통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전통적 재현 방식에서 벗어난 이 새로운 예술 경향들은 기존의 미메시스 중심 미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형식주의 미학은 이런 새로운 예술 현상, 특히 세잔, 고갱, 마티스,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의 혁신적 작업을 이해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로저 프라이는 1910년과 1912년 런던에서 "후기인상주의" 전시회를 기획하며 이런 새로운 예술 경향을 영국 대중에게 소개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주의 미학의 기본 개념들이 정립되었다.

동시에 형식주의는 19세기 지배적이었던 두 가지 미학적 접근—낭만주의적 표현주의와 사실주의적 재현론—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낭만주의가 예술가의 감정과 주관적 경험을, 사실주의가 외부 현실의 객관적 재현을 강조했다면, 형식주의는 예술 작품 자체의 형식적 특성에 주목했다. 이는 예술의 자율성과 자기참조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미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형식주의는 당시 발전하던 학문적 경향—심리학의 게슈탈트 이론, 언어학의 구조주의적 접근—과도 공명했다. 이런 학문들이 심리 현상이나 언어를 그 내적 구조와 관계를 통해 이해하려 했듯이, 형식주의도 예술을 그 내재적 형식과 구조를 통해 파악하려 했다.

클라이브 벨과 '유의미한 형식(Significant Form)' 개념

형식주의 미학의 핵심 개념은 클라이브 벨이 1914년 저서 『예술(Art)』에서 제시한 '유의미한 형식(Significant Form)'이다. 벨에 따르면, 모든 진정한 예술 작품은 특별한 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유의미한 형식"을 갖는다. 이 형식은 선, 색, 공간, 질감과 같은 시각적 요소들의 특정한 배열과 관계를 의미한다.

"유의미한 형식이란 색과 선의 특정한 조합과 관계로, 미적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벨의 이 정의는 예술의 본질을 그 형식적 특성에서 찾는 관점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이 무엇을 재현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형식적 관계를 구현하는지였다.

벨의 이론에서 미적 감정은 일상적 감정이나 실용적 관심과 구별되는 특별한 심리 상태다. 그것은 작품의 주제나 문화적 맥락, 도덕적 함의와 무관하게, 순수하게 그 형식적 특성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한다. 이런 미적 감정은 보편적이며, 따라서 모든 시대와 문화의 진정한 예술 작품은—그것이 르네상스 회화든, 아프리카 조각이든, 현대 추상화든—동일한 미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벨은 주장한다.

벨의 "유의미한 형식" 개념은 예술을 정의하는 동시에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진정한 예술 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것이 "유의미한 형식"을 갖는지, 즉 특별한 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여부다. 이런 관점에서 벨은 사실주의 회화나 문학적 내용이 강한 그림들을 종종 "참된 예술"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로저 프라이의 미학 이론과 형식적 분석

로저 프라이는 벨의 동료이자 영향력 있는 미술 비평가로, 형식주의 미학을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저서 『시각과 디자인(Vision and Design)』(1920)과 『변형의 의미(Transformations)』(1926)는 형식주의적 분석의 주요 텍스트가 되었다.

프라이는 예술 감상에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시각을 구분한다: "실제적 시각(actual vision)"과 "상상적 시각(imaginative vision)". 전자는 일상적 인식과 관련된 실용적 시각이고, 후자는 순수하게 형식적 관계를 인식하는 미적 시각이다. 프라이에게 예술 감상은 실용적 관심에서 벗어나 "상상적 시각"으로 작품의 형식적 특성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이는 또한 작품의 형식적 분석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예술 작품의 '디자인' 요소들—리듬, 질감, 색채 관계, 공간 구성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접근법을 제시했다. 이 방법론은 후대 미술 교육과 비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벨과 달리, 프라이는 예술 작품의 심리적, 문화적 맥락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예술가의 창작 과정과 작품의 역사적 맥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품의 본질적 가치는 그 형식적 특성에 있다고 믿었다. 프라이는 특히 세잔의 작품에서 형식적 구성과 디자인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형식주의 미학의 전형적 사례로 분석했다.

'순수미술'의 이념과 자율성의 정치학

형식주의는 '순수미술(pure art)'의 이념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개념은 예술이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실용적 목적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영역이라는 생각을 강조한다. 순수미술은 그 자체의 내적 법칙과 가치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며, 외부적 기준—도덕적 교화, 정치적 선전, 장식적 효용—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예술의 자율성 개념은 19세기 말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 운동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형식주의는 이를 더 체계적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순수미술 이념은 단순한 미학 이론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그것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 산업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며, 예술의 비실용적, 비도구적 가치를 옹호한다.

순수미술 개념은 또한 모더니즘 예술의 자기비판적 성격과 연결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벨과 프라이의 형식주의를 발전시켜, 모더니즘을 각 예술 형식이 자신의 매체적 특성을 자기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그에게 "순수미술"은 다른 예술 형식이나 외부 현실을 참조하지 않고, 자신의 매체적 특성만을 탐구하는 예술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율성 주장은 역설적으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고, 예술을 사회적 현실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예술의 자율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상품화와 제도화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티어리 드 듀브와 같은 이론가들은 순수미술 이념이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 통합시키는 역설적 효과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내용 배제(disinterestedness)와 그 비판

형식주의 미학의 가장 논쟁적인 측면은 예술 작품의 내용, 맥락, 의미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그 형식적 특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벨은 『예술』에서 "재현적 요소는 그림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으며...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까지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요소가 없는 순수 시각 예술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 배제(disinterestedness) 원칙은 칸트의 "무관심적 관조(disinterested contemplation)"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칸트에게 미적 판단은 대상의 존재나 효용에 대한 관심과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형식주의자들은 이 개념을 더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예술 작품의 주제, 내러티브, 역사적 맥락, 도덕적 메시지까지 미적 판단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 배제 원칙은 다양한 비판에 직면했다. 첫째, 그것은 많은 위대한 예술 작품의 중요한 측면을 무시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피카소의 『게르니카』,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같은 작품들은 그 형식적 탁월함과 주제적 깊이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째, 내용 배제 원칙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발전한 서구 모더니즘의 가치를 보편화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비서구 문화 전통에서는 예술의 형식과 내용, 미적 가치와 종교적, 사회적 기능이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다. 형식주의적 접근은 이런 다양한 예술 실천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형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형식적 감상"은 실제로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인간의 지각과 인식은 항상 개념, 관념, 맥락에 의해 매개된다. 따라서 완전히 내용과 맥락에서 분리된 순수한 형식적 감상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넷째, 내용 배제 원칙은 예술의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차원을 간과한다. 예술은 역사적으로 사회적 비판, 정치적 저항, 도덕적 성찰의 중요한 매체였다. 이런 측면을 배제하면 예술의 많은 중요한 기능과 가치가 무시된다.

생활양식으로서의 형식주의와 블룸즈버리 그룹

형식주의 미학은 단순한 예술 이론을 넘어, 벨과 프라이가 속했던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의 광범위한 문화적, 지적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리턴 스트레이치, 메이너드 케인스 등이 참여한 이 지식인 집단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주의와 공리주의를 거부하고, 개인의 미적 경험과 지적 자유를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했다.

블룸즈버리 그룹에게 형식주의 미학은 단순한 예술 감상의 방법론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그들은 삶의 모든 측면—친구 관계, 사랑, 지적 교류, 일상 환경—에서 형식적 관계와 미적 질을 중시했다. 이는 공리주의적 효율성과 빅토리아식 도덕 규범에 대한 대안적 삶의 방식을 의미했다.

벨 자신이 『예술』에서 "미적 감정이 삶에서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라고 선언했듯이, 형식주의는 미적 경험의 고양된 가치와 자율성을 옹호하는 삶의 철학이었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이런 미적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적, 사회적 실천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비판에도 직면했다. 블룸즈버리 그룹의 형식주의적 생활양식은 상류층 특권에 기반한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비롯한 비평가들은 그들의 미적 자율성 강조가 실제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형식주의적 생활양식은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과 대공황 이후 사회적, 정치적 위기 속에서 설득력을 잃어갔다. 1930년대 들어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사회적 참여와 정치적 헌신을 강조하면서, 순수한 미적 태도에 기반한 블룸즈버리식 접근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형식주의와 현대 추상미술의 발전

형식주의 미학은 20세기 추상미술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벨과 프라이의 이론은 세잔 이후 발전한 큐비즘, 구성주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비재현적 예술 경향을 이해하고 정당화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특히 형식주의는 추상미술의 정당성과 가치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외부 현실의 재현 능력으로 평가되었지만, 형식주의는 순수한 형식적 관계 자체가 미적 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말레비치와 같은 추상화가들의 작업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 칸딘스키의 표현주의적 추상은 벨의 "유의미한 형식"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는 재현적 내용이 최소화되거나 사라지고, 순수한 형식적 관계—선, 색, 면의 배열—가 중심이 된다.

형식주의의 영향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색면 회화(Color Field Painting)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벨과 프라이의 형식주의를 발전시켜 폴록, 드 쿠닝, 로스코, 뉴먼과 같은 작가들의 작업을 분석했다. 그에게 이들의 작품은 회화의 본질적 특성—평면성, 색채, 물질성—을 탐구하는 자기비판적 실천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등장한 팝아트,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의 경향은 형식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들 운동은 순수한 형식적 관계보다 문화적 맥락, 관념적 내용, 제도적 비판을 강조했다. 이는 예술계 내에서 형식주의의 영향력 쇠퇴를 가져왔다.

제롬 스톨니츠와 미학적 태도 이론

미국 미학자 제롬 스톨니츠(Jerome Stolnitz)는 『미학과 예술비평의 철학(Aesthetics and Philosophy of Art Criticism)』(1960)에서 벨과 프라이의 형식주의를 "미학적 태도(aesthetic attitude)"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스톨니츠에게 미학적 태도는 "대상의 본질과 특성을 그 자체로,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고, 무관심적이고 공감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스톨니츠는 미학적 태도를 실용적, 인지적, 도덕적, 개인적 태도와 구분한다. 미학적 태도는 대상을 도구적 가치, 지식 획득, 도덕적 판단, 개인적 연관성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순수하게 그 내재적 특성에 집중한다.

스톨니츠의 이론은, 미학적 태도가 특별한 종류의 대상(예술 작품)에만 한정되지 않고, 원칙적으로 모든 대상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벨의 형식주의를 확장한다. 일상적 사물, 자연 풍경, 인간 행동도 미학적 태도로 바라보면 미적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는 미적 경험의 범위를 확장하고 민주화하는 함의를 갖는다.

그러나 조지 디키(George Dickie)는 유명한 논문 「미학적 태도의 신화(The Myth of the Aesthetic Attitude)」(1964)에서 스톨니츠의 이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디키는 소위 "미학적" 태도와 "비미학적" 태도의 구분이 실질적 차이가 아니라, 단지 주의 집중의 정도 차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무관심적 관조"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다.

디키의 비판은 형식주의 미학에 대한 더 광범위한 비판의 일부로, 이후 제도론적, 맥락적 예술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스톨니츠의 미학적 태도 개념은 예술 교육과 감상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내용과 맥락의 귀환: 현대 비판과 재평가

19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문화연구 등의 관점에서 형식주의 미학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런 비판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형식주의의 보편주의적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형식주의는 모든 시대와 문화의 예술이 동일한 형식적 원리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들은 이런 보편주의가 사실상 서구 중심적 가치의 부당한 일반화라고 지적한다. 각 문화와 시대는 고유한 미적 가치와 실천을 가지며, 이를 단일한 형식주의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둘째, 형식주의의 탈정치화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형식주의는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차원을 괄호 안에 넣음으로써, 예술을 현실의 권력 관계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런 분리가 예술 내의 젠더, 인종, 계급 불평등을 비가시화한다고 비판한다. 린다 노클린, 그리젤다 폴록 등은 기존의 형식주의적 미술사가 여성 예술가의 배제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셋째, 순수한 형식적 감상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네오-맑스주의, 정신분석, 기호학 등의 관점에서, 모든 지각과 해석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맥락에 의해 매개된다. 따라서 순수하게 형식적 특성만을 지각하는 "무관심적 관조"는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형식주의를 단순히 거부하기보다, 그것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들도 나타나고 있다. 캐롤린 코스마이어, 리처드 월하임, 아서 단토 등의 이론가들은 형식과 내용, 미적 경험과 해석, 자율성과 사회적 관련성을 대립시키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특히 코스마이어의 "내용 있는 형식(form-with-content)" 개념은 형식주의의 통찰을 유지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다. 그녀에 따르면, 예술 작품의 형식적 특성은 그 내용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형식은 내용을 구현하고 표현한다. 이런 관점은 형식주의의 극단적 내용 배제를 거부하면서도, 형식적 분석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디지털 시대의 형식주의: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

디지털 기술과 새로운 미디어의 발전은 형식주의 미학에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을 제시한다. 디지털 예술, 인터랙티브 미디어, 가상현실, 알고리즘 기반 창작은 전통적인 형식 개념의 재고를 요구한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형식"은 더 이상 정적이고 고정된 배열이 아니라, 상호작용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 된다. 인터랙티브 작품에서는 관객의 참여가 작품의 형식적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벨과 프라이가 상정한 작품과 관객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흐린다.

디지털 예술의 경우, 코드와 알고리즘이 새로운 종류의 "형식적 요소"가 된다. 소프트웨어 미학(software aesthetics)은 프로그래밍 구조, 데이터 패턴, 알고리즘적 프로세스를 미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유의미한 형식'의 개념을 눈에 보이는 시각적 특성 너머로 확장한다.

인공지능 예술의 등장은 형식주의의 핵심 가정 중 하나—창작 의도의 중요성—에 도전한다. 생성형 AI 시스템이 만든 작품에서 '유의미한 형식'은 인간 예술가의 의도적 구성이 아닌, 알고리즘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이는 예술적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또한 디지털 환경에서는 원본과 복제,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디지털 이미지는 무한히 복제 가능하며, 동일한 코드에서 다양한 시각적 구현이 가능하다. 이는 형식주의가 전제하는 작품의 물질적 완결성과 통일성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디지털 미디어는 형식주의 미학의 새로운 적용 가능성도 제시한다. 데이터 시각화, 제너레이티브 아트, 알고리즘 미학은 기존의 형식적 분석 방법을 새로운 맥락에서 활용한다. 레브 마노비치와 같은 이론가들은 "소프트웨어 연구(software studies)"를 통해 디지털 형식의 특성과 미학을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형식주의 미학의 현대적 의의와 유산

오늘날 순수한 형태의 형식주의는 거의 지지되지 않지만, 그 통찰과 방법론은 여전히 현대 미학과 예술 실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형식주의의 유산은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미술 교육과 비평에서 형식적 분석은 여전히 핵심적 방법론이다. 학생들은 구성, 색채, 선, 질감과 같은 형식적 요소를 분석하는 법을 배우며, 이는 다양한 미적 전통과 스타일을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형식적 분석은 내용과 맥락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균형 잡힌 예술 이해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받는다.

둘째, 다양한 현대 미학 이론들이 형식주의의 통찰을 비판적으로 통합한다. 네오-형식주의, 현상학적 미학, 인지 미학 등은 형식적 특성과 미적 경험의 관계를 보다 복잡하고 맥락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리처드 월하임의 "보기-속에서(seeing-in)" 개념이나 켄달 월튼의 "믿는-체하기(make-believe)" 이론은 형식과 내용, 지각과 해석의 관계를 새롭게 이론화한다.

셋째, 디지털 문화와 신경미학의 발전은 형식적 특성에 대한 지각적 반응을 새롭게 이해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경미학 연구는 특정 형식적 패턴이나 구성이 뇌의 특정 영역을 활성화시키는 방식을 탐구한다. 이는 형식주의가 주장한 "미적 감정"의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관점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시각문화와 디자인 연구에서 형식주의적 접근은 일상적 시각 경험과 디자인 실천을 분석하는 중요한 도구다. 현대 디자인, 광고, UX/UI 등의 영역에서 형식적 원리의 적용과 효과는 지속적인 연구 주제다.

형식주의 미학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아마도 예술작품의 내재적 특성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과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일 것이다. 예술을 단순히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의 산물로 환원하지 않고, 그 고유한 형식적 특성과 그것이 일으키는 특별한 경험에 주목할 필요성을 일깨운 것이다.

동시에 현대 미학은 형식과 내용, 자율성과 맥락성, 보편성과 역사성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을 넘어, 이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형식주의의 비판적 재해석은 이런 통합적 이해를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21세기 예술과 미디어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벨과 프라이의 원래 형식주의를 넘어서되, 그들이 강조한 형식적 특성과 미적 경험의 중요성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런 균형 잡힌 접근만이 현대 예술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충분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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