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생산의 지정학과 문화적 표상의 권력
인류 지식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은 근대 학문의 기초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등장은 이러한 '보편적 지식'이 사실상 특정 지역과 문화, 그중에서도 유럽과 서구의 경험과 관점에 기반하고 있음을 폭로했다. 지식이 생산되는 지정학적 맥락과 권력 관계가 지식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한다는 통찰은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분야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했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은 주로 서구 학계에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호미 바바(Homi Bhabha) 등의 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도 탈유럽중심주의(de-Eurocentrism)를 모색하는 사상가들이 등장했는데, 한국의 김용옥(도올), 함석헌, 류영모와 같은 사상가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서구의 헤게모니적 지식 체계에 저항하며, 각자의 문화적 자원을 바탕으로 대안적 사유 방식을 모색했다.
이 두 흐름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맥락과 방법론을 갖지만, 서구 중심적 지식 생산 체계에 도전하고 대안적 인식론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깊은 접점을 가진다. 그들의 저항 담론은 단순한 문화적 민족주의나 상대주의를 넘어,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대화를 위한 조건을 탐색한다.
서구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발전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의 해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문학비평가로, 그의 대표작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1978)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사이드는 미셸 푸코의 담론 분석과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결합하여, 서구가 '동양'을 재현하는 방식과 그러한 재현이 서구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분석했다.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해 말하고, 동양을 기술하고, 동양을 가르치고, 동양을 식민화하고, 동양을 지배하는 서구의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오류가 아니라, 지식과 권력이 결합된 체계적인 담론으로, 동양을 "타자화(othering)"함으로써 서구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구성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양은 서구에 의해 거의 유럽의 발명품이었으며, 고대부터 유럽의 로맨스, 이국적 존재, 기억, 경관, 체험의 장소로 그려져 왔다." 이러한 재현은 실제 지역과 문화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서구의 상상력이 투영된 왜곡된 이미지를 생산한다.
사이드는 후속작 『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1993)에서 분석의 범위를 확장하여, 소설, 오페라 등 서구의 문화적 생산물이 어떻게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재생산하는지 탐구했다. 그는 "중첩된 영토와 얽혀진 역사(overlapping territories and intertwined histories)"라는 개념을 통해, 문화적 경험의 상호연결성과 혼종성을 강조했다.
가야트리 스피박: 하위주체와 인식론적 폭력
인도 출신의 문학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1942-)은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1988)라는 영향력 있는 논문에서 식민주의와 가부장제의 이중 억압 속에서 식민지 여성이 처한 침묵의 상황을 분석했다. 스피박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하위주체(subaltern)' 개념을 차용하여, 지배적 재현 체계에서 배제된 집단의 목소리가 어떻게 침묵되는지 탐구했다.
스피박에 따르면, 하위주체는 단순히 발언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담론의 언어와 개념으로는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는 그녀가 '인식론적 폭력(epistemic violence)'이라 부른 현상으로, 식민지배자의 지식 체계가 피지배자의 지식 체계를 체계적으로 무효화하고 침묵시키는 과정이다.
스피박은 "인도 사티(sati, 과부 순장) 폐지를 둘러싼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담론 모두가 실제 여성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 '갈색 여성을 백인 남성으로부터 구하기' 또는 '전통 문화를 보존하기'라는 각자의 의제를 위해 여성을 도구화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스피박은 서구 지식인들, 심지어 푸코나 들뢰즈와 같은 비판적 이론가들조차 비서구 주체의 경험을 재현할 때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침묵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지식인이 대표성을 주장할 때, 그들은 실제로 하위주체를 재현(represent)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re-present)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호미 바바: 혼종성과 제3의 공간
인도 출신의 문화이론가 호미 바바(1949-)는 『문화의 위치(The Location of Culture)』(1994)에서 식민지 경험의 양가성(ambivalence)과 혼종성(hybridity)을 강조했다. 바바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분석이 지나치게 이항대립적이라고 비판하며, 식민 담론이 내포하는 모순과 불안정성에 주목했다.
바바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식민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분열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식민지배자는 피지배자를 '거의 같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은(almost the same but not quite)' 존재로 만들고자 하며, 이러한 모방(mimicry)의 과정에서 식민 지배의 권위가 오히려 불안정해지는 균열이 생긴다.
바바는 이러한 문화적 접촉과 충돌의 지점을 '제3의 공간(third space)'이라 부른다. 이는 "문화적 기호들이 전유되고, 번역되고, 재역사화되는" 공간으로, 고정된 문화적 정체성이나 본질주의적 이해를 넘어서는 창조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바바의 혼종성 개념은 단순한 문화적 혼합이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번역과 협상의 과정을 강조한다. 그는 "문화는 결코 단일하거나 통일된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이중적이거나 양분된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고정된 범주로 본질화하지 않는 이해를 추구한다.
동아시아의 탈유럽중심주의 사상
김용옥(도올): 동학에서 철학적 주체성 찾기
한국의 사상가 김용옥(도올, 1948-)은 서구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고유의 사상 전통에서 철학적 주체성을 모색한 대표적 학자다. 그는 『도올심득』, 『노자철학』, 『동학이야기』 등의 저작을 통해 동양 사상의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했으며, 특히 한국의 동학 사상에서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사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김용옥은 "우리가 서양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서양의 우월성을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철학함'의 보편적 형식을 획득하여 우리 자신의 사상을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서구 철학의 무비판적 수용이 아닌, 비판적 대화를 통한 철학적 주체성 확립을 의미한다.
『동학이야기』에서 김용옥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 사상을 단순한 민족 종교가 아닌, 서구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응답으로 재해석한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인간과 천(天)의 내재적 합일을 강조하는데, 이는 서구 근대의 주객이원론을 넘어서는 통합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김용옥은 "동학은 서구의 산업문명이 몰고 온 물질주의와 인간 소외에 대한 한국적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최제우의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상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표현임을 강조한다.
또한 김용옥은 『노자철학』에서 노자의 사상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며,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서구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와 도구적 이성에 대한 대안적 사유 방식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노자 철학은 약자의 처지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피지배자의 철학"이다.
류영모: 한(恨)의 변증법과 '씨알'의 사상
함석헌(1901-1989)과 류영모(1890-1981)로 대표되는 한국의 민중사상은 식민지 경험과 분단, 독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전된 독특한 사유 전통이다. 특히 류영모의 '씨알' 사상과 함석헌의 '한(恨)의 변증법'은 억압의 경험을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사유 방식을 제시한다.
류영모는 "씨알은 가장 작은 것이지만, 동시에 전체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개인의 존엄성과 공동체적 연대를 동시에 강조했다. 씨알 사상은 서구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넘어서는 관계적 인간관을 제시하며, 한국의 전통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창조적 융합을 시도했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한국 역사를 '한(恨)'의 역사로 해석하면서도, 이 한이 단순한 원한이나 분노가 아닌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한은 못 풀린 맺힘이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요, 아직 타오르지 않은 불길"이라고 표현하며, 한의 변증법적 전환 가능성을 모색했다.
함석헌의 "역사는 민중이 만든다"라는 주장은 하위주체의 역사적 주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스피박의 하위주체론과 접점을 가진다. 그러나 함석헌은 하위주체의 침묵이 아닌, 그들의 잠재된 목소리와 행동 가능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 르네상스
1990년대 동아시아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등장한 '아시아적 가치' 담론과 '유교 르네상스' 논의는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또 다른 저항 담론을 형성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Lee Kuan Yew)와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아시아의 경제적 성공이 서구와는 다른 가치 체계, 특히 공동체주의, 가족 중심주의, 권위 존중 등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중국의 뚜웨이밍(杜維明, Tu Weiming)이 '문화 중국(Cultural China)' 개념을 통해 중국 문화의 다중심적 발전과 글로벌 대화 가능성을 모색했다. 뚜웨이밍은 "유교 전통이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대안적 가치 체계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제3기 유교(Third Epoch of Confucianism)'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한국에서는 김경동, 이승환 등의 학자들이 '아시아적 근대성(Asian modernity)' 논의를 통해 서구와 다른 경로의 근대화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들은 서구 근대성의 보편성을 비판하면서도, 단순한 문화적 상대주의나 본질주의를 경계하고, 지구화 시대의 상호문화적 대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시아적 가치' 담론은 종종 국가 권력의 정당화 도구로 활용되거나, 아시아 내부의 다양성과 갈등을 은폐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러한 담론이 새로운 형태의 본질주의나 문화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위험성을 경계했다.
두 사유 전통의 접점과 긴장
권력과 지식의 관계에 대한 공통된 통찰
서구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과 동아시아의 탈유럽중심주의 사상은 권력과 지식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한 통찰을 공유한다. 사이드가 푸코의 권력/지식 개념을 차용하여 오리엔탈리즘을 분석했듯이, 김용옥과 함석헌도 서구 학문 체계가 어떻게 식민 지배와 문화적 종속을 정당화하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김용옥은 『철학의 사회성』에서 "철학은 결코 순수한 사변이 아니라, 특정 사회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지적 실천"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사회에서 서구 철학의 무비판적 수용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비판했다. 이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한 학문적 오류가 아닌 정치적 기획으로 분석한 것과 상통한다.
함석헌은 "남의 사상을 빌려 남의 인생을 사는 지식인"을 비판하며, 식민지 경험이 만들어낸 지적 종속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는 스피박이 말한 '인식론적 폭력'의 문제와 접점을 가진다.
번역과 문화적 협상의 문제
서구 이론을 비서구 맥락에서 '번역'하고 적용하는 과정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핵심적 긴장을 드러낸다. 스피박은 "번역은 단순한 언어적 전환이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협상"이라고 강조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서구 이론과의 대화' 방식에도 적용된다.
김용옥은 『프랑스 철학과 동양 사상』에서 서구 철학 개념을 한문 용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변형과 창조적 오독(誤讀)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는 "번역은 결코 중립적인 전달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산"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문화적 주체성 확립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류영모의 기독교 해석 역시 서구 신학의 단순한 수용이 아닌 창조적 변형의 사례다. 그는 기독교의 '로고스(Logos)' 개념을 한국적 맥락에서 '한얼'로 번역하며, 서구 기독교와 한국 전통 사상의 창조적 융합을 시도했다.
이원론적 사고의 극복과 관계적 존재론
서구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과 동아시아 사상 모두 서구 근대성의 이원론적 사고(주체/객체, 자아/타자, 정신/물질 등)를 비판하고, 보다 관계적이고 통합적인 존재 이해를 모색한다.
호미 바바의 '혼종성'과 '제3의 공간' 개념은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선 문화적 협상과 창조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슷하게, 김용옥이 강조한 동학의 '시천주' 사상과 류영모의 '씨알' 개념은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함석헌의 "역사는 씨알들의 자라남"이라는 표현은 개인의 주체성과 공동체적 연대를 동시에 강조하는 관계적 역사관을 보여준다. 이는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구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양자를 비판하며 모색한 "차이 속의 연대(solidarity through differences)"와 접점을 가진다.
인식론적 탈식민화와 간문화적 철학의 가능성
인식론적 탈식민화(epistemic decolonization)의 과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정치적 탈식민화 이후에도 지속되는 '인식론적 식민성'의 문제를 지적했다. 페루의 사상가 아니발 키하노(Aníbal Quijano)가 제시한 '권력의 식민성(coloniality of power)' 개념은 식민 지배의 종식 이후에도 지속되는 지식, 권력, 존재 방식의 위계적 구조를 가리킨다.
인식론적 탈식민화는 단순히 연구 대상의 다양화(예: 비서구 철학에 대한 연구)를 넘어, 철학함의 방식과 지식 생산의 구조적 변화를 요구한다. 이는 "누가 지식을 생산하는가?", "어떤 지식이 '철학'으로 인정받는가?", "어떤 방법론이 '합리적'으로 간주되는가?" 등의 질문을 포함한다.
김용옥은 『철학의 사회성』에서 "한국에서 '철학'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작업이 서구 철학의 주석과 소개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철학적 주체성의 회복을 촉구했다. 이는 인식론적 탈식민화의 한국적 맥락에서의 표현이다.
남미의 '해방 철학(Philosophy of Liberation)' 전통을 대표하는 엔리케 두셀(Enrique Dussel)은 "서구 철학의 보편성 주장이 사실상 유럽중심주의적 특수성의 전지구화"라고 비판하며, 식민성을 넘어서는 '초근대적(transmodern)'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관점은 김용옥이 주장한 "진정한 보편성은 다양한 특수성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과 공명한다.
간문화적 철학(Intercultural Philosophy)의 가능적 지평
간문화적 철학은 다양한 문화 전통 간의 대등한 철학적 대화를 통해, 어느 한 전통에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모색하는 시도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상대주의나 절충주의가 아닌,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대화를 추구한다.
독일의 철학자 랑(Ram Adhar Mall)은 "간문화적 철학은 어떤 문화도 철학의 모델이 될 수 없으며, 동시에 어떤 문화도 철학적 사유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중첩 없는 동일성 없음(no identity without overlapping)'의 원칙을 제시했다.
하와이의 철학자 로저 에임스(Roger T. Ames)와 데이비드 홀(David L. Hall)은 『중국 철학을 생각하기(Thinking Through Confucius/Thinking from the Han)』 시리즈에서 서구 철학의 개념 틀로 중국 사상을 해석하는 대신, 중국 사상의 고유한 관계적 사유 방식을 통해 서구 철학의 전제를 재고하는 "교차문화적 해석학(cross-cultural hermeneutics)"을 발전시켰다.
김용옥 역시 『노자철학』과 『도올심득』에서 동서양 사상의 창조적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우리가 서양 철학과 대화할 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개념과 방법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유 전통에서 대등한 대화의 거점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교철학을 넘어서: 탈식민적 철학의 실천
전통적인 비교철학은 종종 서구 철학의 보편성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비서구 철학 전통을 이국적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도의 철학자 J.L. 메타(J.L. Mehta)는 이를 "서구 철학의 거울에 비친 인도 철학"이라고 비판했다.
탈식민적 철학의 실천은 단순히 다른 철학 전통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조건과 제약을 성찰하고, 다양한 사유 전통 간의 "번역 불가능성(untranslatability)"과 창조적 오독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완벽한 상호이해나 통약가능성(commensurability)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차이와 불일치 속에서도 대화를 지속하는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일본의 철학자 가와카미 데쓰로(河合哲夫)는 "진정한 철학적 번역은 두 언어 체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생산적 '왜곡'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호미 바바가 말한 문화적 '번역의 정치학(politics of translation)'과 상통하는 관점이다.
한국의 철학자 백종현은 『우리와 칸트』에서 "한국어로 철학한다는 것은 단순히 서구 철학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의 문법 구조와 의미 체계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언어와 사유의 불가분한 관계를 인식하고, 번역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성찰하는 태도다.
결론: 다원적 대화를 향하여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과 탈유럽중심주의 사상은 지식 생산의 지정학적 맥락과 권력 관계를 폭로함으로써, 철학의 보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이들의 비판은 단순히 서구 철학의 내용이나 방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장하는 보편성의 특수한 조건과 한계를 드러내고,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대화를 위한 조건을 모색하는 데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세속적 비판(secular criticism)"의 정신은 어떤 문화적 전통이나 텍스트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다. 이는 서구 철학뿐 아니라 비서구 전통에도 적용되어야 하며, 문화적 본질주의나 낭만적 향수에 빠지지 않는 자기비판적 태도를 요구한다.
김용옥은 "진정한 철학적 대화는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라, 서로의 사유 방식과 전제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드는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한 "비판적 친밀감(critical intimacy)"의 태도와 상통한다.
인도의 철학자 다야 크리슈나(Daya Krishna)는 "진정한 대화는 서로 다른 개념 체계 간의 '비동시성의 동시성(contemporaneity of the non-contemporaneous)'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다양한 철학적 전통이 서로 다른 역사적 리듬과 발전 경로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현재적 맥락에서의 대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접근이다.
궁극적으로 포스트식민주의와 탈유럽중심주의 사상의 공헌은 철학의 '다원적 보편성(pluriversality)'을 향한 길을 열었다는 데 있다. 이는 어느 한 전통이나 관점의 헤게모니를 거부하면서도, 상대주의적 고립에 빠지지 않고 차이와 불일치 속에서도 지속되는 비판적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태도다.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월터 미뇰로(Walter Mignolo)가 제안한 '인식론적 불복종(epistemic disobedience)'은 지배적 지식 체계의 전제와 범주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지식 전통 간의 "다원적 대화(plurilogue)"를 통해 새로운 인식론적 지평을 모색하는 실천이다.
이러한 다원적 대화의 과제는 김용옥이 말한 "자기 안의 타자성과 타자 안의 자기성을 동시에 인식하는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가능하다. 이는 문화적 차이를 본질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차이가 가져오는 창조적 긴장을 철학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태도다.
21세기 글로벌 맥락에서 철학하기의 과제는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지적 전통들이 대등하게 참여하는 "다중심적 철학 공간(polycentric philosophical space)"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포용이나 관용의 제스처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조건과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차이 속에서도 공통의 문제를 모색하는 윤리적 실천을 요구한다.
벨기에의 철학자 라울 포르네(Raúl Fornet-Betancourt)가 말한 "대화적 전환(dialogical turn)"은 철학의 본질을 고정된 교설이나 체계가 아닌, 열린 대화의 과정으로 재정의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은 특정 문화나 전통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다양성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열린 탐구의 장이 된다.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과 동아시아 탈유럽중심주의 사상가들의 저항 담론은 지식 생산의 지정학적 조건과 권력 관계를 폭로함으로써, 철학의 보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이들의 비판적 작업은 우리에게 "누구의 목소리로, 누구를 위한 철학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한다.
진정한 의미의 탈식민적 철학은 서구 철학의 단순한 거부나 비서구 전통의 낭만화가 아니라, 모든 철학적 전통이 가진 한계와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차이 속에서도 공통의 인간 경험에 대한 대화를 지속하는 윤리적 태도에 있다. 이러한 태도는 김용옥이 말한 "자기 비움을 통한 자기 확장"의 철학적 실천으로,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넘어서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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