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y

현대철학 2. 키에르케고르와 실존의 문제

SSSCH 2025. 4.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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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란

19세기 중반, 덴마크의 한 외로운 사상가가 당대 철학계를 지배하던 헤겔의 체계철학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이름은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짧은 생애 동안 그는 철학사의 흐름을 바꿀 만한 혁명적 사유를 펼쳤고, 후대에 '실존주의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갖는 혁명성은 무엇보다 그가 철학의 중심을 '객관적 진리'에서 '주관적 진리'로, '보편적 체계'에서 '개별적 실존'으로 옮겨놓았다는 점에 있다. 이는 데카르트 이래 근대철학이 추구해온 방향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 코펜하겐에서 엄격한 루터교 신앙을 가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는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 속에서 신을 저주했던 경험 때문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고, 이러한 아버지의 죄의식과 우울함은 어린 쇠렌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레기네 올센이라는 여성과 약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파혼을 선언한다. 이 결정의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논쟁거리지만, 그가 작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삶과 결혼생활을 양립할 수 없다고 느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실패한 연애는 그의 생애와 사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키에르케고르는 대학 시절 헤겔 철학을 공부했고, 당시 덴마크 지성계를 지배하던 헤겔주의에 깊은 반감을 갖게 된다. 그는 헤겔의 사변적 철학이 실제 인간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고 보았고, 이에 맞서 구체적인 개인의 실존을 철학의 중심에 놓고자 했다.

『두려움과 떨림』 - 신앙의 역설과 주관적 진리

1843년 출간된 『두려움과 떨림』은 키에르케고르의 대표작 중 하나로, 요한네스 데 실렌시오(침묵의 요한네스)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구약성서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신앙의 본질과 윤리적 보편성의 한계를 탐구한다.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은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살인 시도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행위가 '믿음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윤리적 보편성을 넘어서는 '신앙의 도약'을 통해 '종교적 실존'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하는 '주관적 진리'의 개념이 드러난다. 그에게 진리는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열정적으로 관계 맺는 것이다. "주관성이 진리다"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진리가 개인의 열정적인 내면적 결단 속에서 발견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 - 절망과 자아의 문제

1849년 출간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안티-클리마쿠스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다. 이 저작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인 '절망'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절망은 인간의 자아가 올바르게 관계 맺지 못하는 상태, 즉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 자신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절망', 둘째,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지만 그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 '나약함의 절망', 셋째,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반항의 절망'이다.

진정한 자아는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신 앞에 선 자아"로서, 자신의 유한성과 무한한 가능성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형성된다. 그는 절망의 반대인 '믿음'만이 이러한 자아의 온전한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와 삶의 단계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삶의 발전 단계를 심미적(aesthetic), 윤리적(ethical), 종교적(religious) 단계로 구분했다. 이 세 단계는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와 『삶의 단계들』(1845) 등에서 자세히 전개된다.

심미적 단계는 감각적 쾌락과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돈 주안이나 파우스트와 같은 문학적 인물들이 이 단계의 대표적 예다. 이 단계의 인간은 자유를 '선택 가능성'으로만 이해하며 진정한 헌신과 책임을 회피한다.

윤리적 단계는 보편적 도덕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단계다. 여기서 개인은 사회적 규범과 의무를 내면화하고, 일관된 자아를 발전시킨다. 키에르케고르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학을 이 단계의 전형으로 보았다.

종교적 단계는 키에르케고르가 가장 높이 평가한 삶의 방식으로, 개인이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윤리적 보편성조차도 초월하여, 신앙의 '역설'과 '도약'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한다.

각 단계로의 이행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선택'과 '결단'의 문제다. 특히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성적 사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앙의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주장한다.

실존적 변증법과 간접적 전달 방식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흔히 '실존적 변증법'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는 헤겔의 논리적·역사적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헤겔이 모든 대립을 더 높은 종합 속에서 화해시키려 했다면, 키에르케고르는 오히려 대립의 긴장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개인이 주체적 결단을 내리도록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유한성과 무한성, 필연성과 가능성, 시간성과 영원성 등의 대립 속에서 인간 실존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대립은 논리적으로 해소될 수 없으며, 오직 개인의 실존적 '도약'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다, 여러 가명(pseudonyms)을 사용해 다양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대변하게 했다. 이러한 '간접적 전달' 방식은 독자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텍스트와 씨름하며 자신만의 진리를 발견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와 헤겔 철학의 대결

키에르케고르 철학의 핵심은 당대를 지배하던 헤겔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다. 헤겔은 세계사를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보는 거대한 체계를 구축했다. 그의 변증법적 사유는 모든 대립과 모순을 더 높은 종합 속에 포괄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개별성과 주관성은 보편적 이성의 발전 속에 흡수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헤겔의 체계가 실제 인간의 삶과 괴리되어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헤겔은 우리 모두를 위한 장엄한 궁전을 지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옆의 개집에서 살았다"라고 풍자했다. 즉, 아무리 정교한 철학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지 못한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체계와 종결성은 서로 상응하지만, 실존은 이와 정반대"라고 주장하며,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미완결성과 개방성을 강조했다. 실존하는 개인은 언제나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이러한 실존의 역동성은 어떠한 완결된 체계로도 포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과 진리의 관계: 진리는 주관성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유명한 명제 중 하나는 "진리는 주관성이다"(Truth is subjectivity)라는 주장이다. 이는 진리가 주관적이라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인간의 관계 방식에 관한 주장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의 문제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옳은 명제라 하더라도, 개인이 그것을 열정적으로 내면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진정한 진리가 될 수 없다. 반대로 비록 객관적으로는 불확실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명제라 하더라도, 개인이 전존재를 걸고 그것에 헌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사람에게는 진정한 진리가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처럼 진리를 개인의, 특히 신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함으로써, 진리가 지적 동의나 이론적 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관여와 헌신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현대 실존주의에 미친 영향

키에르케고르는 생전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20세기에 들어 실존주의 철학이 부흥하면서 재평가되었다. 특히 하이데거, 사르트르,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의 '개별성', '선택', '불안', '실존적 진리' 등의 개념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철학뿐만 아니라 신학, 문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학에서는 칼 바르트, 폴 틸리히 등 변증법적 신학자들이 키에르케고르의 '신앙의 역설' 개념을 발전시켰고, 심리학에서는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토대가 되었다.

문학에서도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사르트르 등 많은 작가들이 키에르케고르의 영향 아래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들은 모두 추상적인 관념이나 사회적 구조보다 구체적인 개인의 경험과 결단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세계와 키에르케고르의 의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키에르케고르가 비판했던 헤겔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파편화되어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 대중매체의 확산, 소비주의의 심화 등으로 인해 개인의 정체성과 진정성은 더욱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키에르케고르의 메시지는 여전히,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울림을 갖는다.

그가 지적한 '군중 속의 익명성', '책임 있는 선택의 회피', '심미적 삶의 공허함' 등의 문제는 현대인의 실존적 곤경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SNS에서의 가상 정체성, 끝없는 소비를 통한 자기실현 추구, 깊은 관계 대신 표면적 연결에 머무는 인간관계 등은 모두 키에르케고르가 경고했던 '비본래적' 삶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것을 촉구한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던져진 실존적 도전장이다. "당신은 진정 당신 자신이 되고 있는가?" 이 질문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키에르케고르가 보여준 철학하는 방식은 철학이 단순히 추상적 사변이나 학문적 게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실천적 사유임을 일깨워준다. 그의 철학은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실존적 위기와 결단의 순간으로 이끌어,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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