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종교철학 9.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고전적 신정론과 전통적 해결책들

SSSCH 2025. 4. 1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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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 종교철학의 영원한 난제

"만약 신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이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아마도 종교철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도전 중 하나일 것이다. 전통적인 유신론, 특히 아브라함계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는 신을 전지(全知), 전능(全能), 그리고 완전히 선한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을 가진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악과 고통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라고 불리는 것이다.

악의 문제는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인 문제이며, 전쟁, 질병, 자연재해, 개인적 비극 등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직면하는 심오한 질문이다. 고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왜?"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종종 신학적, 철학적 탐구로 이어진다.

이번 글에서는 악의 문제의 본질과 이에 대한 고전적인 응답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로 대표되는 전통적 신정론(theodicy)을 살펴본다. 신정론이란 '신의 정의(正義)'를 변호하는 시도, 즉 세상에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함과 정의를 옹호하려는 철학적, 신학적 노력을 말한다.

악의 문제의 논리적 구조

악의 문제는 크게 '논리적 문제(logical problem)'와 '증거적 문제(evidential problem)'로 구분된다. 이 두 가지 형태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논리적 악의 문제

논리적 악의 문제는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모순적 삼각형의 형태로 제시된다:

  1. 신은 전능(omnipotent)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2. 신은 완전선(omnibenevolent)하다. (완전히 선하다)
  3. 악이 존재한다.

이 세 명제는 함께 모순을 형성한다고 여겨진다. 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신이라면 악을 제거할 수 있고(전능) 또 제거하려 할 것(완전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악이 존재한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거나, 완전히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논리적 악의 문제는 J.L. 매키(J.L. Mackie)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매키는 유신론자들이 이 세 명제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증거적 악의 문제

증거적 악의 문제는 조금 더 완화된 형태로, 악의 존재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신의 존재 가능성을 크게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로우(William Rowe)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 정당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끔찍한 고통이 존재한다.
  2. 전지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존재라면 정당한 이유 없이 끔찍한 고통이 발생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3. 따라서, 전지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신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로우는 특히 '무의미한 악(gratuitous evil)'의 존재, 즉 어떤 더 큰 선을 위해 필요하다고 볼 수 없는 악의 존재가 신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적 도전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의 구분

악의 문제를 논의할 때 중요한 또 다른 구분은 '자연적 악(natural evil)'과 '도덕적 악(moral evil)' 사이의 구분이다:

  1. 도덕적 악: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악. 살인, 폭력, 거짓말, 배신 등 인간의 의도적 선택에 의한 악행이 여기에 포함된다.
  2. 자연적 악: 인간의 의지나 행동과 무관하게 발생하는 악. 지진, 홍수, 질병, 기아 등 자연 현상에 의한 고통과 피해가 이에 해당한다.

이 구분은 신정론에서 중요한데, 많은 고전적 신정론이 도덕적 악에 대한 설명(주로 자유 의지와 관련된)과 자연적 악에 대한 설명을 분리해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 자유 의지와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

고대 기독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는 악의 문제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초기 응답 중 하나를 제시했다. 그의 접근법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유신론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악의 본질: 선의 결핍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악이 실체나 본질이 아니라 '선의 결핍(privatio boni)' 또는 '존재의 결핍'이라는 것이다.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둠이 빛의 부재인 것처럼, 선의 부재나 결핍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신플라톤주의 사상가 플로티노스의 견해와 유사하며, 유신론적 창조 교리와 조화를 이룬다. 만약 모든 것이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악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답변은 악이 창조된 실체가 아니라, 좋은 것의 부재 또는 왜곡이라는 것이다. 이는 악의 존재를 설명하면서도 신의 선한 창조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자유 의지와 도덕적 악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덕적 악을 설명하기 위해 '자유 의지 변론(free will defense)'를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했고, 이 자유 의지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인간이 이를 오용하여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자유 의지 변론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자유 의지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선이다.
  2. 진정한 자유 의지는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3. 신은 자유롭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들을 창조함으로써 더 큰 선을 실현했다.
  4. 인간이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악을 선택한 것이 도덕적 악의 원천이다.

이 관점에서, 도덕적 악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신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 신은 자유 의지라는 선을 창조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원죄와 타락: 자연적 악에 대한 설명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 악(질병, 자연재해 등)을 설명하기 위해 '원죄(original sin)'와 '타락(Fall)' 교리를 활용한다. 그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인해 인류와 자연 전체가 타락했고, 이로 인해 자연적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

원래 신은 완벽한 세계를 창조했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인해 이 세계는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악 역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자유 선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설명은 창세기의 타락 서사에 기반하며, 자연적 악의 존재가 신의 선함과 충돌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는 특히 진화론적 이해와 충돌하기 때문에 많은 도전을 받는다.

아우구스티누스 신정론의 현대적 평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은 오랫동안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나, 현대에 와서는 여러 비판에 직면한다:

  1.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관점에 대한 비판: 많은 비판자들은 홀로코스트나 대량 학살과 같은 극단적 악을 단순히 '선의 부재'로 보는 것은 그 심각성을 축소한다고 주장한다.
  2. 원죄 교리에 대한 과학적 도전: 진화론적 인간 이해는 문자적인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야기와 충돌하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연적 악 설명에 도전이 된다.
  3. 도덕적 책임에 관한 질문: 만약 신이 인간의 선택을 미리 알았다면(전지), 왜 그런 선택을 할 인간을 창조했는가? 이는 신의 책임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 의지 변론은 현대 신정론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으며, 특히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교화되었다.

이레네우스의 '영혼 형성' 신정론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른 접근법을 취한 초기 기독교 신학자가 이레네우스(Irenaeus, 약 130-202)다. 그의 사상은 20세기 철학자 존 힉(John Hick)에 의해 발전되어 '이레네우스적 신정론' 또는 '영혼 형성(soul-making)' 신정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완성되지 않은 창조와 영적 성장

이레네우스적 신정론의 핵심은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성장과 발전의 과정 속에 있는 미완성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악과 고통은 인간의 영적, 도덕적 성장을 위한 필요한 요소로 이해된다.

이레네우스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르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영적으로 미성숙한 존재였으며, 그들의 '타락'은 실제로는 도덕적 책임과 성장을 향한 첫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악과 고통의 교육적 가치

이레네우스적 관점에서, 악과 고통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적이고 변형적인 가치를 가진다. 악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아가는 영적 성장 과정에서 필요한 저항과 도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존 힉은 이를 "영혼 형성의 장(soul-making arena)"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도덕적 미덕과 영적 성숙은 오직 도전과 시련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용기는 두려움 없이는 발전할 수 없고, 연민은 고통의 현실 없이는 깊어질 수 없다.

종말론적 정당화

이레네우스적 신정론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그것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 지향성이다. 이 관점에서는 현재의 악과 고통이 최종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오직 미래의 완성과 구원을 통해서이다.

존 힉은 이를 확장하여 보편구원론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신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이며, 이 최종적 구원의 맥락에서만 현재의 고통이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정당화는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라는 요한계시록의 약속과 같은 종교적 희망에 기반한다. 이는 현재의 악이 최종적으로 신의 더 큰 선한 목적 안에 통합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공한다.

이레네우스적 신정론의 강점과 약점

이레네우스적 접근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1. 진화론과의 조화: 인간을 발전하는 존재로 보는 관점은 현대 진화 이론과 더 잘 조화된다.
  2. 도덕적 성장에 대한 현실적 설명: 인간의 도덕적, 영적 성장이 도전과 저항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관점은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일치한다.
  3. 희망의 요소: 궁극적인 구원과 완성을 향한 종말론적 비전은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접근법에도 중요한 비판이 제기된다:

  1. 과도한 고통의 문제: 어떤 고통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어떤 영적 성장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비판이 있다.
  2. 동물의 고통: 동물들도 상당한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들에게 도덕적 성장의 가능성은 없다. 이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3. 신의 도덕적 책임: 신이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했다면, 그 세계의 악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여전히 신에게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종교 전통에서의 다른 악의 문제 접근법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의 신정론 외에도, 다양한 종교 전통에서는 악의 문제에 대한 고유한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유대교 전통의 응답

유대교 전통에서 악의 문제는 특히 홀로코스트(쇼아) 이후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유대교 사상가들의 주요 접근법은 다음과 같다:

  1. 계약적 관계: 유대교는 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적 관계를 강조하며, 이 관계 안에서의 신실함과 질문의 균형을 추구한다. 욥기와 같은 텍스트는 신에게 질문하고 항의하는 것이 신앙의 정당한 부분임을 보여준다.
  2. 신의 자기 제한(Tzimtzum): 카발라와 같은 유대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침줌(tzimtzum)'이라는 개념을 통해 신이 창조를 위해 스스로를 제한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신의 전능함에 대한 재해석을 제공한다.
  3. 티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의 치유/복구"를 의미하는 이 개념은 인간이 신과 협력하여 세상의 깨진 측면을 치유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악에 대한 적극적 대응으로서의 윤리적 행동을 강조한다.

동양 종교 전통의 접근

힌두교, 불교, 도교와 같은 동양 종교 전통들은 서구 유신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악과 고통의 문제에 접근한다:

  1. 카르마와 윤회: 힌두교와 불교의 카르마 개념은 현재의 고통을 과거 행위의 결과로 설명한다. 이는 고통의 분배에 대한 일종의 코스믹 정의의 원리를 제공한다.
  2. 무상(無常, Anicca)과 무아(無我, Anatta): 불교의 이 핵심 가르침은 고통이 영속적 자아와 영원한 행복에 대한 잘못된 갈망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고통은 실재의 본질적 측면이 아니라, 그릇된 인식과 집착의 결과다.
  3. 도(道)와 균형: 도교는 고통을 자연의 균형과 조화로부터의 이탈로 이해한다. 도(道)에 따라 사는 것, 즉 자연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고통을 줄이는 길이다.

이러한 동양적 접근들은 서구 유신론의 '악의 문제'와는 다른 형태의 질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종종 고통의 원인보다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실천적 방법에 더 초점을 맞춘다.

신정론에 대한 현대적 비판과 대안적 접근

전통적 신정론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있다. 특히 20세기의 대규모 인간 비극(세계대전, 홀로코스트, 대량학살 등) 이후, 많은 사상가들은 전통적 신정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대안적 접근을 모색했다.

신정론에 대한 도덕적 비판

일부 사상가들은 신정론 자체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쇼아(홀로코스트) 이후의 유대 사상가들 중 일부는 끔찍한 악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떤 신정론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유사하게,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생각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악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응답은 이론적 정당화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와 실천적 행동이다.

과정 신학의 접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와 찰스 하츠혼(Charles Hartshorne)이 발전시킨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은 전통적 신관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을 통해 악의 문제에 접근한다:

  1. 신의 전능(omnipotence)에 대한 재해석: 과정 신학은 신을 전통적 의미에서 전능하지 않은 존재로 본다. 신은 강제력이 아닌 설득과 사랑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2. 상호 창조적 과정: 세계는 신과 피조물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창조의 과정 속에 있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우연성과 자유가 포함된다.
  3. 신의 고통 참여: 과정 신학에서 신은 세계의 모든 경험을 함께 느끼는 공감적 존재다. 신은 세계의 고통에 직접 참여하며, 이를 통해 세계를 더 큰 조화로 이끈다.

이러한 관점은 악의 존재를 신의 무능력이나 악의가 아닌, 자유와 창조성이라는 더 큰 선을 위한 필연적 가능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 유신론의 신 개념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비판도 받는다.

해방 신학과 실천적 접근

남미에서 시작된 해방 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악의 문제를 주로 구조적 불의와 억압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1. 구조적 악에 대한 강조: 해방 신학은 개인적 악보다 가난, 불평등, l렬압과 같은 구조적 악에 초점을 맞춘다.
  2. 실천(praxis)의 우선성: 이론적 설명보다 악에 대한 실천적 대응이 중요하다고 본다. 신앙은 불의에 대항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3. 역사 속의 하느님: 신은 역사 속에서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러한 접근은 악의 문제를 추상적 철학적 문제가 아닌, 구체적 사회적, 정치적 현실의 문제로 재구성한다.

결론: 악의 문제와 인간 조건의 신비

악의 문제는 단순한 철학적 수수께끼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깊은 신비와 모순을 드러내는 문제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가들이 이 문제에 접근해 왔지만, 어떤 단일한 해답도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아마도 악의 문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의 악과 고통에 직면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의 고통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전통적 신정론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지적인 틀을 제공하지만, 궁극적으로 악의 문제는 단순한 이론적 해결책을 넘어, 깊은 실존적, 영적 탐구를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이레네우스와 같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통찰은 여전히 이 탐구에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하지만, 각자의 경험과 맥락 속에서 이 질문은 계속해서 새롭게 제기되고 응답되어야 한다. 

악의 문제는 단순히 신의 존재 유무를 가리는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세상과 마주할 때 느끼는 고통과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희망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려는 이들, 악에 저항하며 선을 실현하려는 이들, 그리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침묵과 연대를 선택하는 이들 모두가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응답을 만들어 가고 있다.

결국 신정론은 하나의 완결된 이론이 아니라, 고통과 의미를 향한 인간의 여정 속에서 계속 쓰이고 수정되는 살아 있는 담론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깊은 철학적·윤리적 성찰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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