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sthetics

현상학적 미학 19. 능동·체화 미학과 예술 행위의 인지적 확장

SSSCH 2025. 5. 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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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화된 인지와 미적 경험

최근 미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 중 하나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의 도입이다. 이 관점은 인지과학과 현상학의 교차점에서 발전했으며, 특히 알바 노에(Alva Noë)의 『이상한 도구들』(Strange Tools, 2015)을 통해 미학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체화된 인지 이론은 전통적인 정신-신체 이원론을 거부하고, 인지가 뇌 안에 국한된 과정이 아니라 몸 전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노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지가 몸을 넘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확장된다는 '능동적 인지'(enactive cognition)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메를로-퐁티의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 개념과 깊이 공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적 경험은 단순한 '관조'나 '감상'이 아니라, 신체-환경-작품 사이의 능동적 상호작용이다. 예술 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이며, 이 행위는 우리의 인지를 변형하고 확장한다.

예를 들어 회화를 감상할 때, 우리는 단순히 정적인 이미지를 '본다'기보다는,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행위'를 수행한다. 이는 미세한 안구 운동, 신체 위치 조정, 주의력 집중 등 복합적인 신체적 활동을 포함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작품과 '대화'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지적 가능성이 열린다.

예술 행위와 조직화된 활동

노에의 독창적 기여 중 하나는 예술을 '조직화된 활동'(organized activity)과 '이차적 활동'의 관계를 통해 분석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기본적 활동들—걷기, 말하기, 보기 등—은 '일차적' 또는 '조직화된' 활동이다. 이들은 문화적·생물학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우리가 대부분 의식하지 않고 수행하는 활동들이다.

반면 예술은 '이차적 활동'으로, 이러한 일차적 활동을 대상화하고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춤은 일상적 걷기와 움직임을 대상화하고 재구성하며, 회화는 보는 활동을, 문학은 말하기와 이야기하기를 대상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은 우리의 습관화된 활동 패턴을 가시화하고, 이에 대한 반성을 가능케 하는 '이상한 도구'이다.

노에는 이를 "예술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준다"고 표현한다. 예술은 우리가 평소에 의식하지 않는 '세계-내-존재'의 방식을 가시화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습관화된 인지·행동 패턴에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표현의 영역이 아니라, 인식론적·존재론적 탐구의 장이다.

지각-행위 순환과 미적 참여

체화된 인지 관점에서 지각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의 '어포던스'(affordance) 개념을 발전시킨 노에는 지각이 단순한 정보 수용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 가능성을 인식하는 능동적 과정이라고 본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맥락에서 세계를 지각한다.

이러한 '지각-행위 순환'(perception-action loop)은 미적 경험에서 특히 중요하다. 예술 작품은 특정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즉, 특정한 '미적 어포던스'—를 제공한다. 관람자는 이러한 어포던스에 반응하며 작품과 상호작용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지각-행위 패턴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추상 표현주의 회화는 전통적인 '재현적 보기'가 아닌, 색채, 질감, 제스처 등을 통한 새로운 시각적 탐색을 요구한다. 이러한 새로운 '보는 방식'은 단순한 시각적 경험이 아니라, 신체 전체가 참여하는 복합적 활동이다. 로스코의 거대한 색면 앞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본다'기보다는 색채의 '장'(field) 안에 신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미적 경험을 '수동적 관조'에서 '능동적 참여'로 재정의한다. 관람자는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작품의 의미와 경험을 공동 구성하는 적극적 참여자가 된다.

예술과 인지적 확장

앤디 클라크(Andy Clark)와 데이비드 찰머스(David Chalmers)의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 이론은 인지가 뇌 안에 국한되지 않고 환경과 도구로 확장된다고 주장한다. 노트, 컴퓨터, 스마트폰 등이 우리 인지 과정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예술 작품 역시 인지적 확장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미학에 적용된 이 관점은 예술이 단순한 표현이나 재현이 아닌, '인지적 확장'의 수단임을 시사한다. 리처드 서스킨드(Richard Shusterman)는 이를 '소마미학'(somaesthetics)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소마미학은 미적 경험이 신체를 통해 이루어지며, 동시에 신체적 인식과 능력을 변형하고 확장한다고 본다.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지적 확장을 가능케 한다:

  1. 지각적 확장: 새로운 보기, 듣기, 느끼기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지각 능력을 확장한다. 예를 들어 인상주의 회화는 빛의 순간적 효과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민감성을 발달시켰다.
  2. 정서적 확장: 일상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복합적 정서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정서적 레퍼토리를 확장한다. 트라우마나 숭고와 같은 극단적 정서 경험을 안전한 맥락에서 탐색할 수 있게 한다.
  3. 개념적 확장: 기존 개념 체계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안한다. 개념 미술이나 철학적 소설은 특히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다.
  4. 행위적 확장: 새로운 신체적 움직임과 상호작용 패턴을 발달시킨다. 인터랙티브 설치나 참여 예술은 새로운 행위 가능성을 탐색하게 한다.

이러한 확장은 일시적인 경험을 넘어, 지속적인 인지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특정 예술 형식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인지 구조 자체가 변형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닌, 인지적 변형과 발달의 도구이다.

체화된 시뮬레이션과 미러 뉴런

최근 신경과학의 발견은 체화된 미학에 중요한 실증적 지지를 제공한다. 특히 '미러 뉴런'(mirror neurons)의 발견은 예술 경험의 신체적 기반을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미러 뉴런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할 때 마치 자신이 그 행동을 수행하는 것처럼 활성화되는 신경 세포다. 이는 우리가 예술 작품을 경험할 때 일종의 '체화된 시뮬레이션'(embodied simulation)을 통해 작품과 관계 맺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추상 표현주의 회화의 붓 자국을 볼 때, 우리의 뇌는 마치 우리 자신이 그 붓질을 하는 것처럼 운동 피질이 활성화된다. 마찬가지로 춤이나 연극을 관람할 때, 우리는 신경학적 수준에서 배우/무용수의 움직임을 '모방'한다. 이는 미적 경험이 단순한 시각적 인식이 아닌, 전신적 '공감각적' 참여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구는 예술이 '신체 도식'(body schema)을 재구성하는 잠재력을 가짐을 시사한다. 신체 도식은 우리가 공간과 자신의 신체를 인식하는 잠재의식적 틀로, 예술 경험을 통해 일시적으로 변형되거나 확장될 수 있다. 빅토리아 피티스-테일러(Vittorio Gallese)와 데이비드 프리드버그(David Freedberg)의 연구는 이러한 과정이 예술 감상의 핵심적 측면임을 보여준다.

예술 행위와 숙련된 기술

능동·체화 미학에서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예술 행위 자체에 대한 분석이다. 예술 창작은 단순한 '표현'이나 '영감'의 문제가 아니라, '숙련된 기술'(skilled practice)의 발달 과정이다.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의 '기술 습득 모델'을 예술에 적용하면, 예술가의 발달은 명시적 규칙에서 체화된 노하우로의 전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초보자는 명시적 규칙과 의식적 계획에 의존하지만, 전문가는 '몸이 아는' 암묵적 지식에 기반해 직관적으로 작업한다.

이러한 관점은 예술 창작에서 '신체-도구 통합'(body-tool integratio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화가에게 붓은, 음악가에게 악기는 단순한 외부 도구가 아니라 확장된 신체의 일부가 된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붓은 화가의 눈과 손의 확장"이라 표현했다.

더 나아가 예술 창작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전문적 직관'(expert intuition)의 발달을 포함한다. 전문적 직관은 상황의 미묘한 뉘앙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으로, 이는 명시적 규칙이나 공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직관은 반복적 실천과 체화된 경험을 통해서만 발달한다.

이러한 관점은 예술 교육에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전통적인 '지식 전달' 모델을 넘어, 체화된 실천과 '인지적 도제'(cognitive apprenticeship)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술 교육은 명제적 지식이 아닌, 체화된 노하우와 '상황적 지능'(situated intelligence)의 발달을 중심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일상 미학과 체화된 실천

능동·체화 미학은 전통적 '순수 예술'의 경계를 넘어, 일상적 실천으로 관심을 확장한다. 노에는 요리, 정원 가꾸기, 목공, 스포츠 등 다양한 일상 활동이 지닌 미적·인지적 차원을 강조한다.

이러한 일상 활동들은 단순한 '실용적' 행위가 아니라, 세계와의 특정한 관계 맺음 방식이자 '사고의 형식'이다. 요리를 통해 우리는 맛, 질감, 향의 복합적 관계를 탐구하고, 정원 가꾸기를 통해 시간과 생명의 리듬을 경험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추상적 개념화로 환원되지 않는 체화된 지식의 형태를 발달시킨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일상 활동에서 '도구 사용'의 중요성이다. 도구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능케 하는 '인지적 중개자'이다. 요리 도구, 정원 도구, 스포츠 장비 등은 각각 특정한 '체화된 인지 스타일'을 형성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문가-아마추어' 구분에 대한 재고를 촉구한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전문가의 영역으로 간주되었으나, 체화된 미학은 모든 사람이 일상적 실천을 통해 미적·인지적 참여를 발달시킬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민주화된 미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디지털 기술과 확장된 인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체화된 인지와 예술의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더한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인공지능(AI) 등의 기술은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N. 캐서린 헤일스(N. Katherine Hayles)는 디지털 기술이 '포스트휴먼' 주체성의 형성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디지털 도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인지적 경계는 재구성되고 확장된다. 이는 예술 창작과 경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생성 AI'와 같은 기술이 예술적 공동 창작의 새로운 형태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인간 예술가와 AI의 협업은 단순한 도구 사용을 넘어, 인간 창의성의 확장과 재정의를 의미할 수 있다. 이는 '창작의 주체'와 '도구'의 경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디지털 기술은 체화된 경험의 '탈신체화' 위험도 제기한다. VR이 제공하는 몰입적 경험은 한편으로는 신체적 경험의 확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세계와의 접촉 감소를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긴장은 디지털 시대 체화된 미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된다.

마크 한센(Mark Hansen)과 같은 이론가들은 디지털 미디어가 오히려 '신체성의 귀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지털 경험은 시각 중심주의를 넘어, 촉각, 운동감각, 전정감각 등 다양한 감각 양식의 참여를 요구한다. 이러한 '다감각적 참여'는 디지털 예술의 중요한 미학적 차원이 될 수 있다.

신경다양성과 체화된 지각

체화된 미학의 또 다른 중요한 발전은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다. 자폐증, ADHD, 감각 처리 장애 등 다양한 신경 상태는 단순한 '장애'가 아니라 세계를 지각하고 상호작용하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폐 학자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은 자신의 '시각적 사고' 방식이 특유의 강점을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시각 예술가 중에는 난독증이 오히려 시각적 창의성에 기여한다고 보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은 미적 경험의 '보편성'에 대한 전통적 가정에 도전한다. 다양한 신경 상태는 각각 독특한 지각 방식과 미적 감수성을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예술이 다양한 인지 스타일과 지각 방식을 포용하고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렌트 버맨(Arent Weevers)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신경다양성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탐구한다. 그들의 작업은 다양한 신경 상태가 제공하는 독특한 지각적 가능성을 시각화하고, 이를 통해 지각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확장한다.

이러한 접근은 체화된 미학의 중요한 윤리적·정치적 차원을 드러낸다. 예술은 단순한 미적 쾌락이나 지적 탐구를 넘어, 다양한 존재 방식과 지각 방식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장이 될 수 있다.

결론

능동·체화 미학은 예술과 미적 경험에 대한 근본적 재고를 촉구한다. 알바 노에의 작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 관점은 예술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행위'로 이해하며, 미적 경험을 '관조'가 아닌 '참여'로 재정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은 우리의 습관화된 인지·행동 패턴을 가시화하고 재구성하는 '이상한 도구'이다. 예술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지각-행위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이를 통해 인지적 확장을 경험한다.

체화된 시뮬레이션, 미러 뉴런, 전문적 직관 등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이론적 관점에 실증적 지지를 제공한다. 예술 경험은 단순한 시각적·개념적 이해가 아닌, 전신적 참여와 신체 도식의 재구성을 포함한다.

능동·체화 미학은 또한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여 일상적 실천, 디지털 기술, 신경다양성 등 다양한 영역과의 연결을 탐구한다. 이는 예술을 특권적 영역에서 일상적 실천으로, 전문가의 영역에서 모든 사람의 잠재적 활동으로 재위치시킨다.

궁극적으로 능동·체화 미학은 예술의 근본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예술은 단순한 장식이나 오락이 아니라, 인간 인지의 확장과 변형을 위한 필수적 실천이다. 노에의 표현을 빌리면, 예술은 "우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세계와 관계 맺는지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과 효율성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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