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hics

윤리학 14. 현대 규범윤리학 – 의무론, 결과론, 덕윤리 재부상

SSSCH 2025. 4. 9.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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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까지 메타윤리학 논쟁이 윤리학의 중심을 차지하던 시기가 지나고, 1970년대 이후 철학자들은 다시 규범윤리학의 실질적 문제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와 같은 고전적인 윤리적 질문들이 새로운 시대적 맥락과 지적 배경 속에서 재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 가지 주요 윤리 이론—의무론, 결과론(특히 공리주의), 덕윤리—이 현대적 형태로 재부상하며 활발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이러한 현대 규범윤리학의 발전과 세 가지 주요 이론의 새로운 모습을 살펴보자.

규범윤리학의 부활

20세기 전반기 동안 윤리학자들의 관심은 주로 윤리적 언어의 의미와 본질을 탐구하는 메타윤리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에모티비즘이나 오류이론과 같은 메타윤리학적 입장들은 전통적인 규범윤리학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듯했다. 만약 도덕적 판단이 단지 감정의 표현이거나 객관적 진리를 담고 있지 않다면, 어떤 윤리 이론이 '옳은' 이론인지 논쟁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은 메타윤리학적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낙태, 안락사, 전쟁의 정당성, 분배적 정의와 같은 현실적인 윤리 문제들은 이론적 틀 없이는 제대로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런 배경에서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1971),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1974),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덕의 상실(After Virtue)』(1981)과 같은 중요한 저작들이 발표되면서 규범윤리학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규범윤리학은 전통적인 윤리 이론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통해 이를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이제 의무론, 결과론, 덕윤리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구성되었는지 각각 살펴보자.

의무론의 현대적 재구성

칸트의 의무론은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해석과 발전을 거치게 된다. 특히 존 롤스나 크리스틴 코스가드(Christine Korsgaard), 오노라 오닐(Onora O'Neill), 바버라 허먼(Barbara Herman)과 같은 철학자들은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측면보다는, 그것이 함축하는 인간 존엄성과 자율성에 대한 존중, 그리고 도덕 공동체의 이상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을 사회계약론적 방식으로 재해석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과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도덕 원칙이 모든 합리적 행위자가 자신의 특수한 상황과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조건에서 동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칸트적 보편성 개념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코스가드는 『자기구성의 원천(The Sources of Normativity)』(1996)에서 칸트 윤리학을 행위자 중심적 접근으로 재해석했다. 그녀에 따르면 도덕적 의무는 단순히 외부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합리적 행위자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오닐은 칸트 윤리학의 보편화 가능성 테스트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그녀는 『도덕의 구성(Constructions of Reason)』(1989)에서 칸트의 윤리학이 추상적인 원칙이 아닌, 구체적인 맥락에서의 실천적 추론 방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현대 칸트주의자들은 칸트 윤리학의 경직성, 결과 무시, 감정에 대한 부정적 태도 등 전통적으로 비판받아 온 요소들을 완화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중심에 두는 칸트적 직관을 보존하려 했다. 또한 그들은 칸트 윤리학이 단순히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통합성(integrity)과 자기 존중의 윤리를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과주의 윤리학의 발전과 다양화

결과주의, 특히 공리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들어 여러 방향으로 발전하고 다양화되었다. 전통적인 공리주의가 쾌락이나 행복의 극대화를 중심에 두었다면, 현대 공리주의는 '이익(interests)', '선호(preferences)', '복지(welfare)' 등 더 넓은 개념을 도입하여 이론을 확장했다.

R.M. 헤어(R.M. Hare)는 『도덕적 사고(Moral Thinking)』(1981)에서 '이상적 관찰자(ideal observer)' 또는 '대천사(archangel)'라는 개념을 통해 공리주의를 방어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상황의 모든 사실과 모든 사람의 선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이상적 관찰자라면 항상 공리주의적 판단에 도달할 것이다.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실천 윤리학(Practical Ethics)』(1979)에서 선호 공리주의(preference utilitarianism)를 발전시켰다. 이 관점에서는 단순한 쾌락이 아닌, 개인의 선호나 이익 충족이 중요하다. 싱어는 이를 바탕으로 동물 해방, 세계 빈곤, 생명윤리 등 다양한 현실 문제에 공리주의를 적용했다.

또한 현대 공리주의는 '행위 공리주의(act utilitarianism)'와 '규칙 공리주의(rule utilitarianism)'로 세분화되었다. 행위 공리주의는 각각의 개별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보는 반면, 규칙 공리주의는 일반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브랜트(Richard Brandt)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공리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데이비드 라이언스(David Lyons)가 규칙 공리주의의 중요한 옹호자들이다.

더 넓게 보면, 결과주의적 사고는 복지경제학, 게임이론, 공공정책 분석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마티아 센(Amartya Sen)과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 발전시킨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은 공리주의의 단순한 쾌락이나 선호 충족을 넘어, 인간의 근본적 역량과 기능의 발휘를 복지의 핵심으로 보는 보다 풍부한 결과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

덕윤리의 부활과 새로운 위상

세 가지 주요 윤리 이론 중 가장 극적인 부활을 경험한 것은 아마도 덕윤리일 것이다. 근대 윤리학에서 상대적으로 주변화되었던 덕윤리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새로운 관심의 물결 속에서 현대 윤리학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재등장했다.

이 부활의 중요한 계기는 G.E.M. 앤스콤(G.E.M. Anscombe)의 논문 「현대 도덕철학(Modern Moral Philosophy)」(1958)이었다. 앤스콤은 이 논문에서 의무와 규칙에 초점을 맞춘 근대 도덕철학이 법(law)의 개념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신이라는 입법자가 없는 세속적 맥락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대신 덕(virtue), 성격(character), 번영(flourishing)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리파 풋(Philippa Foot)은 『덕과 악덕(Virtues and Vices)』(1978)과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2001)에서 인간의 번영(flourishing)에 기여하는 성격 특성으로서의 덕을 탐구했다. 그녀는 덕이 단순히 문화적 구성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필요에 근거한 객관적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은 덕윤리 부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 중 하나다. 매킨타이어는 현대 도덕 담론이 파편화되고 일관성을 잃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 개념과 목적론(teleology)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실천(practice), 전통(tradition), 서사(narrative)와 같은 개념을 통해 덕을 재구성하고, 공동체적 맥락 속에서 도덕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잘린드 허스트하우스(Rosalind Hursthouse)는 『덕윤리(On Virtue Ethics)』(1999)에서 덕윤리가 단순히 의무론이나 결과론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행위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 독립적인 윤리 이론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녀는 "덕이 있는 행위자가 그러한 상황에서 행할 것"이라는 기준을 통해 덕윤리가 구체적인 도덕적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 덕윤리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다양한 문화적, 철학적 전통으로의 확장이다. 마사 누스바움과 같은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한편, 다른 학자들은 유교, 불교, 이슬람 등 비서구 전통의 덕 개념을 탐구하며 비교 덕윤리학을 발전시켰다.

덕윤리의 부활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의 변화를 넘어, 근대 이후 개인주의와 규칙 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반영한다. 덕윤리는 추상적 원칙보다 구체적 맥락과 실천을 강조하고, 고립된 행위보다 행위자의 성격과 삶 전체를 윤리적 평가의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다양한 윤리적 도전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적 관점을 제시한다.

세 이론의 대립과 조화 시도

현대 규범윤리학에서는 의무론, 결과론, 덕윤리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여전히 중요한 틀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 세 관점을 통합하거나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도 이루어지고 있다.

마이클 슬로트(Michael Slote)는 『행위자 기반 덕윤리(Agent-Based Virtue Ethics)』(2001)에서 행위의 옳고 그름이 행위자의 동기나 성격에 달려있다는 '행위자 기반 덕윤리'를 발전시켰다. 이는 칸트의 동기 중심 의무론과 덕윤리적 행위자 중심 접근을 결합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데렉 파핏(Derek Parfit)은 방대한 저작 『이성에 관하여(On What Matters)』(2011)에서 칸트주의, 결과주의, 계약주의가 궁극적으로 같은 도덕적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을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는 이 세 이론이 제대로 이해된다면 서로 수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낸시 셔먼(Nancy Sherman)은 『덕의 형성(The Fabric of Character)』(1989)에서 칸트 윤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덕윤리 사이의 연결점을 탐색했다. 그녀는 칸트 윤리학이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감정과 덕의 역할에 더 많은 공간을 허용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통합 시도들은 각 이론이 도덕적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의무론은 원칙과 권리, 결과론은 결과와 복지, 덕윤리는 성격과 동기—을 포착하고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완전한 윤리 이론은 이 모든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현대 윤리학자들은 단일 이론에 대한 독단적 고수보다는, 다양한 윤리적 고려사항들을 적절히 균형 있게 반영하는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 또는 '성찰적 균형(reflective equilibrium)'을 추구한다. 이는 롤스가 제안한 것처럼, 특정 원칙과 개별 판단 사이의 상호 조정을 통해 일관된 윤리적 관점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응용윤리학의 발전과 규범이론의 검증장

현대 규범윤리학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응용윤리학(applied ethics)의 급속한 발전과 그것이 추상적 윤리 이론에 미친 영향이다. 생명윤리학, 환경윤리학, 정보윤리학, 비즈니스윤리학 등 다양한 응용윤리학 분야는 단순히 추상적 이론을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이론 자체를 시험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생명윤리학에서의 인간 배아 연구나 안락사 문제는 생명의 가치, 자율성, 위해(harm)의 개념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환경윤리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 다른 생명체나 생태계 전체에 대한 도덕적 고려로 윤리적 시야를 확장한다. 페미니스트 윤리학은 전통적 윤리 이론들이 간과해 온 젠더적 편향과 돌봄의 윤리를 조명한다.

이러한 응용 영역에서의 구체적인 도전들은 추상적 윤리 이론들이 실제 문제에 얼마나 잘 대응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검증장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의무론, 결과론, 덕윤리는 각각의 강점과 한계를 드러내며, 이는 다시 이론의 수정과 발전으로 이어진다.

특히 현대 윤리학자들은 단일 이론의 순수한 적용보다는, 특정 문제 영역에 적합한 다양한 윤리적 고려사항들의 균형을 찾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의료윤리에서는 자율성 존중(의무론적), 위해 방지(결과론적), 정의로운 분배, 그리고 돌봄의 덕과 같은 다양한 원칙들이 함께 고려된다.

윤리학의 미래 전망: 조화와 통합의 가능성

현대 규범윤리학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면, 의무론, 결과론, 덕윤리 사이의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점차 완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각 이론은 서로의 비판을 수용하며 더 정교해지고, 동시에 다른 이론의 통찰을 부분적으로 통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 의무론자들은 원칙의 추상성과 경직성을 완화하고, 결과와 덕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현대 결과주의자들은 권리, 정의, 덕과 같은 비결과적 가치들을 이론에 통합하려 노력한다. 현대 덕윤리학자들은 덕 개념이 어떻게 규범적 행위 지침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려 한다.

이러한 수렴 현상은 어쩌면 도덕적 현상의 복잡성과 다면성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도덕은 원칙과 결과, 그리고 성격이라는 세 가지 차원을 모두 포함하는 복합적인 현상이기에, 완전한 윤리 이론은 이 모든 측면을 포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대 윤리학의 다양한 경험적 전환—도덕심리학, 진화윤리학, 신경윤리학 등—은 이론적 통합에 새로운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도덕적 직관과 추론의 신경학적 기반에 대한 연구는 의무론적 직관과 결과론적 계산이 모두 우리의 도덕적 사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통합과 조화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윤리 이론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와 긴장은 여전히 남아있다. 의무론이 강조하는 정언적 의무와 결과론이 주장하는 최선의 결과 사이의 충돌, 보편적 원칙과 덕윤리가 중시하는 맥락적 판단 사이의 긴장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윤리 이론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관점들은 복잡한 윤리적 문제에 접근할 때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치 다양한 렌즈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것처럼, 서로 다른 윤리 이론들은 도덕적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포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결국 현대 규범윤리학의 다양한 발전은 윤리적 사고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단일한 이론이 모든 윤리적 문제에 완벽한 해답을 제공할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이론적 관점들의 상호작용은 우리의 도덕적 이해를 더욱 깊고 섬세하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이론적 다원주의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윤리적 도전들에 대응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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