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과학철학 9. 실재론 vs. 반실재론

SSSCH 2025. 4. 12.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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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실재론 논쟁의 핵심 쟁점

과학철학에서 '실재론(realism)'과 '반실재론(anti-realism)'의 논쟁은 가장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쟁점 중 하나다. 이 논쟁은 과학이 제시하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이나 이론적 존재(예: 전자, 쿼크, 자기장, 유전자 등)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과학 이론이 세계의 참된 모습을 알려준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대립은 여러 수준에서 일어나지만, 핵심 쟁점은 다음과 같다:

  1. 존재론적 문제: 과학 이론이 언급하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이론적 존재)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2. 인식론적 문제: 관찰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3. 의미론적 문제: 이론적 용어(예: '전자', '쿼크')는 실제 존재에 대한 참조인가, 아니면 단지 관찰 가능한 현상을 조직하는 도구인가?
  4. 진리의 문제: 과학 이론이 '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논쟁은 단순히 추상적인 철학적 문제를 넘어, 과학의 목적과 성취, 과학적 방법론의 정당화, 과학과 다른 지식 형태의 관계 등 과학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이해와 관련된다.

과학적 실재론의 주요 입장과 논변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은 성숙한 과학 이론이 대체로 참이며, 이론이 상정하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실재론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포함한다:

과학적 실재론의 핵심 주장

  1. 존재론적 주장: 과학 이론이 상정하는 이론적 존재(예: 전자, 쿼크, 유전자)는 우리의 믿음이나 이론과 독립적으로 실제로 존재한다.
  2. 의미론적 주장: 과학적 진술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하며, 이론적 용어는 실제 존재하는 대상을 지칭한다.
  3. 인식론적 주장: 성숙한 과학 이론은 관찰 가능한 현상뿐만 아니라,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도 참된(또는 근사적으로 참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
  4. 진보적 주장: 과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재에 대한 더 나은 근사치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

실재론을 지지하는 주요 논변

1. 기적 논변(No Miracles Argument)

실재론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논변 중 하나는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이 제시한 '기적 논변'이다. 이 논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과학 이론의 놀라운 성공은, 그 이론이 세계의 실제 구조를 대략적으로 올바르게 포착하고 있지 않다면 일종의 기적이 될 것이다.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철학이다."

이 논변에 따르면, 과학 이론이 관찰 불가능한 영역까지 포함해 세계를 올바르게 기술한다고 가정할 때만 과학의 예측적, 설명적, 기술적 성공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의 놀라운 예측력은 그것이 미시 세계의 실제 구조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2. 이론의 수렴 논변

역사적으로 과학 이론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도 실재론을 지지하는 논변으로 활용된다:

"과학 이론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이론으로 수렴한다는 사실은, 그 이론들이 실재의 구조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에서 상대성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으로의 발전 과정에서, 이전 이론의 많은 성공적 측면들이 새로운 이론에 보존되고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이론들이 실재에 대한 더 나은 근사치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실재론적 견해를 지지한다.

3. 설명적 심층성 논변

실재론자들은 과학 이론의 설명적 심층성과 통합성도 실재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본다:

"과학 이론은 단순히 현상을 예측하는 것을 넘어, 그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설명적 심층성은 이론이 실재의 구조를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예를 들어, 원자 이론은 단순히 화학 반응을 예측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반응이 왜 일어나는지를 원자 수준의 구조와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적 심층성은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반실재론의 다양한 형태와 비판

반실재론(anti-realism)은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과학 이론이 제시하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의 실재성이나, 이론이 세계의 참된 모습을 알려준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반실재론은 여러 형태로 존재하며, 각각 실재론의 다른 측면을 비판한다.

주요 반실재론적 입장들

1.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도구주의는 과학 이론을 세계의 참된 모습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현상을 예측하고 조직하는 도구로 본다:

  • 핵심 주장: 이론적 용어(예: '전자', '쿼크')는 실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현상을 조직하고 예측하는 개념적 도구다.
  • 이론 해석: 이론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관찰 진술로 번역되거나 재해석되어야 한다.
  • 과학의 목적: 과학의 목적은 '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현상을 성공적으로 예측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구주의자는 '전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전자 이론이 전기 현상을 성공적으로 예측하고 설명하는 한 그것은 가치 있는 도구라고 본다.

2. 구성적 경험주의(Constructive Empiricism)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이 제안한 구성적 경험주의는 좀 더 정교한 형태의 반실재론이다:

  • 핵심 주장: 과학의 목적은 경험적으로 적합한(empirically adequate) 이론을 찾는 것이다. 즉, 관찰 가능한 현상에 대해 참인 이론을 찾는 것이다.
  • 이론 수용: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참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인식적 겸손: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반 프라센은 실재론자와 달리, 과학이 성공적이기 위해 이론이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서도 참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론이 관찰 가능한 현상을 정확히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3. 내적 실재론(Internal Realism)과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

일부 철학자들은 극단적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중간 입장을 제안한다:

  • 내적 실재론(힐러리 퍼트남): 실재는 개념 체계나 이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특정 개념적 틀 내에서만 접근 가능하다. 따라서 '절대적 실재'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지만, 특정 개념 체계 내에서의 '실재'에 대한 지식은 가능하다.
  • 구조적 실재론(존 워럴): 과학 이론의 내용이 아니라 수학적 구조나 관계는 이론 변화를 통해 보존된다. 따라서 과학은 세계의 구조나 관계에 대한 지식은 제공할 수 있지만, 그 구조의 본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반실재론의 주요 논변

1. 미결정성 논변(Underdetermination Argument)

"어떤 데이터 세트도 항상a 복수의 양립 가능한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관찰 증거만으로는 어떤 이론이 '참'인지 결정할 수 없다."

이 논변에 따르면, 경험적으로 동등하지만 이론적 존재나 메커니즘에 대해 다른 주장을 하는 여러 이론이 항상 가능하다. 따라서 관찰 증거만으로는 이론적 존재에 대한 지식을 정당화할 수 없다.

2. 역사적 귀납 논변(Pessimistic Meta-Induction)

래리 라우단(Larry Laudan)이 제시한 이 논변은 과학사에 기초한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과거에 성공적이었다고 여겨졌던 많은 이론들(플로지스톤 이론, 에테르 이론 등)이 후에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현재 이론들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이 논변은 과학 이론의 성공이 그 이론이 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과거의 많은 성공적 이론들이 이론적 존재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했다면, 현재의 이론들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있다.

3. 관찰의 이론 의존성 논변

"모든 관찰은 이론에 의존적이다. 따라서 이론과 독립적인 '순수한 관찰 증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중립적인 기반도 없다."

이 논변에 따르면, 관찰과 이론 사이의 뚜렷한 경계는 없으며, 모든 관찰은 이미 어떤 이론적 틀 내에서 해석된 것이다. 이는 관찰 증거를 통해 이론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실재론적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관찰 가능/불가능의 경계와 그 문제점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관찰 가능한 것'과 '관찰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문제가 많다.

관찰 가능성의 스펙트럼

관찰 가능성은 이분법적인 구분이 아니라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볼 수 있다:

  1. 직접 관찰 가능: 맨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대상(예: 나무, 건물)
  2. 도구를 통한 관찰: 망원경, 현미경 등의 도구를 통해 관찰 가능한 대상(예: 먼 은하, 세포)
  3. 간접적 관찰: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 효과를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대상(예: 자기장, 중력장)
  4. 이론적 추론: 오직 이론적 추론을 통해서만 존재가 상정되는 대상(예: 쿼크, 초끈)

이 연속선상에서 어디까지를 '관찰 가능'하다고 볼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전자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 진정한 관찰인가? 구름 상자에서 전자의 궤적을 보는 것은 전자 자체를 보는 것인가?

관찰 가능성의 문제점

관찰 가능성에 기초한 구분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1. 관찰의 이론 의존성: 모든 관찰은 어떤 이론적 틀 내에서 이루어진다. '맨눈으로 보는' 것조차도 빛의 반사, 눈의 생리학, 뇌의 정보 처리 등에 대한 이론적 가정을 내포한다.
  2. 기술적 제약의 임시성: 현재 관찰 불가능한 것이 미래의 기술 발전으로 관찰 가능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자는 한때 순전히 이론적 존재였지만, 이제는 주사 터널링 현미경으로 '볼' 수 있다.
  3. 인간 중심주의: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존재론적 구분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다. 왜 인간의 감각 기관의 한계가 존재론적으로 중요해야 하는가?
  4. 관찰과 추론의 연속성: 실제 과학적 실천에서 관찰과 이론적 추론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많은 철학자들은 관찰 가능/불가능의 구분이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과학적 지식의 본질, 이론의 정당화, 설명의 역할 등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중요하다.

이론적 존재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 사례 연구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특정 이론적 존재들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와 그 정당화를 살펴보자.

원자와 분자: 실재론의 성공 사례?

원자와 분자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순전히 이론적인 존재였다. 존 돌턴이 원자 이론을 제안했을 때, 많은 과학자들(특히 에른스트 마흐와 같은 실증주의자들)은 원자를 단순한 이론적 도구로 간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자의 실재성을 지지하는 증거가 축적되었다:

  1. 다중 독립적 증거: 브라운 운동, 방사능, 전기분해 등 다양한 현상이 원자의 존재를 가정할 때 가장 잘 설명된다.
  2. 예측적 성공: 원자 이론은 화학 반응, 물질의 성질 등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했다.
  3. 기술적 조작: 원자 수준의 조작(예: 주사 터널링 현미경을 이용한 개별 원자 이동)이 가능해졌다.
  4. 설명적 통합: 원자 개념은 화학, 물리학, 재료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합하는 설명적 틀을 제공했다.

오늘날 원자의 실재성은 거의 모든 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이는 비록 처음에는 관찰 불가능했던 이론적 존재라 하더라도, 충분한 증거가 축적되면 그 실재성이 광범위하게 수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양자역학의 이론적 존재들: 복잡한 사례

양자역학의 이론적 존재들(파동함수, 슈뢰딩거 고양이 상태, 양자 얽힘 등)은 더 복잡한 사례를 제공한다:

  1. 해석의 다양성: 양자역학의 수학적 형식주의는 동일하지만, 그것의 존재론적 해석은 다양하다(코펜하겐 해석, 다세계 해석, 보옴 역학 등).
  2. 직관적 이해의 어려움: 양자역학의 많은 개념들(파동-입자 이중성, 비국소성, 중첩 상태 등)은 일상적 직관과 충돌한다.
  3. 관찰의 문제: 양자 측정 과정 자체가 측정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점은 '관찰'의 의미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런 이유로, 양자역학의 이론적 존재들에 대한 실재론적 태도는 여전히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파동함수와 같은 수학적 구성물에 직접적인 물리적 실재성을 부여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를 단지 유용한 수학적 도구로 간주한다.

현대 과학의 추상적 존재: 힉스 보손, 블랙홀, 암흑물질

현대 물리학의 많은 이론적 존재들은 더욱 추상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감지된다:

  1. 힉스 보손: 2012년 CERN에서 발견되었지만, '직접' 관찰된 것이 아니라 그 붕괴 산물의 통계적 분석을 통해 감지되었다.
  2. 블랙홀: 최근 Event Horizon Telescope가 블랙홀의 '그림자'를 이미징했지만, 블랙홀 자체를 직접 관찰한 것은 아니다.
  3. 암흑물질: 그 중력적 효과를 통해서만 추론되며, 직접적인 감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태도는 실용적 실재론에 가깝다: 이 개념들이 관찰 가능한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유용하며, 다양한 독립적 증거에 의해 지지된다면, 그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용적 접근: 구성적 실재론과 다원주의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에서 양극단의 입장 사이에는 다양한 중간적, 실용적 접근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접근들은 종종 과학의 실제 실천과 더 잘 부합한다.

구성적 실재론(Constructive Realism)

롬 하레(Rom Harré)와 같은 철학자들이 제안한 구성적 실재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모델과 실재의 관계: 과학은 직접적으로 실재를 기술하기보다는, 실재의 특정 측면을 포착하는 모델을 구성한다.
  2. 유비와 은유의 역할: 과학적 모델은 종종 유비와 은유에 기초한다(예: 원자는 '태양계와 같다', 전자는 '입자이자 파동이다').
  3. 이론의 부분적 참: 이론은 세계의 일부 측면에 대해서는 참될 수 있지만, 모든 측면에 대해 참일 필요는 없다.
  4. 인식적 깊이의 수준: 일부 이론적 존재는 다른 것들보다 더 많은 증거와 더 강한 이론적 통합에 의해 지지된다.

이러한 접근은 이론과 실재 사이의 관계가 단순한 '거울' 관계가 아니라, 복잡한 구성적 관계임을 인정한다. 과학적 지식은 실재에 대한 '발견'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다원주의적 실재론(Pluralistic Realism)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 이안 해킹(Ian Hacking) 등이 옹호하는 다원주의적 실재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존재론적 다원주의: 세계는 단일한 통합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과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영역은 서로 다른 이론적 접근을 요구할 수 있다.
  2. 개입과 조작의 중요성: 이안 해킹은 "실재한다는 것은 작용을 가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조작하고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3. 법칙과 인과의 국소성: 카트라이트는 자연 법칙이 보편적이라기보다는 특정 조건과 맥락에서만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4. 실천 중심의 실재론: 추상적 이론보다는 과학의 실천적 성공, 특히 기술적 개입과 조작의 성공에 기초한 실재론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접근은 과학의 다양한 분과와 이론들이 세계의 서로 다른 측면이나 수준을 다루며, 이들 사이의 완벽한 통합이나 환원이 항상 가능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실용적 실재론의 적용: 생물학적 종과 정신 상태

실용적, 다원주의적 실재론의 적용 예를 살펴보자:

  1. 생물학적 종: '종'이라는 개념이 실재하는 자연적 유형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단지 인간의 분류 체계인가? 다원주의적 관점에서는, 종 개념이 특정 맥락과 목적(예: 진화적 연구, 보존 생물학)에서 유용하다면 그 맥락 내에서 실재성을 인정할 수 있다.
  2. 정신 상태와 신경과학: '마음'과 '뇌'의 관계는 어떠한가? 실용적 실재론은 정신 상태(욕구, 믿음, 의도 등)가 특정 설명적 맥락에서 실재성을 가질 수 있으며, 이것이 반드시 신경 상태로 환원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심리학과 신경과학은 동일한 현상을 다른 수준에서 접근하는 상호보완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실용적 접근은 과학의 실제 실천에 더 가깝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엄격한 실재론자나 반실재론자라기보다, 특정 맥락과 연구 목적에 따라 유연하게 이론적 존재의 실재성을 다룬다.

구조적 실재론: 중도적 입장의 부상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은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중도적 입장으로, 특히 역사적 귀납 논변(과거의 성공적 이론들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으므로 현재의 이론들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구조적 실재론의 핵심 주장

존 워럴(John Worrall)이 발전시킨 구조적 실재론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수학적 구조의 연속성: 과학 이론이 변화할 때, 이전 이론의 수학적 구조나 방정식이 새 이론에 보존되거나 그 '극한 경우'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프레넬의 광학 이론의 수학적 구조는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에 보존되었다.
  2. 구조와 본성의 구분: 우리는 세계의 구조(관계, 패턴)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그 관계를 맺는 대상의 본질적 본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3. 온건한 회의주의: 과학 이론의 존재론적 내용(무엇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그 구조적 내용(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실재론적 태도를 취한다.

구조적 실재론의 형태

구조적 실재론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발전해왔다:

  1. 인식적 구조적 실재론(ESR): 워럴의 원래 입장으로, 관계와 구조는 알 수 있지만 그 관계를 맺는 대상들의 본성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세계의 구조는 알 수 있지만, 그 구조의 '내용'은 알 수 없다.
  2. 존재론적 구조적 실재론(OSR): 제임스 래디먼(James Ladyman), 스티븐 프렌치(Steven French) 등이 발전시킨 더 급진적인 입장으로, 관계만 실재하고 관계를 맺는 독립적인 대상은 없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근본적으로 구조나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립적인 '사물'이라는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구조적 실재론의 장점

구조적 실재론은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갖는다:

  1. 역사적 귀납 논변에 대한 대응: 역사적으로 과학 이론의 존재론적 내용은 변화했지만, 그 수학적 구조는 종종 보존되었다. 이는 우리가 구조에 대해서는 누적적 지식을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2. 현대 물리학과의 일치: 특히 양자물리학은 개별 입자보다는 수학적 구조와 관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 입자는 특정 상태 벡터나 파동함수로 표현되며, 양자장 이론에서는 입자보다 장(field)이 근본적이다.
  3.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타협: 구조적 실재론은 실재론의 주요 직관(과학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과 반실재론의 주요 통찰(모든 이론은 잠정적이고, 우리의 존재론적 믿음은 종종 틀릴 수 있다)을 모두 수용한다.

과학 이론의 진리성: 참, 근사적 참, 그리고 경험적 적합성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의 중심에는 과학 이론의 '진리성'에 대한 질문이 있다. 이론이 '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여러 관점을 살펴보자.

대응 이론과 실재론

전통적 실재론은 진리의 대응 이론(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에 의존한다:

  1. 진술의 참: 이론적 진술은 세계가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때 참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음전하를 가진다"는 진술은 실제로 전자가 존재하고 음전하를 가질 때 참이다.
  2. 실재와의 일치: 이론이 참이라는 것은 그것이 묘사하는 세계의 측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인과적 연결: 많은 실재론자들은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이 관찰 가능한 현상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전자가 실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양한 관찰 가능한 효과(전기 현상, 화학 반응 등)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근사적 참과 실재론적 회의주의

많은 현대 실재론자들은 과학 이론이 '완전히 참'이라기보다는 '근사적으로 참'(approximately true)이라고 주장한다:

  1. 참에 가까움: 이론은 실재에 대한 완벽한 기술이 아니라, 실재의 중요한 측면들을 대략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2. 진보적 근사: 과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재에 더 가까운 근사치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진전한다.
  3. 실용적 성공: 이론이 근사적으로 참이라는 것은 그것이 실용적 목적(예측, 통제, 설명)에 충분히 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은 과학사의 교훈(모든 이론은 결국 개정될 수 있다)을 인정하면서도, 과학의 진보적 성격을 유지한다.

경험적 적합성과 반 프라센의 구성적 경험주의

반 프라센의 구성적 경험주의는 '참'이 아닌 '경험적 적합성'(empirical adequacy)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1. 관찰 가능한 현상에 대한 참: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것은 그것이 관찰 가능한 현상에 대해서만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미결정된 존재론: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여러 다른 존재론적 해석이 같은 경험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3. 실용적 목표: 과학의 목표는 세계의 '참된 이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적합한 이론을 찾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양자역학의 다양한 해석(코펜하겐 해석, 다세계 해석 등)은 모두 경험적으로 동등하게 적합할 수 있으며, 어느 것이 '참'인지 결정하는 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다.

진리의 화용론적 이해

일부 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보다 화용론적인 접근을 제안한다:

  1. 맥락 의존성: 이론이 '참'인지 여부는 특정 맥락, 목적, 관심사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2. 설명적 역량: 이론의 가치는 그것이 제공하는 설명과 이해의 질에 의해 평가된다.
  3. 실천과 연결: 진리는 추상적 대응 관계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적 활동(예측, 통제, 기술적 응용) 사이의 성공적인 연결로 이해된다.

이러한 화용론적 접근은 과학의 실제 실천과 더 가깝게 부합하며, 과학이 다양한 목적과 맥락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인간 활동임을 인정한다.

과학철학에서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의 현대적 함의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은 단순히 추상적인 철학적 문제를 넘어, 현대 과학과 기술의 발전, 과학 교육, 과학-사회 관계 등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과학 연구와 정책에 대한 함의

  1. 다원주의적 연구 전략: 이론의 다양성과 경쟁이 과학의 발전에 중요하다는 점에서, 단일한 이론적 패러다임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접근법을 장려하는 과학 정책이 바람직할 수 있다.
  2. 이론의 잠정성 인식: 과학 이론의 잠정적 성격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의 주류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대안적 관점의 탐색을 장려할 수 있다.
  3.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 세계의 다양한 수준과 측면을 다루는 다양한 과학 분야 간의 협력과 통합을 촉진할 수 있다.

과학 교육에 대한 함의

  1. 과학의 본질 가르치기: 과학을 확정된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진화하는 이론적 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2. 이론과 증거의 관계: 이론이 증거에 의해 어떻게 지지되고 도전받는지, 그리고 관찰과 이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촉진한다.
  3. 과학의 다양한 목표: 과학이 단순히 '진리 발견'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 설명, 통제, 이해 등 다양한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학-사회 관계에 대한 함의

  1. 과학의 권위와 한계: 과학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와 잠정성을 이해함으로써 과학의 역할에 대한 더 균형 잡힌 시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
  2. 가치와 과학의 관계: 과학 이론과 실천에 가치적 요소가 어떻게 개입되는지, 그리고 이것이 과학의 객관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3. 과학 커뮤니케이션: 일반 대중에게 과학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특히 불확실성, 이론적 다양성, 과학적 논쟁을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결론: 실재론과 반실재론 너머의 과학 이해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은 과학철학의 중심적 주제로 남아있지만,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이 이분법을 넘어서 과학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는 정교한 관점을 발전시키고 있다.

현대적 종합의 방향

  1. 맥락적 실재론: 특정 이론적 존재나 구조의 실재성은 맥락, 증거의 질과 양, 설명적 역할 등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2. 층위화된 존재론: 세계는 다양한 존재론적 층위(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등)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층위는 자체적인 설명적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
  3. 실천 중심의 과학철학: 추상적인 인식론적 문제보다는 과학의 실천, 방법론, 실험적 기법, 모델링 전략 등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4. 과학의 사회적 차원 인식: 과학이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 내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인식적 권위와 객관성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철학적 반성의 가치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 논쟁을 통해 우리는 과학의 본질, 목적, 한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반성은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과학과 사회의 관계, 과학 교육, 과학 정책 등 실질적인 문제들에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궁극적으로, 과학적 지식의 본질과 범위에 대한 이해는 과학이 인간의 이해와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에 대한 더 넓은 이해의 일부이다.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은 이러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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